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동면 태봉리 창원구씨 태강재 台崗齋

천부인권 2019. 12. 22. 07:45



2019.12.21.진동 태봉리 창원구씨 태강재(台崗齋)


합포구 진동면 태봉리 260-4번지에 위치한 창원구씨 태강재(台崗齋)는 차량으로 태봉마을을 향하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태봉고등학교 뒤쪽으로 지나는 태봉마을은 협곡처럼 합대천을 따라 형성된 좁은 땅에 의지한 작은 마을이다. 태강재(台崗齋)는 ㈜고구려의 옆에 붙어 있는데 도로에서는 조경용 나무로 인해 건물이 보이지 않아 정확히 위치를 모르면 찾기가 쉽지 않다.
태강재(台崗齋)는 대문채인 향일문(向日門)과 본채 태강재(台崗齋)로 구성 되었고 태강재(台崗齋)는 팔작지붕 와가(瓦家)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본채에는 주련과 벽진 이예중(李禮中)이 짓은 기문(記文)이 걸려 있다.




2019.12.21 태강재의 대문 향일문





향일문(向日門)은 ‘해로 향하는 문’ 또는 ‘해를 바라보는 문’으로 해석되며 한자로 향일규(向日葵)는 해바라기를 뜻한다.




태강재(台崗齋) 전경



태강재(台崗齋) 주련


[해문-김정현]
璧水淙淙走海 푸른 샘물은 졸졸 흘러 바다로 달리고
白雲靄靄留岡 흰 구름 아지랑이처럼 뭉쳐 산등성에 머물렀다
田園古桑梓蔚 전원은 옛부터 상재(桑梓)¹⁾가 무성했으니
齋舍新草花香 재사(齋舍)²⁾에는 새로운 풀과 꽃이 피어 향기롭다.


【주석】
상재(桑梓)¹⁾ : 뽕나무와 가래나무란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고향이나 고향의 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보통은 조상의 묘를 뜻한다.
재사(齋舍)²⁾ :  성균관이나 사학, 향교 등에서 유생들이 기숙사로 쓰던 건물을 뜻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상의 학문과 덕행을 기려 제사(祭祀)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실(齋室)을 말한다.




태강재(台崗齋) 편액




台崗齋記
古鎭海縣治之東 有長谷焉 其窮處有村曰東田 東田之後有山屹 然而分南北兩枝 其勢若走馬之奔謄 或如舞鶴之蹁躚而兩枝皆到 邑治而山焉 其中有一山 雅端秀屹若正人端士隱居于 塵埃之表 過在莫不稱美焉 其名曰台封山之陽 有村亦名台封 古通政其公嘗 自固城移居于 此者己將八九世矣 今其後孫豈鎭與 其族三柱來言于 余曰自吾通政先祖于 此者且將數百年于居矣 而子孫衰替 至 今無有聚族虔齋之所 今幸搆得數間之屋 敢請名其齋 余曰山與村皆名台封 則不必他求而謂之台崗齋如何 則又請記文 而示通政公墓文 余屢辭而其請 愈懇因閱其墓文 則公幼而學文勤 而有成而不求聞 達隱居于 屼台養有方年亨大耋 而好爵自廉 則宜其後孫之見昌 而浸而衰徵至于數百年之久 而今稍見昌大 則通政公餘祉 其將於是乎在也 歟然具氏不以 此自多而不忘 先祖遺澤益求 其修德求福之實 而以敎其子孫 則其或出台鼎之人 亦未可知矣 具氏其勉乎哉 是役在象出力尤多云
癸亥九月日 碧珍 李禮中記
           咸安 李鎭玉書


태강재기(台崗齋記)
옛 진해현의 동쪽에 깊숙한 골짜기가 있는데 그 마지막 궁벽한 곳에 마을이 있으니 가로되 동전(東田)이라. 이 동전(東田)마을 뒤편에 높은 산이 있어 남북으로 두 갈래가 나뉘어져서 그 산세가 마치 주마(走馬)가 날뛰듯이 달리는 것 같고 혹은 학이 너울너울 춤추듯 하여 두 줄기가 모두 진해관아까지 뻗어 내려왔다. 그중 한 줄기 산은 단아하게 높이 빼어나서 마치 올바른 사람과 단정한 선비가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서 은거하는 듯이 보이니 아름답다고 칭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산을 이름 하여 태봉산(台封山)이라 하고 산의 남쪽으로 마을이 있으니 이름도 또한 태봉(台封)이라 한다.
옛날 통정대부(通政大夫)공께서 일찍이 고성으로부터 이곳에 이거하니 벌써 8~9세가 지났다. 이제 그 후손인 기진(豈鎭)씨가 그 족인 삼주(三柱)씨와 더불어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옛날 우리 통정선조께서 이곳에서 살았고 그 이후로 그 자손들이 쇠미하여 이제까지 종족이 모여서 재계할 재숙지소(齋宿之所)가 없었는데 이번에 다행이 수칸집을 마련하여 그 재실의 이름을 나에게 청하기에 산과 마을의 이름이 다 같이 태봉이니 다른 이름이 필요하지 않고 태강재(台崗齋)라 칭하고 또 함께 통정공의 묘비문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기문을 부탁하기에 그 묘비문을 살펴본 즉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았다. 태봉에서 은거하면서 마음을 닦고 자적하게 세월을 보냈다. 장수를 누리면서 술을 즐기시고 스스로 청렴했는데 마땅히 그 자손들이 창성해지는 것을 볼 것인데 점점 쇠퇴하여짐이 수백년(數百年)에 이르렀다.
근세에 와서 차츰 창성해지는 것은 통정공의 여광이 오늘에 이런 것이니라. 그러나 구씨 여러분은 자손들을 힘써 잘 가르치면 혹은 삼정승 같은 인물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니 구씨들이여 힘쓸지어다. 본 재실의 역사에 재상(在象)씨께서 많은 힘을 보태었니라.
계해 9월 일에 벽진 이예중(李禮中) 짓고
                    함안 이진옥(李鎭玉) 쓰다.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