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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오서리 안동권씨 경행재 景行齋

천부인권 2019. 9. 23. 06:00

2020.7.7. 안동권씨 경행재 전경

 

 

2019.9.16 진전면 오서리 안동권씨 경행재 대문

 

진전면 오서리 635번지에는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된 안동권씨(安東權氏) 문중의 재사(齋舍)인 경행재(景行齋)가 있다. 예전부터 몇 번이나 이곳을 찾았지만 항상 밖에서 본 모습의 사진만 얻은 채 내부를 보지 못해 기록으로도 남기지 못했다. 이번 오서리 일대의 재실(齋室) 탐방을 하리라 마음먹으면서 경행재(景行齋)을 꼭 봐야하는 목록으로 정했다. 오서리에 도착하여 경행재 대문을 열어줄 관리인을 찾았으나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어 근처에 위치한 진전면사무소를 찾아가 경행재를 구경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문의하니 진전면사무소에서 경행재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따로 있어 그분의 안내로 경행재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경행재 입구 안내판에는 『안동권씨 문중의 회계서원(檜溪書院)의 지원(支院)으로 1867년 건립되어 초기에는 문중의 재실을 겸한 한학서숙(漢學書塾)으로 사용됐지만 일제강점 이후에는 사립 경행학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경행학교는 이 지방 신식교육의 전당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의 요람이기도 하여 많은 애국열사(愛國烈士)를 배출하였다. 이후 1927년 왜구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공립보통학교를 신설하면서 폐교되고 건물은 강습장, 회의장 등 지역행사를 위한 문화시설로 이용되어 왔다. 처음 지어졌던 건물은 4칸 반 규모에 들보 3량(樑), 우물마루를 갖춘 팔작지붕 와가(瓦家)였으나, 1988년 보수공사를 하면서 누마루가 증축되어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외관에는 큰 변화 없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적었다.



 

 

 

경행재 대문은 아무른 편액도 없는 무명의 출입문인데, 이 건물을 지을 당시에도 이름을 짓지 않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을 두고 정면에 마주하는 두 개의 비석이 눈길을 끈다. 좌측 비문에는 ‘애국지사백당권녕조선생기념비(愛國志士白堂權寧祚先生紀念碑)’라 새겼고, 우측의 비명은 ‘성재권오봉선생공적비(誠齋權五鳳先生功績碑)’라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따로 기록할 예정이다.

 

 

 

 

2019.9.16 경행재 정면

 

경행재(景行齋)는 8개의 기둥이 있는 6칸의 건물인데 주련은 없고 건물의 중앙에 경행재 편액만 달려 있다. 처음에는 희암(希菴) 이우상(李瑀祥)¹⁾이 쓴 글씨의 편액이 걸렸으나 지금 경행재 편액은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1894~1956년)²⁾ 선생이 쓴 것이다. 경행재 내부에는 기문과 상량문 등은 없고 회계재차운시(檜溪齋次韻詩) 1편만 있다. 소개하는 기문과 상량문은 「진전면지(鎭田面誌)」에 실린 것이다.

 

【주석】
희암(希菴) 이우상(李瑀祥;1801년~1877)¹⁾ : 본관은 여강(驪江), 자(字)는 우옥(禹玉), 호(號)는 희암(希庵). 이덕문(李德聞)의 현손으로 구헌(懼軒) 이돈항(李敦恒)의 증손이며, 조부(祖父)는 생원(生員) 야은(野隱) 이헌석(李憲錫), 아버지는 청우당(淸友堂) 이정열(李鼎說)이며, 어머니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치암(痴庵) 남경희(南景羲)의 딸이다. 유저로 희암문집(希庵文集)이 전한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1894~1956년)²⁾ :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구(汝耉)이며 호는 해공(海公)이다. 이명으로는 임방호(壬邦乎)를 사용했다. 경기도 광주 출생. 조선시대 때의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역임했고, 귀국 후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신익희(申翼熙)선생이 쓴 경행재 편액

 

 

 

