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이명리 청주한씨 운계정 雲溪亭

천부인권 2019. 11. 8. 06:47



2019.10.30. 이명리 청주한씨 운계정


진전면 이명리 627-2번지에는 청주한씨 운계정(雲溪亭)이 위치한 곳이다. 예전에 정달마을에서 이명리를 거치지 않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동네 사람을 만나 재실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도로에 비켜 앉은 이명리로 가봤다. 이명리(耳明里) 최초의 입향조는 1700년경에 입향한 청주한씨 한희로(韓希老)이며 다음으로 용궁전씨(龍宮田氏)가 이주해 온 마을이다.
운계정에는 김녕한(金寗漢)이 적은 운계정기(雲溪亭記)와 徐相春(서상춘)이 기록한 운계정상량문(雲溪亭上樑文) 및 백당 정기헌(白堂 鄭基憲 : 1886~1956)이 쓴 운계정(雲溪亭) 현판, 후손이 남기 운(韻) 차운(次韻)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2019.10.30 청주한씨 운계정 대문



이명리 청주한씨 운계정 모습



백당 정기헌(白堂 鄭基憲 : 1886~1956)이 쓴 운계정(雲溪亭) 현판




雲溪亭記 [原文]
雲溪亭在鎭海郡 西一舍而近寔 上黨韓氏 世居之地也 韓氏東方大姓 而至參奉諱希老 隱居講學聲譽謁蔚 肅廟朝拜官不就 晩年自咸陽搬移耳明洞 而其山川之淸幽 土地之肥沃 可合隱者之所 寓遂卜築而徜徉焉 屋之西有川曰雲溪 可濯可漁亦可 以灌漑于 田作茅亭其上扁之曰 雲溪窩仍 以爲號 聚書其中 晨夜吟諷 以求其志 四方學者多從之遊 因不出洞外 而終焉噫乎 休哉亭子 歷世旣久 而陊圮只有址數頃 荒茀不治 八代孫浚棋甫 合謀諸宗重刱以復其舊 又經二十稔胤子炳純君 益加恢拓 以大之撤 其茅而瓦焉楹凡若干 而凉臺煥室備具 於是山蔥瓏而繞舍 水汨㶁而循墻 草樹含馨而洞府增采 過者拭目改觀 感歎異之 遣人走京師見囑以雲溪亭記 夫鎭海嶺右地也 近海而踔遠都 人士無由而至 吾未知形便 如何將何辭以記無 以則以古人粗迹 惟想可乎 詩之考槃衡門得列於國風 爲其有碩人之薖軸也 樓遲而樂飢也 豈非槃澗衡泌之是取乎 是亭也爲君子人所 徜徉取其適而忘乎 世是亦槃澗己矣 衡泌己矣 亭旣因人顯奚但江山風景之助 而己哉況其賢 子孫善繼善 述克任堂構之貴于 以傳之永遠 是可嘉己若 其溪山之明 媚雲霞之蕩 繘桑麻翳野 而漁鳥親人 是爲臨眺之趣也 余每翹首南望 爲之頫昻者屢矣
甲申春三月上浣 安東 金寗漢記


