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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는 산천재 입구의 입덕문 入德門

천부인권 2019. 10. 21. 07:00



2019.10.19. 시천면 사리 입덕문 각석


남명(南冥)이 신선이 되려고 합천 외토리의 뇌룡정(雷龍亭) 생활을 마치고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오면서 산천재에서 직선거리 2.42km 전방에 있던 바위에 ‘입덕문(入德門)’이라는 글을 새기고 소요 했다고 한다. 이후 이 위치에 지금의 ‘지리산대로’가 생기면서 바위문은 파괴되어 사라지고 그 위치 언저리에 후학들이 1960년에 보승계(保勝契)를 일으켜 ‘입덕문(入德門)’ 세자를 옮겨 두었다. 보승계(保勝契)는 수목(樹木), 토석(土石), 어족(魚族), 조수(鳥獸) 등 자연경치를 보전하는 한편 지리산 입구의 경승지 조성을 목표로 덕문정(德門亭)을 신축했는데 계원이 천명에 이른다.

이 ‘입덕문(入德門)’ 각자의 암괴는 원래의 바위문에서 떼어낸 것으로 1982년에 파괴된 바위 앞 도로변에 옮겼다가 2004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에  옮긴 것이다. 이곳의 위치는 「위도 35°16′10″N 경도 127°52′29″E」이며, 단성면 백운리 산 176번지이다. 

‘입덕문(入德門)’ 3자의 글씨를 쓴 주인공을 남명학연구원 홈페이지와 입덕문 옆에 세운 안내표지석에는 남명선생의 고제(高弟) 강구(陶丘) 이제신(李濟臣)이라 기록했으나 '분성배씨종친회'는 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1563~1632)의 글씨라 주장한다.





남명은 뇌룡정 생활을 마감하고 61세에 이곳 산청 지리산 자락에 와서 신라 때 최치원이 신선이 된 것처럼 신선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원리에 도착하니 인근에서 사람들이 와서 덕천서원을 지어 글을 가르쳐 달라고 했고 신선될 준비가 덜 되어서인지 선생이 되어 살아생전 자신의 묘(墓) 자리까지 정해버렸다. 남명의 묘는 남명기념관 뒷산으로 시천면 사리 산 72번지 임좌에 있다.

‘입덕문(入德門)’ 각자는 지리산이 덕(德)을 이룰 수 있는 곳이므로 이곳을 들어오면 덕(德)을 이룬다는 뜻도 되겠지만 남명 본인이 덕(德)을 이룬 사람으로 이 문을 지나면 덕(德)을 이룬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 된다.


남명학연구원 홈페이지 캡쳐



하진달(河鎭達)1778 - 1835  역헌문집(櫟軒文集) 中 入德門

兩山相對若開門線路緣崖可驅轅萬樹繁陰成翠蓋一川波浪自深源南冥夫子今如在北學諸生尙趁奔地得嘉名良有以裵公大筆至今存



위 문집은 눌암(訥庵)박지서(朴旨瑞,1754~1821) 공의 눌암선생문집(訥庵先生文集)의 도구대기(陶邱臺記)이다.


德川遷公題其巖曰入德門其後裵參知大維繼書而刻
덕천천 공(公)이 그 바위를 제(題)하여 입덕문(入德門)이라 하였는데, 그후 참지 배대유(參知 裵大維)가 계서(繼書)하여 그것을 새겼다. 이때의 공(公)은 이제신(李濟臣)을 말하는 것이다.


입덕문보승계안(入德門保勝契案) 발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入德門保勝契案跋-李煥奎
往昔山海夫子受黃梅山三峰之精氣而生擇三神山居其一 之方丈山下德山而居焉先生天稟之卓犖造詣之深廣豈眇 然後學之所可測哉嘗讀東史中華人天文學者見東方文星 之落而知先生之沒世庶幾於此可徵其先生之大者歟彼頭 流之高擬幾千萬仞而先生心思聊如斯笑當世宦路之人其 嶾嶙不可犯之儼然儀像剛直不可屈之卓乎志節人所難言 者夫後之人追念先生修契▼(宀/萬)慕者一二焉己有白雲洞契洗 心亭契今又入德門保勝契是也入德門是先生當日所命名而杖 屨所臨精采尙留京鄕人士往徠德山無不休憩斯門者奚取 山川形勝之美而爲一時愛賞而己也哉追慕先生德業之盛 而然也矣自世降俗未斧斤日侵周辺山川赭而帶羞有志者
爲是之懼去庚子四月河侃李柱範許周永金容孟曺龍煥朴 新鍾李漢龍李昊柱鄭萬根柳德文柳性烈金琪炫金德龍文 善用曺彧煥曺伯煥曺義生李斗基姜太守諸君發起是稧名 以入德門保勝契繼承入契者今至六百餘員惟願繼今而世 世無忘崇義續續相會干此講先生之遺風餘韻豈不幸歟入 德門鎖關如甁口天賜而只見一曲川流入二馬場則四圍峰 巒畵屛而列一大平野肥沃而廣山名智異夭所命名世云金 環落地非偶然而眞天府之別界先生之占庄取其愛也後人 之修稧於斯成也蓋人有始而鮮克終者惟李君斗基於是稧 始終如一將欲稧案付剞劂而廣布契員不侫忝在契未略誌 顚末所感如右云爾
歲庚申復陽日江陽李煥奎識