회계재차운시(檜溪齋次韻詩)

 

謹次檜溪齋韵   삼가 회계재(檜溪齋)의 시에 차운(次韵)하다.
望之欝然碧松楸 바라건대 도래솔(松楸)이 벽처럼 울창하니
遺韻餘風吹不休 남겨둔 시운(詩韻)도 바람이 불어 쉬지 못한다.
孝友百行源底事 효도와 우애는 모든 일의 밑바닥을 이루는 근원으로
睦婣六德山中樓 친인척간에 화목하고 육덕(六德)을 갖추니 산중의 누각이로다.
嵗寒松柏氣猶壯 세한(嵗寒)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의 기운은 아직도 씩씩하고,
日暖音容儼若留 일기는 따뜻하고 음성과 용모는 의젓하여 머무르는 것 같다.
欲拜軒屛瞻仰裏 어른의 곁에서 배(拜)하고자 한다면 우러러 사모함이 마음속에 있을 것이며
源源蔭德故山邱 근본적인 조상 덕의 근원은 산에 묘소가 있는 까닭이다.
歲辛未族末道錫謹稿 1871년 족말(族末) 도석(道錫) 삼가 원고를 쓰다.

 

 

[原文]
景行齋記
景行古檜溪院之西齋扁乎也 希菴李丈瑀祥手寫者也 上之莅祚四年丁卯 又爲塾于竹之南 以便新進者 隷業之所 越明年戊辰檜溪院掇因 以其齋揭之于 此非要工省盖 以示不忘舊底意也 齋凡六間 頗宏敞楹椽也 質而不侈房奧也 寬而不淺 壁間可藏車弆千卷書 籍其可見 闔宗父兄 牖蒙之功也 噫 齋成之年 卽我覽揆之辰也 長於斯 絃於斯 儷掃於斯 周旋於斯 三宿之桑 佛者猶云係戀況是齋也 旣與我同庚 又麗澤所也哉 余所以記之亦 不忘意也
竹史 權載皐 記

 

[해문]
경행재기(景行齋記)
경행재(景行齋)는 옛 회계서원(檜溪書院)의 서쪽 재(齋)의 이름이다. 희암(希菴) 이장우상(李丈瑀祥)이 직접 적었다. 고종 4년 정묘(丁卯)에 죽곡(竹谷)의 남쪽에 글방이 생겼으니 새로 학업을 익히는 사람들의 장소로 편리하였다.
이듬해 무진(戊辰)에 회계서원이 철폐되어 그 재(齋)의 편액을 이곳에 걸으니 공부의 성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옛것을 잊지 않으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재실은 무릇 6간인데 자못 넓고 앞이 탁 트였으며 기둥과 서까래는 사치스럽지 않으며 방은 따뜻하고 넓으며 얕지 않았다. 벽 사이에는 천권서적을 저장하게 만든 것은 온 문중의 부형들이 학동들을 깨우친 공임을 알 수 있다.
아아! 재사(齋舍)가 완공 되는 해는 바로 내가 태어난 해로 여기에서 성장하고 글 읽으며 청소하고 기거하고 지금 고향에서 3일 밤을 유숙하게 되었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하물며 이 재사의 나이가 나와 같고 또 벗이 서로 도와서 학문과 덕을 닦은 곳에 있어 서랴! 내가 기문을 짓는 것도 또한 이것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다.
죽사(竹史) 권재고(權載皐)가 짓다.

 

 

 

 

