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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적현리 창원황씨 추경각 追敬閣

천부인권 2019. 11. 16. 07:33



2019.2.11 창원황씨 대종회 추경각(追敬閣) 전경



2019.2.11. 적현리 성추문 전경


적현동 188-1번지에 위치한 창원황씨의 본적지에는 올해 2월에 처음 가보게 되었다. 몇 년 전에 한번 그 앞까지 갔으나 정확히 길을 몰라 되돌아 온 일이 있다. 지금도 창원황씨 추경각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으며 앞에는 공장이고 뒤에는 산이라 일을 삼아 찾지 않으면 갈일이 없는 외딴 곳이다.
옛날에는 창원황씨 추경각(追敬閣) 입구에 문창후 최선생이 노닐던 강선대(降仙臺)가 있었지만 공장의 건립으로 강선대는 파괴되었고 지금은 그 위치조차 정확하게 표기하기 어려운지경이다. 창원황씨 추경각(追敬閣)의 약 320m 전방 입구에는 “창원황씨선산국내(昌原黃氏仙山局內)”라 새긴 묘표가 길가에 서있어 묘지의 입구임을 알 수 있다.
추경각(追敬閣) 입구에 도착하면 성추문(省楸門) 앞에는 여러 기의 비석이 서 있다. 추경각(追敬閣)의 뒤쪽 산 위에는 창원황씨의 시조 시중공(侍中公) 충준(忠俊)의 묘소가 위치한다. 관리인이 살고 있는 염수재(念修齋)는 문이 닫쳐있어 볼 수가 없었고 재각(齋閣)인 추경각(追敬閣)에는 다양한 현판과 주련이 걸려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성추문 편액



염수재(念修齋) 모습



염수재(念修齋) 편액



2019.2.11 창원황씨 추경각 追敬閣




추경각 주련
孝悌也爲仁之本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를 공경함은 인(仁)이 근본이고
八位墳封萬世安 묘소에 안장된 여덟 위의 조상은 만대가 지나도록 편안하시네.
四山松柏千秋感 사방의 산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천추의 감회를 지녔고
海斗祥光萬里來 바다에서는 좋은 상스러운 빛이 만리 밖에서도 오네.




貽厥孫謀 후대에게 좋은 계책을 전하며
繩其祖武 조상의 업적을 이어가리라.





謝儀記文
蓋爲人子孫而追慕祖先 着任有司 而黽勉宗事 卽道理也義務也 鄙族三人 俱以湔劣非才 服有司之任者 或數十年 或十餘歲而小無絲毫之補 常切尸素之愧矣 今自宗中謂以酬勞 紀念品各贈銀匙筯日件 受之赬顔 退之傷廉不得已 敬受然其感謝之情 難以面面進達 將數言代書 刊板揭壁 惟僉宗 咸須照諒焉
庚辰  元月 日
漆原龜城 泌秀
    柳原 水煥
昌原鑑溪 羲秀


사의기문(謝儀記文)[해문]
대체적으로 자손된 자로서 조상을 추모하면서 유사가 되어 종중(宗中)일을 하는 것은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우리 문중의 유사 3사람은 모두 다 부족하고 자질이 없으면서 유사를 맡은 년도는 혹은 수십 년이고 혹은 십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문중에 보탬을 주지 못해서 항시 이름은 유사라 하면서 한일이 없어서 부끄러울 뿐인데 금번에 종중에서 수고 했다고 하면서 기념품으로 은수저 한 건식 주시니 받으려고 하나 얼굴이 부끄럽고 아니 받으려 해도 염치에 관계되는 일이라 부득이 정중하게 받았으나 그 감사한 뜻을 종친 앞앞이 다 말씀드리기 어려워서 몇 마디 말을 적어 판각을 해서 벽에 걸어 두었으니 종친 여러분들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경진년(1940) 정월 일
칠원 구성 필수
       유원 수환
창원 감계 희수





祭壇補修記
惟我始祖侍中公以下 八位墳墓與設壇處 年久頹圮 每於省掃之時 未嘗不怵然泚顙 而其修改之方 苦無財力 政難着役 環域吾族 其麗不億 而遠莫及議 惟山下近鄕幾門 請求役 資石以環之莎以封之 於是乎 上下墳墓 一體更新 追感彌增 僉宗之誠心出捐 足可以光先而式後 故于左揭記焉
乙亥三月 淸明節 都有司 泌秀
                宗有司 相庸 水煥


