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임곡리 창원황씨 임천정 林泉亭

천부인권 2019. 9. 29. 19:00



2019.9.16 진전면 임곡리 창원황씨 사당 세원사(世源祠)


진전면 임곡리 370번지에는 창원황씨의 재사(齋舍)인 임천정(林泉亭)과 사당(祠堂)인 세원사(世源祠)가 있는 곳이다. 처음에는 임천정(林泉亭)을 지어 재실로 사용해 오다가 장소가 협소해서 위쪽에 보다 넓은 세원사를 건립하여 선조들을 추모하고 있다.
남와(南窩) 황세철(黃世喆)이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자 그 원수를 갑기 위해 그의 아들 모헌공(慕軒公) 황치근(黃致謹)이 진주성으로 왔다가 전쟁이 끝나 버려 고서(姑婿)인 구인후(具仁垕)의 도움을 받아 진전면 임곡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방문할 당시 세원사(世源祠)는 문이 잠겨 있어 외부만 기록했고 임천정(林泉亭)에는 편액과 주련 및 기문과 시문의 편액이 걸려 있어 소개를 한다. 권상규(權相圭)가 쓴 임천정기(林泉亭記), 이태식(李泰植) 쓴 임천정상량문(林泉亭上樑文), 후손 황병관(黃炳瓘)이 쓴 임천정포사(林泉亭宲祀), 임천정원운(林泉亭原韻)과 차운(次韻) 등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세원사(世源祠) 편액


세원사기(世源祠記)
吾祖世喆後近世者祠宇로서 世孫蕃盛으로 旣存林泉亭은 狹小難境이라 後孫 湜周氏가 주관하여 5년여에 걸쳐 노력한 끝에 마침내 甲戌年에 祠堂을 建立하여 世世孫孫 世祿之臣의 源流인 先代의 位牌를 奉安하고 享祀할 堂號가 慕軒이다. 公 은 宣祖十五年壬午一五八二年二月七日에 出生하니 어릴 때부터 性品이 孝誠스럽고 聰明하였으며 智略이 있어 八歲에 孝經과 論語를 通達한 閥閱¹⁾의 才童이었다. 모헌공(慕軒公)의 先老인 禦侮將軍의 諱는 世喆이요 號는 南窩이다. 府君은 宮城守門將에 勤職時 壬亂이 勃發하자 倡義하여 總管에 運糧官으로 忠淸兵使 黃進과 姜熙悅 李宗仁 李灒 등과 함께 晋州城에서 奮戰하시다가 殉節하시니 宣祖二十六年癸巳 一五九三年六月二十九日이다. 그때 淑夫人平山申氏先祖妣는 서울 三角山아래 避居하고 계실 때 變을 당한 傳喝을 듣고 죽음은 나라의 忠誠이요 義理라하시며 아들 致謹에 當付하시기를 뒷날 아버지의 뜻을 이어라 하시며 慟哭하고 絶食死하시니 節義에 찬 烈婦이시다. 公은 禮로서 喪을 치르고 弓馬術을 익히더니 어느 날 忽然히 佩劍慟哭하고 南으로 怨讎의 길을 떠나 晉州城에 當到하니 이미 戰爭은 끝나 宣祖三十三年庚子一六〇〇年十八歲靑年이었다. 公은 復讎의 길을 잃고 家鄕千里無依前進하며 東萊府를 거쳐 靑松府使 再族兄 致誠의 任所를 찾아 그곳에 留在時 參奉 嚴彦良의 女와 三生綠分을 맺었다. 當代統營統制使 具仁垕는 姑婿라 그곳을 찾으니 着足無處한 公을 鎭海縣林谷里에 집과 田庄을 마련한 것이 오늘날 우리 家門의 世居之地가 되었다. 後日 具仁垕는 還朝하여 狀啓²⁾로 稟申하니 蔭官通政大夫折衝將軍僉樞府事에 贈職되었다. 公은 晩年에 書冊을 즐기며 生滅變轉의 無常한 法悅속에 生을 마치니 仁祖二十年 甲戌一六三四年七月十九日 享年五十三歲다. 墓는 龜山面 石谷里一八九番地 中嶝巽坐다. 生四男一女가 있으나 長男 一淸墨窩公系譜만 繼承한다. 上古하여 始祖 諱 石寄 號 檜巖 諡 恭僖公은 中朝人上護軍으로 大長公主를 陪從하여 東來하였다. 公은 忠肅 忠惠 忠穆 忠定 恭愍 五王朝를 歷事하시면서 많은 偉業과 功勳을 세우시어 品階가 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檜山府院君으로 恭愍王十三年甲辰一三六四年八月十五日에 遐世하시다. 長男裳은 諡 恭靖公은 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檜城府院君이며 次男 昌은 正順大夫知平州事로 우리 世系祖이다. 生男善慶은 奉訓郞大興縣監이며 生四男中 長男仁軒 次男義軒 四男智軒은 安平大君 瑢과 端宗復位謀議에 連類되어 被禍되었다. 三男 禮軒은 中直大夫 繕工監正이다. 生男 衝은 諡 莊武公이며 五衝都摠府都摠管이며 工曹判書다. 生八男中長男瓚은 德源府使이며 可瞻寺副正이다. 生四男中 셋째인 世喆은 禦侮將軍으로 林谷里遺墟碑主이며 生男 致謹은 이곳 世居之地의 始祖로 公의 垂訓之薰陶에 濡染³⁾한 우리 一族은 世源祠기틀 아래 길이 崇祀하며 日新貢獻할 것이다.