운계정기(雲溪亭記) [해문]
운계정(雲溪亭)은 진해군(鎭海郡)에서 서쪽으로 30리쯤(一舍)¹⁾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는데 상당(上黨)²⁾ 한씨(韓氏)가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한씨는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인데 참봉(參奉) 휘(諱) 희로(希老)³⁾에 이르러 숨어살면서 학문을 강론(講論)하여 명성(名聲)이 성(盛)하였다.
숙종(肅宗;1675~1720)조(朝)에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스스로 함양(咸陽)으로부터 이명동(耳明洞)으로 이사(移徙)하니 그 산천(山川)이 맑고 그윽하며 토질이 비옥(肥沃)하여 숨어 사는 사람이 정(情)을 붙이기에 알맞아 터를 가려 집을 지어 놓고 노닐었다. 집의 서쪽에 있는 내를 ‘운계(雲溪)’라 하는데 발을 씻고 고기를 잡을 수 있으며 논에 물을 대어 농사(農事)를 지을 만 하여 그 옆에 따로 지붕을 덮은 정자(亭子)를 짓고 「운계와(雲溪窩)」라 현판(懸板)하고 이를 호(號)로 하였다. 그 속에 책을 모아 놓고 밤낮으로 읊조리면서 그 뜻을 펴니 사방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따라 교유(交遊)함으로 동구(洞口) 밖을 나가지 않으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아! 아름답도다. 정자(亭子)는 여러 세대(世代)를 지나 너무 오래 되어 무너져 버리고 다만 유지(有址) 몇 이랑만 남아 있는데 다듬지 않아 잡초(雜草)만 무성(茂盛)하였다.
9세손 준기(浚棋)가 여러 일족들과 함께 중건(重建)하기로 도모(圖謀)하여 그 옛터에 복구(復舊)한지 또 20년을 지나 그 맏아들 병순군(炳純君)이 터를 넓혀 크게 지으면서 그 띠를 걷어내고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정자(亭子) 수간(數間)이 서늘한 대(臺)와 따뜻한 방이 두루 갖추어졌다.
이곳의 산에는 선조(先祖)의 무덤이 집을 둘러싸고 물은 담을 따라 세차게 흐르며 물과 나무는 향기를 머금고 마을은 빛을 더하여 지나가는 사람이 눈을 닦고 면목(面目)이 일신(一新)한 것을 보고 감탄(感歎)하면서 괴이(怪異)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손(後孫)들이 보낸 사람이 서울로 달려와 운계정(雲溪亭) 기문(記文)을 촉탁(囑託)하였다.
진해(鎭海)는 영남(嶺南)의 우도(右道)로 바다가 가깝고 서울에서 길이 멀어 사람들이 볼 일이 없으면 가지 않아 그 형세(形勢)가 어떤지 모른다. 그러니 무슨 말로 기문(記文)을 짓겠는가. 들을 짓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꼭 지으려면 옛 사람의 자취를 추상(追想)하여 쓰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시경(詩經)의 고반(考槃)⁴⁾과 형문(衡門)⁵⁾이 국풍(國風)에 기록(記錄)되어 있으니 대인군자(大人君子)가 과축(薖軸)⁶⁾이 있고 이 정자(亭子)에서 쉬고 놀 수 있고 굶주림을 즐길 수 있으니 어찌 은거하는 집을 시냇가에서 이루니 형문(衡門)이 비록 얕고 누추하나 놀고 쉴 수 있으며 샘물이 비록 배불릴 수 없으나 구경하고 즐거워하면서 굶주림을 잊을 수 있는데서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정자(亭子)는 군자가 거기에서 배회(徘徊)하고 취미를 취하여 세상을 잊은 것이니 이 또한 은거하는 집을 시냇가에서 이루고 형문(衡門)이 비록 얕고 누추하나 놀고 쉴 수 있으며 샘물이 비록 배불릴 수 없으나 구경하고 즐거워하면서 굶주림을 잊을 수 있을 따름이다.
정자(亭子)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니 어찌 강산(江山)의 풍경(風景) 도움뿐이겠는가. 하물며 어진 자손들이 그 부모(父母)의 뜻을 잘 이어가며 일을 잘 전술(傳述)함에 있어서랴! 집을 지어서 길이 전하여 귀(貴)히 여기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任務)로 하였으니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산수(山水)의 아름다움과 구름과 노을의 피어오름과 뽕나무와 삼이 들을 가리고 고기와 새가 사람과 친(親)하는 것 같은 것은 내려다보는 취미(趣味)이고 내가 매양 머리를 들고 남(南)쪽을 우러러 본지 여러 번이다.
감신(甲申;1944)년 3월 하순에 안동(安東) 김영한(金寗漢)은 기록하다.