제단보수기(祭壇補修記)[해문]
우리의 시조이신 시중공(侍中公)으로부터 그 아래로 여덟 위의 묘와 설단(設壇)한 곳이 세월이 오래 되어 퇴락하고 무너져 해마다 묘사 올릴 때마다 슬픈 마음 견딜 수 없어서 이마에 땀이날 지경이었으나 수리하여 개축할 자금이 없어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살고 있는 자손의 숫자는 매우 많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관계로 의논을 하지 못하고 산소 가까이 사는 몇 문중이 묘역을 수축하자는 뜻을 모아서 축대를 쌓고 봉분(封墳)을 높이고 잔디를 심으니 참으로 아래 위의 여러 묘소가 전부 새로워지고 조상에 대한 감회가 더욱 깊어진다. 여러 종친이 성심으로 낸 돈으로 조상을 빛내고 후손에 규범을 물러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성금을 낸 자손을 기록한다.
을해년(1935) 3월 청명절에 도유사 필수(泌秀)
                         종유사 상용(相庸) 수환(水煥) -이하 생략-





追敬閣重建記
墓焉而祭祭焉而閣古也 詩曰維柔與梓必敬必 戒以植物猶敬戒 況墓而祭而閣而者 庸誰不治其誠而存其思乎 此吾追敬閣之所由始也 盖通國之姓 黃而系昌原者 咸而勝朝 文昌伯侍中公 爲鼻祖爾嶠之南 馬山府有山曰 臥雲罔其一脉 透迤而南臨海而止者曰 赤峴流峙環抱體勢拱揖 其中廓而有容若堂 而若斧者粤 維我皇祖侍中公 冠釰之藏也 有若磨崖書之 以昌原大姓黃氏世藏者 肆昔藥泉南相公 九萬題焉 舊有永慕齋數棟 卽我七世祖參贊公諱一夏 所經紀而屢閱星 霜風雨難避 族大人尙書 耆淵經學勛業 冠冕一時尤於奉光 諸節靡不庸極 千里展省八耋匪懈至 於刱壇竪石 增賁泉壤實公先後之 公嘗病丙舍之湫隘 且念齋宿之難客 有志重建而未果遽忽騎箕 曷勝惋惜公從子 參判演秀聿追先志謀所以鳩財起工於 是宗議僉同亟日經 始閱三個月而工告訖正室三架五間當中而面 南以至翼廊廻張三門 鼎峙幷然有序靡不一新于 是役也 前後敦工儘有規劃者 有司泌秀羲秀之力 爲多顧玆不肖誠力俱蔑猶不得從事 于羣賢後然自祖宗視之則均是子孫 自不禁瞻仰木 而睪峀望霜露 而凄然爾竊念百年未遑之擧 一朝而成之 豈獨使然哉 實參贊公永慕之 舊貫尙書公 肯構之遺志 相爲甲癸焉 然則纘先緖而裕 後謨至三公而盡矣 甄氏之思亭 王氏之靈庵奚獨專羹於 古歟畧誌顚尾 以告來者
歲壬戌十月之望後孫紀秀敬識