【주석】
閥閱¹⁾ : 벌열(閥閱)은 가문에서 기대하는 또는 가문에서 주시하는
狀啓²⁾ : 장계(狀啓)는 감사나 또는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서면으로 왕에게 보고함.
濡染³⁾ : 유염(濡染)은 단련해서 저절로 능력이 생기는 것.




창원황씨 임천정 모습




林泉亭 柱聯
父子從難壬癸年  부자간에 임계(壬癸)의 난리¹⁾에 참여하니
忠孝承緖賦任天  가업을 이은 충효는 하늘에서 타고 났네
沈城督戰爭先死  침몰하는 성 독전하며 먼저 죽기를 다투고
戀闕懷親矢兩全  임금과 어버이를 그리며 양전(兩全)²⁾을 맹세 하였네.


【주석】
임계(壬癸)의 난리¹⁾ : 임진왜란(壬辰倭亂)
양전(兩全)²⁾ :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두 가지 일을 말함.





林泉亭記-[原文]
鎭縣之西有曰林谷帆峯 鎭其北巨川 經其南環以 爲城郭衍以 爲坊里檜山黃氏世庄也 黃氏本京城華閥胡 爲其徙乎鎭亂劫而淪落也 鳴呼噫嘻龍蛇之晉陽 卽古之睢陽也 忠魂毅魄之踵 巡遠者何限 而南窩黃公亦以矢復焉 夫人申氏繼之以殉卓乎烈哉 公之胤慕軒公 深懷討復雪涕 南下從再堂兄 致誠於靑松任所 亂旣定復 從統使具公仁垕 筮居于鎭綿延已十數世 今雲仍諸公追慕南窩翁申夫人之忠烈 設壇竪碑 歲時薦享 餘孝尙不匱於 丁丑冬建棟宇於所居之坊 羹墻寓慕之所 其制中堂而前楹兩夾 爲房室老少異位凉燠各適 扁其楣曰林泉 粤翌年冬 公十一世孫護烈 北走六百里 問記於不侒竊 惟國朝褒忠 獎節之典 無幽不闡 自壬癸以來三百年之間 敵愾殉國之士 次第貤蒙贈之褒 而獨於南翁乎 有向隅之歎所謂天地猶憾焉者 而兵燹之餘文獻 又無徵林下 君子無有能考據 而揄揚此仁孫 所以惕然興慨 有今日之請也 然顧此人輕筆萎何足 爲有無哉 但念公炳炳高義 寔出於無所爲而爲固不可 以顯晦爲重輕況 一晦一顯 自有其時 是亭之雖成 是仁孫孝慕公之餘 而亦可見天心之有待於今日也 從今以往東南人士登是亭者 必將慕公之忠知所以景仰矣 以之樹風聲而淑人心者 又豈亶黃氏永慕已哉 雖然詩曰靡不有初鮮克有終之道在於肯構之如何 耳後之遊斯息斯者 子子孫孫苟能以僉賢之心爲心 而思所以肯構焉 則公之高忠卓節將永流於千祀矣 不亦恔乎 古語云求忠臣於孝子之門 求孝孫於忠臣之門 其理則一也 敬爲諸君子勉焉未知不以人廢言否
永嘉 權相圭 記


