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웅동 소사리 동래정씨 죽항재 竹項齋

천부인권 2019. 10. 5. 06:00



2019.10.4. 웅동1동 소사리 죽항마을 동래정씨 죽항재


진해구 소사동 100번지에는 동래정씨의 재실인 죽항재(竹項齋)가 있다. 재실 이름을 죽항재라 한 것은 마을 지명이 죽항(竹項)이기 때문이다. 소사리의 북쪽에 위치한 죽항마을은 팔판산의 한 능선이 대장천을 만나기 전에 이루어진 작은 마을로 지금은 1가구와 죽항재만 남아 있다. 소사IC에서 남해고속도로제3지선 진입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죽항재 앞쪽에 있어 차량의 소음이 꾀 심하다. 죽항마을은 사라졌지만 보상 문제로 죽항재는 도로에 편입되지 못하고 옛 위치를 지키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죽항재(竹項齋)의 주인을 만나지 못해 외부의 모습만 기록으로 남기고 다음 기회에 기문 등은 살펴보기로 하고 죽항재의 주련과 죽항재 뒤편에 세워져 있는 『동래정공휘임동입하합제단(東萊鄭公諱任東叺下合祭壇)』의 내용을 옮겨 둔다.




2019.10.4 웅동1동 죽항재 전경



동래정씨 죽항재 편액




竹項齋柱聯-文山
晝香夜燭齋宿叺誠 낮에는 향기 나고 밤에는 촛불 밝히는 재숙소를 이루었으니
春露秋霜奠亭以時 봄에는 이슬과 가을에는 서리를 제물로 바치는 그때의 정자이다.
子孫之道克孝克弟 자손의 도리는 어버이에 효도하고 형제를 섬기니
祖先之德至重至遠 선조의 덕은 지극히 귀중하고 지극히 먼 곳까지 이르리라.





정임동 제단 비문(鄭任東 祭壇 碑文)
동래정공 휘(諱) 임동(任東)은 시조(始祖) 휘 지원(之遠)의 16대손이시고 정절공(靖節公) 설학재(雪壑齋) 휘 구(矩)의 7대손이시며 동평군(東平君) 휘 종(種)의 5대손이시다. 본 고향은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德谷面 )이며 거처(居處)는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南下面)이었는데 16세기말에 세상의 어지러움을 비끼어 창원군 웅동면 죽항(竹項)으로 옮겨 살게 되셨다. 그후 아들 휘 일생(一生)에게서 휘 인한(仁漢) 형제가 나시고 휘 인홍(仁弘)은 다시 휘 순적(順迪) 휘 휘(諱) 두성(斗星) 두 아들을 두셨는데 휘 순적(順迪)의 아들 휘 치헌(致憲)의 후손은 서울, 부산, 일본, 미국 등지로 나가 살게 되었으며 휘 인한(仁漢)은 휘 순난(順蘭), 휘 치성(致星)으로 이어져 달리 한 갈래를 이루었고 휘 두성(斗星)은 휘 치걸(致杰), 휘 치흥(致興) 치업(致業) 휘 치영(致榮)의 4형제를 두시어 양산, 거제, 일본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후에 세월이 흘러 자손이 많아지고 갈래가 여럿이 되어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살게 되니 선산(先山)을 돌보기가 어려워 졌었다. 1980년 12월 6일에 일천(壹千) 우수(于守) 영덕(盈德) 우영(雨英) 등이 모여서 이곳에 재실(齋室)을 짓고 제단(祭壇)을 모아 7대조 입상(叺上)을 한자리에 모시기로 뜻을 모았으며 82년 12월 19일에 재실을 지었고 이제 제단(祭壇)도 완공 되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형편(形便)에 맞추어 마련한 것이니 얼마간 구습(舊習)에 벗어나고 양례(襄禮)에 어긋남이 있을 것이니 예(禮)는 본디 정성(精誠)에서 나오는 것이니 오직 지성(至誠)으로 모시려는 일념(一念)에서 이 제단을 모으는 바이다.
1984년 4월 5일
11대손 우영(雨英) 삼가 짓고
영산인(靈山人) 신용옥(辛容玉)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