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8.5 창원의집 앞 안두철보사불망비
현재 ‘창원의집’ 앞 우측에는 지금의 창원의집을 있게 한 안두철(安斗喆)의 시혜비가 있다. 상남면민(上南面民)이 세운 작은 비에는 학생순흥안공두철보사불망비(學生順興安公斗喆補社不忘碑)라 새겼고 그 비의 우측에는 후손들이 1981년 6월에 새롭게 제작하여 세운 비가 있는데 퇴은안공두철보사불망비(退隱安公斗喆補社不忘碑)라는 제목을 달았다. 창원면민이 세운 작은 비석의 높이는 108cm, 너비 44cm, 두께 13cm이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안공(安公)이 사창을 운영하여 그 돈으로 학교를 지어 면민들의 자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이 때 학교를 짓는 일에 면민들을 동원하거나 부역이나 세금을 내지 않게 했으니 그 고마움을 전하는 마음으로 이 비가 세워지게 됐다.
이 비석의 비각기는 신기선(申箕善)이 지었고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금은 비각은 없고 비만 옮겨 두었다.
惠恤碑閣記
爲官而惠及於民 民立碑而頌之 固美也 而猶或有濫觴者焉 若爲士而功利施于一鄕 鄕人刻石而記之 則是世所罕有 而非賢而有才者 不能也 昌原距京師千里 濱海而爲邑 人視爲荒徼之地 而有奇人奇事之可紀者 囊社倉之新設也 退隱安君斗喆 爲郡南面之社首 慨然曰 國家之設是倉 將以安吾民也 吾掌是社 其職 豈止於出納社穀而已哉 以其餘力 當殖社財 以防徭役 建社塾而敎子弟 使倉廩實而知禮節 不亦善乎 於是 盡捐其餼料以謀之 未幾 社倉罷而君亦沒焉 君之胤子貞錫 痛先志之未就 仍其舊貫 添以私財 爲一面倡 一面士民 翕然應之 不數年而事集 凡防稅設塾 悉如退隱之志 民無捐瘠 而子弟皆嚮學焉 咸曰 吾輩之飮啄寢興 藏修游泳 爲太平民而興君子之俗者 繄誰之功 遂伐石而爲碑 又建閣而覆之 嗚乎 退隱固賢矣 貞錫甫之繼述堂構 又豈易得耶 身爲匹夫 而功施一鄕 使斯人父子者 得爲官而宰百里 其澤惠 詎可量耶 是碑也 不可與邑治五里亭林立而陣列者 同日論也 是不可以無記 退隱籍順興 晦軒文成公之後也
崇祿大夫議政府贊政陸軍副將 申箕善書
혜휼비각기(惠恤碑閣記)
관리가 고을을 다스려 그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면 백성들은 비석을 세워 그 덕을 노래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인데 그래도 혹은 넘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선비로서 그 공덕과 이로움이 한 고을에 펼쳐지면 고을 백성들이 돌을 깎아서 그 일을 기록하는데 이러한 일은 세상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어질지 않고 재능만 있다고 하더라도 능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창원은 서울에서 천리(千里)나 떨어진 바닷가의 고을로 사람들은 거칠고 황량한 땅이니 기이한 사람과 사건들이 더러 있어 기록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옛날 사창(社倉)을 새로 지을 때 퇴은(退隱) 안두철(安斗喆)군이 창원군 남면(南面)의 사창의 우두머리였다. 개탄하여 말하되 “국가에서 이 사창을 짓는 것은 장차 우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함이다. 내가 이 면의 사창을 담당하는데 그 직분이 어찌 사창의 곡물을 출납하는데 그치겠는가. 여력이 있으면 마땅히 사창의 재물을 불려서 부역을 대신하여 면에 학교를 지어 자제들을 교육하면 사창을 실속 있게 하면서도 백성들이 예절을 알게 하니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그 녹봉을 모두 내어 일을 도모하였으나 얼마 있지 않아 사창(社倉)이 폐지되고 안두철도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의 아들 정석(貞錫)이 선친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옛 일을 그대로 따르고 사재(私財)를 더하니 온 면이 칭송하고 온 면민들이 기쁘게 그에 응하니 몇 년이 되지 않아 일이 이루어졌다. 세금을 내지 않고도 학교를 지었으니 모두 퇴은(退隱)의 뜻대로 되었다. 백성들은 부역을 하지 않고 자제들은 모두 학교에 가게 되었다. 이에 모두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자고 일어나고 학문을 하고 돌아다니며 태평스런 백성으로 군자의 풍속을 흥기시키는 것이 모두 누구의 공이던가.”하였다. 드디어 돌을 깎아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지붕을 덮었다.
아아! 퇴은(退隱)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 정석(貞錫)이 그 뜻을 이어 학교를 짓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평범한 사람으로서 그 공덕을 온 고을에 펼쳤으니 이 사람 부자(父子)로 하여 관리가 되어 백리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일을 하였으니 그 혜택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 비석은 읍 동헌의 오리정 숲에 있는 여러 비석들과 더불어 같이 논할 수 없으니 이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퇴은(退隱)은 순흥(順興) 안씨로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의 후예이다.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육군부장(陸軍副將) 신기선(申箕善)¹⁾ 씀.
【주석】
신기선(申箕善)¹⁾ : 1851(철종 2)∼1909. 조선 말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언여(言汝), 호는 양원(陽園)·노봉(蘆峰). 희조(羲朝)의 아들이다. 1877년 대과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해 1878년 사간원정언, 1879년 홍문관부교리, 1881년 시강원문학 등을 지냈다. 1882년 통리기무아문주사를 거쳐, 다시 시강원문학이 되어 기무처(機務處)에 나가 수시로 영의정과 국정을 의논하였다. 관제개혁 때 통리내무아문참의가 되었다. 개화당 인물들과 밀접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 내각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1886년 전라도 여도(呂島)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풀려나 호조참판을 거쳐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의 공무대신이 되었다. 1895년 군부대신에 임명되면서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고, 중추원부의장을 거쳤다. 1896년 항일의병항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선유활동을 하였다. 학부대신이 된 뒤에 단발, 양복 착용, 국문과 태양력 사용, 청나라에 대한 조공폐지 등을 반대하다 독립협회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직하였다. 1897년 다시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1898년 법부대신이 되었을 때 나륙법(拏戮法)과 대역참형(大逆斬刑)을 복구하려다 다시 독립협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고발, 탄핵되어 면직되었다. 이듬 해 1899년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1904년 보안회 회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1905년 함경도관찰사, 1906년 홍문관학사, 1907년 장례원경(掌禮院卿)·수학원장(修學院長)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 민병석(閔丙奭)·이용직(李容稙) 등과 함께 유도(儒道)로써 체(體)를 삼고 신학문으로 용(用)을 삼아 신구사상(新舊思想)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학회(大東學會)를 창립, 회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양원집 陽園集≫ ≪유학경위 儒學經緯≫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창원 상남면민이 세운 보사불망비
출처 및 참조
창원군지-김종하/국제신보출판사(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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