임천정기(林泉亭記)-[해문]
진해현(鎭海縣)의 서쪽에 임곡(林谷)과 범봉(帆峯)이 있다. 그 북쪽에 큰 시내가 남쪽을 지나 성곽(城郭)을 둘러싸고 마을을 지나고 있으니 회산(檜山) 황씨(黃氏)가 대를 이어 사는 고장이다. 황씨는 본래 서울에서 화려한 문벌(門閥)인데 어찌하여 이곳으로 이사(移徙)를 하였는가? 난리를 만나 가문이 쇠퇴(衰退)해 졌기 때문이다.
아아! 슬프다. 임진왜란에 진양(晉陽)은 곧 옛날의 휴양(睢陽)¹⁾땅과 같았다. 충신의 영혼(靈魂)과 영웅의 기백(氣魄)이 전사를 하였으니 장순(張巡)²⁾과 허원(許遠)³⁾ 같은 충신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남와 황공(南窩 黃公)도 또한 성을 회복하기를 맹서(盟誓)하여 죽었고 부인 신씨(申氏)도 이어서 순절(殉節)하였으니 우뚝하게 충(忠)과 열(烈)을 겸하였다.
공의 맏아들 모헌공(慕軒公)이 깊이 왜놈들을 토벌(討伐)하여 다시 치욕(恥辱)을 씻을 뜻을 품고 울면서 남쪽으로 재당형 치성(再堂兄 致誠)을 따라 청송 임지로 내려왔다. 그러나 난(亂)이 이미 평정되어 다시 통사(統使) 구공(具公)⁴⁾ 인후(仁垕)를 따라 처음으로 진해현에 살기 시작한지 이미 십수대(十數代)를 면면히 이어왔다. 지금 후손들이 남와(南窩)옹과 신부인(申夫人)의 충열(忠烈)을 추모하여 단을 설치하고 비를 세워 해마다 시정(時亭)을 받들어 온 끝에 효를 숭상함이 그치지 않았다.
정축년(丁丑年) 겨울에 공이 사시던 마을에 집을 지어 추모하는 정을 붙일 장소로 하였다. 그 규모(規模)는 중간을 당(堂)으로 하고 양쪽에는 방을 만들어 노소(老少)의 자리를 따로 만드니 집이 따뜻함과 시원함이 알맞다. 그 문 위의 현판(懸板)은 임천(林泉)이라 하고 다음해 겨울에 공의 11세손 호열(護烈)이 북쪽으로 600리 길을 달려와 보잘 것 없는 나에게 기문을 청하여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정(朝廷)에서 충(忠)을 포양(褒揚)하고 절의(節義)를 장려(獎勵)하는 은전(恩典)이 감추어진 것을 다 들었는데 임진·계사년 이래로 300년간에 적을 토벌(討伐)하려는 殉國의 사람들이 차례대로 증직과 포양을 입었으나 유독 남옹(南翁)만이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였으니 중용(中庸)에서 이르는바 「천지(天地)⁵⁾의 큼으로도 사람이 오히려 한(恨)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일 것이다. 난리 끝에 문헌(文獻)이 없어서 은둔(隱遯)하는 군자가 증거(證據)를 상고(詳考)하여 세상에 알림이 없었으니 이것을 어진 자손들이 슬퍼하여 오늘 나에게 기문을 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글이 짧아 내 글이 있고 없고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다만 생각건대 공의 빛나는 높은 의리(義理)는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이름이 들어나게 되었으니 진실로 세상에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경중을 논할 수는 없다.
하물며 한번은 감추어지고 한번은 나타나는 것이 스스로 때가 있으니 이 정자(亭子)를 비록 이루었으나 이는 어진 자손들이 조상(祖上)을 추모하는 나머지이고 또한 하늘의 마음이 오늘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겠구나.
지금부터 우리나라의 남쪽 인사(人士)들이 이 정자에 오른 사람들은 반드시 공의 충을 추모하고 스승을 우러러 보는 까닭을 알 것이다. 이로써 덕화(德化)를 세우고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는 사람은 어찌 진실로 황씨(黃氏)의 영모(永慕)의 아음에 그치겠는가. 그러나 시경(詩經)에서 「시작(始作)은 있지만 마침은 있기가 드물다.」라고 하였으니 道에 나아가는 길은 조상의 업을 이어가는 여하(如何)에 달려있다.
훗날에 이 정자에 놀고 쉬는 사람들은 자자손손이 진실로 여러 현인(賢人)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하고 조상의 업(業)을 이어나갈 것을 생각하면 공의 높은 충성(忠誠)과 뛰어난 절의(節義)는 창차 길이 흘러 갈 것이니 또한 유쾌하지 않겠는가.
옛말에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求)하고 효손(孝孫)도 충신의 가문에서 구하라 하였으니 그 이치(理致)는 한가지 이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말이라고 폐(廢)하지 않는 것을 알겠노라.
영가(永嘉-안동의 옛 이름) 권상규(權相圭)가 기록하다.