【주석】
 30리쯤(一舍)¹⁾ : 일사(一舍)란 하룻밤을 묵는다는 뜻이다. 이는 옛 중국군대가 30리를 가고 하루를 마치므로 일사(一舍)는 30리를 의미한다. 당시 중국군대 30리는 우리 기준으로 50리에 해당한다.
상당(上黨)²⁾ : 청주에 있는 상당산(上黨山)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청주란 의미이다.
희로(希老)³⁾ : 한희로(韓希老)[1654~1727]는 벼슬이 참봉(參奉)으로 함양(咸陽)에서 진해현 이명리(耳明里)로 옮겨와 청주한씨의 가문을 열었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계원(啓元), 호는 운계(雲溪)이다. 별명은 한희술(韓希述)이다. 한수석(韓壽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모술(韓 모:莫+言 述)이며 아버지는 한응립(韓應立)이고, 어머니는 나주 진씨 판관(判官) 진상룡(陳尙龍)이며 부인은 경주 김씨 김영(金英)의 딸이다.
고반(考槃)⁴⁾ : 은거하는 집
형문(衡門)⁵⁾ : 두 개의 기둥에다 한 개의 횡목(橫木)을 질러 만든 허술한 대문. 곧 은자(隱者)가 사는 집.
과축(薖軸)⁶⁾ : 마음이 넉넉하여 한가로이 반환(盤桓)하는 것. [반환(盤桓)-뜻을 결정하지 못함]






雲溪亭韻 [해문] 文山
碧澗蒼崖無古今 푸른 산골짝 푸른 낭떠러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吾家亭子此登臨 우리 집안의 정자에 올랐구나.
當年杖屢逍遙地 올해는 지팡이 놓고 쉬며 거니는 곳에서
百年羹墻慕仰心 백년 갱장(羹墻)¹⁾이 그리워 우러러보는 마음이라.
水月猶寒新氣像 물속의 달은 이미 차가운 새로운 기상이니
春風如坐舊胷衿 봄바람에 옛 흉금 터놓고 같이 앉았네.
惟願後人能繼述 원하건대 후인은 능히 계술(繼述)²⁾하여
丁寧遺緖復相尋 정녕 선대 사업 회복하여 서로 찾으라.
宗孫炳贊謹稿 종손 병찬(炳贊) 삼가 적다.


【주석】
갱장(羹墻)¹⁾ : 갱장지모(羹墻之慕)를 뜻하며, 죽은 사람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이나 그를 앙모(仰慕)하여, 앉아서는 요 임금을 담장[墻]에서 보고, 밥을 먹을 때면 요 임금을 국[羹]에서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계술(繼述)²⁾ : 계지술사(繼志述事)로, 선왕(先王)이나 선조가 품은 뜻과 하던 일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9장에 “효도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고 부모의 일을 잘 전술하는 것이다.〔夫孝,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하였다.





一幅靈區感古今
當年吾祖此登臨
貽謨勿墜課書業
繼世相傳肯構心
簾外峯光低翠黛
門前溪曲潔靑襟
從知厚蔭由根固
園竹庭梧過十尋
九代孫炳純謹稿





次雲溪亭韻 운계정 차운-번역원
聞道雲亭刱自今 운계정을 이제 창건하였다는 말 들었으니
海山交處翼然臨 바다와 산이 교차하는 곳에 날아갈듯 임하였다네
可徵高士盤旋躅 고매한 선비 이곳에서 배회한 발자취 징험하겠고
永寓賢孫景慕心 현손들 경모하는 마음으로 길이 기탁하겠네
風月最宜供几案 바람과 달은 궤안에 바치기 가장 좋고
塵埃渾不染衣衾 속세의 먼지는 옷과 이불 더럽히지 않으리라
靈源物色尤增彩 영원(靈源)¹⁾의 경치는 더욱 광채를 더하였으리니
他日吾將一往尋 훗날 내 장차 한번 찾아가보리라
全州 李康瑄 稿 전주 이강선 기록하다.


【주석】

*영원(靈源)¹⁾ : 물의 근원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운계정이 있는 곳의 계곡을 가리킨다.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디지털창원문화대전-한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