[原文]
竹溪書塾上樑文
塾舍不能容宜 增間架之營 葺匠師番曲面 爰見堂宇之美 輪去小就 寬自彼移 此念玆古稱 八鎭山海之地 必有十室 忠信之人 俗尙好儒際昭世苑 然興學事 成有志使 後入善也繼聲 十數年鳩財料理 重修之資用 五六間翬跂經度 久遠之良 規旣僉謀之攸 同迺吉基之載卜 文星一字對案而重重 筆勢尖峯 揷天而矗矗 大谷蟠據厥土 則無荒歲之硯田 鉅川奔流其勢焉倒 詞源之墨海 歲聚奎星丁卯 日維建辰月得辛 天時符地靈 狄知佳氣之幷萊 人事合衆力 方驗同志之可觀 心上經營曰 彼左鋸右斧之執者 眼前突兀見 此上棟下宇之取諸肆 惟式廓之增 其盍勉學文之 則以古規鹿洞斯士駿髦黃卷抱登咏哥 而冠六五童六七靑 襟廣問學 禮乎經三百曲三千藏焉 以修遂爲四方來 學者居所 歌於斯頌願 與一鄕諸君子落之將擧 雙虹聊贊六偉
兒郞偉抛樑東
君子之邦曉旭紅 玆土漸回文明運 家家儒士日新工
兒郞偉抛樑西
活水源流自檜溪 餘力文章知所學 爭隨覺筏渡津述
兒郞偉抛樑南
遙見鵬溟碧而籃 萬里大風將借力 前程到此是豪男
兒郞偉抛樑北
磅礴航山橫斗極 拳石之多能大成 功存仞蕢一躋力
兒郞偉抛樑上
翔鳳雝雝這氣像 需用明時才有餘 此問成就正趨向
兒郞偉抛樑下
自遠朋來眞樂也 經義活磨湖學如 吾東素稱大中夏
伏願上樑之後爰 處時習維學月將 竹村苞生之基恒 如翠松茂葉蓮榜 踵出之歲豫占丹 桂添花
上元甲四年丁卯三月十七日巳時
成造有司 權捄
監役有司 權敬烈
都料匠   金東殷

 