 【주석】
휴양(睢陽)¹⁾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장손(張巡)이 안록산(安祿山)의 반군(叛軍)을 막다가 전사(戰死)한 곳임.
장순(張巡)²⁾ : 당대(唐代)의 충신, 등주 남양(登州 南陽) 사람으로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진원현령(眞源縣令)으로서 상관의 항복명령을 거부하고 의병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덕종 이년(德宗 二年)에 허원(許遠)과 함께 강진(江進)에서 휴양성(睢陽城)을 수비하다 전사하였음.
허원(許遠)³⁾ : 당나라 사람, 사치(史治)에 능통함. 安祿山의 난에 현종(玄宗)이 불러 휴양태수(睢陽太守)가 됨. 장순과 합병하여 안록산의 병사를 막았는데 포위되니 수개월에 군량미가 떨어져 새나 쥐를 잡아먹고 살다 성이 함락되자 張巡과 함께 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였다.
구공(具公)⁴⁾ : 구인후(具仁垕) 선조 11(1578) 一孝宗九(1658). 조선초 중기 효종의 文臣. 자는 중재(仲載), 김장생의 문인, 심기원(沈器遠)의 난을 평정하고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천지(天地)⁵⁾ : 중용(中庸), 「天地之大也에도 人猶有所憾故」의 줄인 말.




임천정 편액



임천정상량문





<林泉亭 原韻>번역원

父子從難壬癸年  부자가 임진 계사의 왜란에 참여하여
忠孝承緖賦任天  충효의 계통을 이어 부여받은 천명에 맡겼네
沈城督戰爭先死  물에 잠긴 城에서 독전하며 먼저 죽기를 다투고
戀闕懷親矢兩全  임금과 부모에 대한 두 도리 온전히 행할 것을 맹세했네
臯䳽逢鳴聲未徹  구고(九臯)의 학이 늦게 울러 소리가 조정에 통하지 않았으나
棟翬新革代常傳  날 듯한 용마루 새로 바뀌었으니 대대로 전해지리
來孫繼述如軒月  후손들의 계술(繼述)이 난간에 비친 달 같아서
此夜聊知後夜圓  이 밤의 달이 훗날 밤에도 둥글지를 알겠네

胄孫 世益


*兩全 :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두 가지 일을 말함.
*언덕의 학 더디 울어 : 《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 하였는데, 이는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하였다.
* 계술(繼述) : 계지술사(繼志述事)로, 선왕(先王)이나 선조가 품은 뜻과 하던 일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9장에 “효도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고 부모의 일을 잘 전술하는 것이다.〔夫孝,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하였다.

*沈城 : 水攻으로 물에 잠긴 성으로 고립되어 위태롭게 된 성을 말한다. 전국시대 趙襄子가 智伯의 수공을 받아 성 안의 집에 부엌이 물에 잠기어 개구리가 새끼를 낳은 지경에 이르렀는데, 백성들이 조양자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謹題林泉亭
南江江水咽千年
漢北愁雲渺一天
獨幸彛衷終永賴
固知姱節獲雙全
睢陽往事人猶說
述嶺哀歌世有傳
寰宇如今悲缺陷
林泉爲保別區圓
晋山 河謙鎭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