발(跋)-(역문)
지난 옛날 산해부자(山海夫子=曺南冥先生)가황매산(黃梅山) 삼봉(三峰)의 정기(精氣)를 받아 태어나시고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방장산(方丈山) 아래 덕산(德山)에 사셨다 선생의 천품(天稟)이 높으시고 조예(造詣)가 깊고 넓음을 어찌 후학지도(後學之徒)가 가히(可)헤아릴 수 있으리오 일즉 중화천문학자(中華天文學者)가 동방에 문성(文星)이 떠러짐을 보고 선생의 선화(仙化)하심을 알았다는 동사(東史)를 읽었는데 이것으로 선생의 크심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도다.  저 두류산(頭流山)의 높이가 몇 천만(千萬)길인지 몰라도 선생의 심사(心思) 이와 같으며 당세(當世)의 벼슬아치를 가볍게 보고 태산(泰山)과같이 범(犯)할 수없는 근엄한 의상(儀像)과 굳세고 곧아 가히 꺼꾸러뜨리지 못하는 지조(志操)와 절개(節介)는 범상(凡常)한 사람으로서는 말  하기 어렵도다 뒷사람 이 선생을 추념(追念)하여 계(契)를 닦고 추모(追慕)의 뜻을 붙이는 이가 한둘이 아니니 이미 백운동계(白雲洞契)와 세심정계(洗心亭契)가 있었고 지금(只今) 입덕문보승계(入德門保勝契)가 이것이다 입덕문(入德門)은 선생이 옛날 이름을 명하시고 작지 짚고 오셔서 즐기신 정기(精氣)와 채색(采色)이 머무른 곳이요 경향각지(京鄕各地)의 인사(人士)가 덕산(德山)을 왕래(往來)하면서 이 문에 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어찌 산천경치(山川景致)의 아름다움에 잠간보고 즐기기만 하였겠는가. 이는 선생의 덕업(德業)이 융성(隆盛)함을 추모(追慕)함이니라 세상(世上)과 풍속(風俗)이 바뀌고 벌목(伐木)꾼이 날로 침범(侵犯)하여 주변산천(周辺山川)벌겋게 부끄럼을 띠고 있는지라 유지자(有志者) 이것을 두렵게 역어 경자년사월(庚子年四月)에 하간 이주범 조욱환 강태수등 제군(河侃李柱範曺彧煥姜太守等 諸君)이 발기(發起)하여 계명(契名)을 입덕문보승계(入德門保勝契)라 칭하고 입계자(入契者)가 육백여원(六百餘員)이나 된다하니 오직 바라건데 금후세세(今後世世) 이어받아 높은 뜻을 잊지 말고 자주자주 서로 모여 선생의 유풍여운(遺風餘韻)을 강론(講論)함이 어찌 다행(多幸)한일이 아닐까 입덕문은 관(關)이 막힌 것이 병구(甁口)와 같고 한줄기 청류( 淸流)를 따라 이마장(二馬場)들어 가면 사방(四方)에 둘러싸인 산봉우리가 그림 병풍(屛風)처럼 서있고 큰 들이 넓고 기름져서 산명(山名)을 지이(智異)라 함은 하늘이 명(命)함이요 세상에 일컷는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별계(別界)가 과연(果然) 여기가 아닐까. 선생이 터를 잡고 사랑함이 우연(偶然)한일이 아닌 듯하다. 뒷사람이 계를 닦는 것이 이로 인(因)해 이루어진 것이다 대개 처음은 있어도 마침이 적다하였는데 오직 이군두기(李君斗基)가 이 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듬어 장차계안(將次契案)을 인출(印出)하여 널리 계원(契員)에게 편다하는데 불녕계말(不侫契末)에 참여(參與)하여 그 顚末(顚末)을 간략(簡略)히 느낀 바를 적는 바이다.
경신(庚申) 11월 일 강양(江陽) 이환규(李煥奎)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