추경각중건기(追敬閣重建記)[해문]
묘(墓)에 제사(祭祀)지내고 제사(祭祀)지내기 위해 재각(齋閣)을 짓는 것은 예전부터 한 것이라 시전(詩傳)에 말하기를 조상(祖上)이 심어놓은 뽕나무와 자작나무도 반드시 공경하고 손상하지 않도록 경계했으니 식물도 오히려 공경하고 경계하는데 하물며 묘소(墓所)와 제사와 재각에 어찌 정성을 드리고 사모(思慕)하지 아니할까. 우리는 추경각(追敬閣)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라 우리나라 전체에 황(黃)씨로서 창원으로 관향(貫鄕)을 한 자는 모두가 고려 때 문창백(文昌伯)인 시중공(侍中公)으로 시조(始祖)를 하는지라 영남 마산고을에 유명한 산(山)있으니 와운산(臥雲山)에 그 한줄기가 굽이쳐 남쪽으로 내려와서 바닷가에서 그쳤으니 그 산이 적현산(赤峴山)인데 모든 산이 둘러있고 산 모양이 공읍(拱揖)을 하는 듯한데 그 가운데가 널찍한 중에 묘소가 있으니 저곳이 우리 시조 할아버지 시중공(侍中公) 체백을 묻은 곳이라. 큰 비(碑)에 창원대성황씨세장(昌原大姓黃氏世藏)이라고 쓰여 있으니 옛날의 외손(外孫) 약천(藥泉) 남정승(南政承) 구만공(九萬公)이 쓴 것이다. 옛날에 영모재(永慕齋)가 있었으니 곧 나의 칠세조(七世祖) 참찬공(參贊公)이신 휘 일하(一夏)께서 지으신 것인데 여러 해를 지나니 비바람을 피하기 어려운지라 족장(族丈) 상서(尙書) 벼슬한 기연공(耆淵公)의 학문과  공훈이 당시에 제일일뿐더러 더욱이 선조를 받드는 정성이 지극해서 천리(千里) 길을 와서 보살피기를 80 고령에도 게을리 안이해서 단(壇)을 만들고 비석(碑石)을 세웠으니 산천(山川)이 빛나게 되었다. 실지로 기연공(耆淵公)이 노력한 때문이라. 일찍이 재실이 옹색한 것을 걱정을 하고 또 제관이 제계하고 잠자는데 수용하기 부족한 것을 염려해서 중건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성사를 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할까. 공의 조카 참판 연수공(演秀公)이 선대의 뜻을 따라서 재물을 모아 중건하기를 도모하니 종중 논의가 동일한지라 빠른 시일에 시작을 해서 삼개월이 지나서 준공을 했으니 정실(正室)이 3칸이고 마루가 5칸이며 남향(南向)을 했으며 익랑(翼廊)과 담장 3문 등을 솔밭처럼 정중하고 질서 있게 지었으니 일신(一新)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을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공사를 열심히 하고 계획을 잘 세운 것은 유사(有司)인 필수(泌秀)와 희수(羲秀)의 힘이 많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정성이 부족하고 여러분들의 뒤에서 종사(從事)하지도 못했으나 그러나 조상님이 보면 다 같은 자손인 지라 묘소를 보면 죄스러움과 춘추(春秋) 제사 때에 처량함을 금할 수 없으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백년토록 하지 못한 일을 하루아침에 이룩했으니 어찌 홀로 그렇기만 할까. 실상은 참찬공(參贊公)의 정성과 상서공(尙書公)이 재실을 짓고자 하는 즐거운 뜻을 받들어 서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즉 선대의 뜻을 잇고 자손들에게 지혜(知慧)를 전해주는 것은 두 분이 다 했으니 견씨(甄氏)의 사정(思亭)과 왕씨(王氏)의 영암(靈庵)만이 홀로 아름답다고 하리요. 전말을 대략 기록해서 후손에게 알리노라.
임술(壬戌:1922)년 10월 15일에
후손 기수(紀秀)는 공경히 기록함.






追敬閣重建上樑文
伏惟昔高麗門下侍中之文昌伯 今全國昌原黃姓之顯始祖 封營在赤峴之東岡 齋閣建堂斧之西下 累經重建 宗議卽成 又移頹圮 移建是營 胥新基于宅非之近境 爰得省掃之便宜 擇良材江西之適地 將期保在之永久 有司不倦經營之籌策 竣功迅速 良工克輸彫刻之技巧 瞻仰美麗 貌多新規 扁用舊號 聊唱短詞 助擧脩梁
兒郞偉抛梁東 旭旭瑞日復昇東 屋宇輪焉觀且美 南國能傳上世風
兒郞偉抛梁南 祝賀聲高日正南 暫乘休息因相勸 白酒盈樽酒味甘
兒郞偉抛梁西 馬山山水護圍西 登臨快得心神爽 四壁山佳一路低
兒郞偉抛梁北 臥雲山脈主其北 不億雲仍盡獻誠 綿綿慶福永無極
兒郞偉抛梁上 彷彿英靈陟降上 慕先誠意久猶篤 歲歲孟冬供祭饗
兒郞偉抛梁下 一曲淸溪滾滾下 飛鳥應知感慕情 雙雙烏鵲飛來賀
伏願上梁之後 棟宇墻壁不被風而鼠雀之侵害 閱千年而且堅且固 京鄕後昆 永保祖上世德之遺蔭 亘百世而益繁益昌
檀紀 四千三百三十六年 癸未十一月十一日 後孫 致渟 謹記