[해문]
죽계서숙상량문(竹溪書塾上樑文)
서당이 수용할 수 없어 집을 넓힐 것을 경영(經營)하는 것이 마땅하여 목공(木工)이 나무의 생김새에 따라 당우(堂宇)의 아름다움을 더하였도다. 적은 것을 버리고 넓은 대로 나가니 저곳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겼구나. 지금 생각해보니 옛날에 산해(山海)의 사방사우(四方四隅)에 진(鎭)을 설치(設置)한 것을 팔진(八鎭)이라 일컬었으며 반드시 십실(十室)¹⁾의 집에도 충신(忠信)의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다.
풍속(風俗)을 숭상(崇尙)하고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세상에는 학문을 일으키는 것이 완연하고 뜻이 있으면 끝내는 일을 이루게 되니 후인으로 하여금 훌륭하게 명성을 이어지게 하였구나.
십수년간 재목(材木)을 모으고 다듬어 중수(重修)하는데 도왔고 오육간(五六間)의 으리으리한 집은 오랫동안 경영하여 그 규모(規模)는 훌륭하네. 다 함께 도모(圖謀)하여 좋은 집터를 가렸도다. 문성산 일자봉(文星山 一字峯)은 안대(案對)²⁾로 거듭하였고 필봉(筆鋒)의 뾰족한 봉우리는 하늘에 우뚝 솟았네. 큰 골짜기 그곳을 점령(占領)하였으니 선비들에게는 글감이 넘치고 큰 내의 형세는 세차게 흐르니 글을 짓는 근원(根源)이 풍부(豐富)하도다.
해는 규성(奎星)이 모인 정묘년(丁卯年)이고 날은 3월 17일이구나 천시(天時)가 지령(地靈)과 부합(符合)하여 아름다운 기운이 다 모였음을 알겠으며 인사(人事)가 중력(衆力)³⁾과 합하여 바야흐로 동지(同志)들이 협력한 것을 징험(徵驗)하겠네. 마음속으로 경영하여 저 왼손으로는 톱을 잡고 바른손으로는 도끼를 잡은 사람들이 도와 눈앞에 우뚝 솟은 서당(書堂)은 이에 위로는 들보가 보이고 아래로는 처마가 보이네.
오직 집을 넓혔으니 어찌 학문에 힘쓰지 않겠는가. 옛날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⁴⁾을 법(法)으로 삼았으니 모두 재덕(才德)이 뛰어난 선비로구나. 책을 앉고 올라가서 영가(詠歌)하는 어른은 육·오명(六·五名)이요. 아이는 육·칠명(六·七名)이다. 생도(生徒)들이 널리 예학(禮學)을 물으니 경례(經禮) 삼백과 곡례(曲禮) 삼천이로다. 공부하는 사람이 사방에서 모였으니 배우는 사람들의 거처(居處)하는 장소(場所)가 되고 여기에서 노래하고 덕을 칭송(稱頌)하였으니 한 고을의 모든 군자(君子)가 낙성(落成)하기를 바랐다.
대들보를 들어 올리려하니 이에 육위(六偉)의 글을 지어 도우련다.
들보 동(東)쪽에 면(麵)을 던지며 축원(祝願)하노니
군자(君子)의 나라에 새벽 햇빛을 붉게 비추고, 이곳에 점차 문명의 운(運)이 돌아와, 집집마다 선비가 날로 새롭게 공부하구나.
들보 서(西)쪽에 면(麵)을 던지며 축원(祝願)하노니
물의 근원(根源)은 회계(檜溪)로부터 흘러 왔고, 행하고 남은 여가(餘暇)에 학문하여 배울 바를 알았으며, 다투어 깨닫는 배를 타고 미진(迷津)을 건넜도다.
들보 남(南)쪽에 면(麵)을 던지며 축원(祝願)하노니
멀리 대붕(大鵬)이 남쪽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니 푸르기는 쪽(藍)과 같고,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에 큰 바람을 일으키는 붕(鵬)새의 힘을 빌려, 앞길이 여기에 이르러야 호걸남아(豪傑男兒)이다.
들보 북(北)쪽에 면(麵)을 던지며 축원(祝願)하노니
높고 튼튼한 여항산(餘航山)은 북극성(北極星)을 가로 질렀고, 주먹만 한 돌이 많이 모여 큰 산을 이루었고, 공(功)은 하나하나 쌓여 합심(合心)하여 이루었도다.
들보 위쪽에 면(麵)을 던지며 축원(祝願)하노니
날라 가는 봉(鳳)의 울음소리는 이 기상(氣像)이고, 밝은 세상에 쓰이는 재주는 넉넉함이 있고, 이속에 성취(成就)하니 취향(趣向)은 바르구나.
들보 아래에 면(麵)을 던지며 축원(祝願)하노니
벗이 먼데서 찾아오니 참으로 즐거우며, 경전(經傳)의 뜻을 괄마(刮磨)⁵⁾한 학문은 호수와 같고, 우리나라는 본디 큰 중국(中國)이라 불렀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량(上樑)을 한 후로는, 곳곳마다 때때로 익혀 학문은 날로 달로 진보(進步)하세, 토대(土臺)의 견고(堅固)하기가 빽빽한 대나무 같고, 항상 소나무 같이 푸르고 무성하며, 급제(及第)하는 사람이 이어 나오는 해에는 미리 어사화(御賜花)를 쓸 것을 점(占)치도다.
1867년 3월 17일 오전 9시~11시 사이.
성조유사  권구(權捄)
감역유사  권경렬(權敬烈)
도료장    김동은(金東殷)

 

【주석】
십실(十室)¹⁾ : 논어 공야장(論語 公冶長) 27장에 『子曰 十室之邑에 必有忠信이 如丘者焉이어니와 不如丘之好學也니라. [공자가 말하길 열 집이 살고 있는 조그만 마을이라도 반드시 나만큼 성실한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한데서 따온 글이다.
안대(案對)²⁾ :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대함.
중력(衆力)³⁾ : 많은 사람이 모임으로써 얻어지는 세력이나 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⁴⁾ : 남당(南唐)시대의 학관(學館)으로 주자(朱子)가 다시 일으킨 곳. 이발이란 사람이 이곳에서 흰사슴을 길렀다 하여 붙어진 이름.
괄마(刮磨)⁵⁾ : 학문을 갈고 닦음.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