추경각중건상량문(追敬閣重建上樑文)[해문]
엎드려 생각하니 옛날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창백(文昌伯) 휘(諱) 충준(忠俊)은 현재의 전국 창원황씨(昌原黃氏)의 시조(始祖)이다. 묘소(墓所)는 적현(赤峴) 동쪽 산에 있고 재각(齋閣)은 묘소 서쪽 아래에 있는데 누차 중건을 했으나 자주 무너지고 퇴락(頹落)함으로 종중(宗中)이 다른 곳에 옮겨 짓기를 결정한 것이다.
묘소(墓所) 가까운 곳에 새로 터를 정했으니 이에 묘소(墓所) 청소하기가 편리하고 강서(江西)에 좋은 재목을 취택(取擇)한 것은 장차 영구히 보존하도록 한 것이라. 유사(有司)가 건축하는 계획을 게을리 하지 아니했으니 신속(迅速)하게 준공을 했고 목수가 다듬는 기술에 능숙했으니 바라보니 아름답고 화려(華麗)하도다.
모습은 신식이나 현판(懸板)은 옛것 그대로 썼도다. 짧막한 노래로 긴 대들보를 올리는데 돕노라.
어기여차 들보를 동쪽으로 맞추니 빛나고 빛나는 햇살이 동쪽에서 뜨도다. 집이 우렁차 볼수록 아름다우니 남도지방(南道地方)에 옛 풍속을 전하도다.
어기여차 들보를 남쪽으로 맞추니 축하 소리 높은 날 정남쪽이도다. 잠깐 올라 휴식을 서로 권하니 희고 달고 맛있는 술이 술통에 가득하도다.
어기여차 들보를 서쪽으로 맞추니 마산에 산과 물이 서쪽을 에워 쌓도다. 재각에 오르매 마음이 상쾌하니 사방에 산이 아름답고 길이 나지막하도다.
어기여차 들보를 북쪽으로 맞추니 와운산맥이 북쪽으로부터 왔도다. 수많은 후손들이 모두 정성을 드렸으니 면면(綿綿)한 경사(慶事)가 영원히 다함이 없으리라.
어기여차 들보를 위로 맞추니 혼령(魂靈)이 오르고 내리는 듯 하도다. 선조를 추모함이 갈수록 독실(篤實)하니 해마다 10월에 제사(祭祀)를 거행(擧行)하도다.
어기여차 들보를 아래로 맞추니 노래 소리 같은 시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도다. 나는 새도 감모정(感慕情)을 아는 듯 오작(烏鵲)이 쌍쌍 축하(祝賀)하며 날아들도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上梁)한 후로 기둥이나 담장이 풍우와 서작(鼠雀)의 침해를 입지 않을 것이고 천년을 지나도 견고(堅固)할 것이고 경향각지(京鄕各地)에 후손들이 길이 조상님의 세덕(世德)과 유음(遺蔭)을 보존해서 백세토록 번창할 것이다.
단기 4336년 계미(癸未:2003) 11월 11일
후손 치정(致渟)이 삼가 기록함.





謹題 追敬閣韻 추경각 운으로 삼가 시를 쓴다.
建齋追敬祖先威 집을 지어 선조의 위엄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니
鍾鼎巍勳閱世遲 종정(鍾鼎)에 새길만한 업적은 세월이 오래도록 전해지네.
八位精靈同陟降 여덟 위의 조상의 령이 함께 오르내리는 곳이어서
一門宗族得依歸 온 문중의 자손들이 찾고 의지할 곳이 되었구나.
凔江與月迎樽滿 차가운 강에 비처진 달빛은 술잔에도 가득하게 비춰지고
伯嶂連雲人座輝 큰 산봉우리에 이어진 구름이 앉아 있어도 선명하게 들어오네.
繼述宜勤花樹契 조상의 뜻을 이어 받아 화수회를 돈독히 한다면
更將微見罄冠衣 앞으로도 훌륭한 자손 다 모일 것으로 생각 되네.
漆原 後孫 儀秀 칠원 후손 의수(儀秀)


慕先無路陪容威 선조를 추모하면서 위엄스런 행동을 할 수 없지만
建閣當年事不遲 추경각을 짓던 그해에 일들이 쉽게 잊어지지 않네.
勳業曾從靑史著 조상의 훌륭한 업적은 일찍이 청사에 나타나있고
精靈逈伴自雲歸 깨끗하신 영혼은 멀리서 흰 구름 타고 돌아오시네.
數行籩豆新添潔 깨끗한 제물 몇 줄로 차려 놓고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니
累世簪纓更動輝 대대로 이어온 조상의 관록들이 새롭게 빛이 나는 구나.
春露秋霜添掃日 이슬 내리는 봄과 서리 네리는 가을 제사 올리는 날이면
登斯愴惕攝端衣 이 집에 와서 추모하는 마음으로 단정하게 옷깃을 여미네.
後孫 灝烈 후손 호열(灝烈)


先靈百世儼如威 조상의 혼령은 백세를 지나도 의젓하게 계시는 것 같고
建閣追思歲月遲 추경각 지었으니 세월이 오래도록 추모할 수 있게 되었네.
張伯東來高笏揷 동쪽에서 뻗어 내린 장백산은 높게도 솟아있고
滄溟西濶亂帆歸 서쪽으로 넓은 창해에 수많은 돛단배 돌아오네.
裔孫述事期無添 후손들이 하는 일은 조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바랄 뿐이지만
上祖樹勳長發輝 윗대 조상이 남기신 훌륭한 업적들은 오래오래 빛이 나네.
牲酒年年烝享日 해마다 술과 제물을 준비해서 제사 올리는 날이면
不堪悽愴罄冠衣 의관 정제하고 다 모여서 추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네.
後孫章煥壬戌十月上旬 후손 장환(章煥) 임술(壬戌: 10월 상순)



출처
추경각사적지-창원황씨대종회/대보사(200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