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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면 다구리 나주 임윤홍 효자각 孝子閣

천부인권 2019. 12. 23. 17:33

 

2019.7.5. 진동면 다구리 나주임씨 효자각

 

합포구 진동면 다구리 370-2번지는 나주임씨 효자 임윤홍(林潤弘)을 기리는 효자각(孝子閣)이 있다. 효자각 내부에는 비석은 없고 『효자조봉대부나주임윤홍창선각(孝子朝奉大夫羅州林潤弘彰善閣)』이라 적은 편액이 걸렸으며, 편액 말미에 ‘공부자탄강삼천사백칠월일(孔夫子誕降三千四百七月日)’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919년에 세운 것이다. 또한 송호곤(宋鎬坤)이 쓴 『효자증조봉대부임공정려각상량문(孝子贈朝奉大夫林公旌閭閣上梁文)』, 파산 조병규(趙昺奎)가 쓴 『효자각기(孝子閣記)』, 김기종(金驥鍾)이 쓴 『효자조봉대부나주임공정려서(孝子朝奉大夫羅州林公旌閭序)』의 편액이 걸려있다. 그리고 유림향약본소(儒林鄕約本所)에서 내린 『효자각 포창완의문(孝子閣 褒彰完議文)』 등이 전해지고 있다.

 

 

효자 임윤홍 효자각

 

효자각 편액

 

 

효자조봉대부나주임윤홍창선각(孝子朝奉大夫羅州林潤弘彰善閣)

孔夫子誕降三千四百七十年七月日

 

 

孝子贈朝奉大夫林公旌閭閣上梁文
孝爲百行之源 天之經地之義 善有先王以勸爵以賞門以旌 棟宇聳觀 山川增貫 恭惟孝子贈朝奉大夫林公 世貫羅州而遙遠 家名麗氏之侍從 奉順靖忠罔爲我朝臣僕 泮生高義救伸己卯儒賢 薪火相傳血脈流通於子子孫孫 箕裘善述行治敦篤乎親親長長 曰若家貧奉老屢空菽水 卽於年少服勤自致漁樵 竭力耕田子職恭爲己 至誠得果天心可見於斯 定省凊溫自合範儀吾必謂之學矣 病喪憂戚感諸聞見人皆悅曰知而 黔婁禱辰果見求代有應 偉元枯樹可知悲號所著 儒林齊發公論呈縣道達禮曹 聖朝特加褒嘉樹風聲勵民紀 烏頭飛革 燕語賀成 抛梁東 物生於東 曰父母德 與天地同 抛梁南 星有弧南 回此瑞彩 慰彼肖男 抛梁西 落照于西 春暉難繫 孝思凄凄 抛梁北 倚彼斗北 貤恩莫酬 是誰家域 抛梁上 如在其上 後人不忘 載瞻載望 抛梁下 克昌于下 順是還生 有弓有冶 伏願上梁之後 地效奇靈 民興至德 宜爾自天申也福祿禎祥將生下無期 夫孰非人子歟東西南北之行過必式
乙丑重陽德恩宋鎬坤謹識

 

효자증조봉대부임공정려각상량문 孝子贈朝奉大夫林公旌閭閣上梁文
효(孝)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기에 하늘의 벼리고 땅에서는 의리다. 선왕이 착한 것을 권하여 작위를 주고 그 가문에 정려를 상으로 내리니 재실이 우뚝하게 솟아 아름답고 산천이 그 빛을 더하였다. 생각건대 효자(孝子) 증조봉대부(贈朝奉大夫) 임공(林公)의 관향은 나주로 아득히 먼 명문가인데 고려 시종(侍從)에서 비롯되었다. 가만히 충성으로 섬기며 따르다가 우리 조선의 신하가 되었다. 반생(泮生)의 높은 의리로 기묘(己卯)년의 어진 유학자들을 구제하였다. 불이 서로 옮겨 붙듯이 혈맥이 흘러 자자손손에 통하니 조상의 가업을 잘 이어 계승하여 덕행이 돈독하며 친척은 친하게 어른은 어른으로 대접하였다. 만약 집이 가난하여 노인을 봉양하는데 자주 죽도 거른다면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힘을 다하여 고기잡고 나무를 하였으며 온힘을 다하여 농사를 짓고 자식의 직분으로 공경을 다하였다. 지극한 정성이 하늘에 닿아 이러한 이적을 보였고 혼정신성하며 맑고 따뜻한 것을 법도에 맞게 하는 것이 반드시 배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병이나 초상이나 친척의 장례에도 보고 들은 자들이 모두 감동할 정도여서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아는 자로다 하였다. 제나라 검루(黔婁)처럼 북두성에 빌어 대신 병들 것을 구하여 그에 응함을 보았고 자(字)가 위원(偉元)인 왕부(王裒)가 애통하게 울어 나무가 말랐으니 비통한 울음에 하늘의 감응이 드러남을 알겠다. 유림에서 일제히 공의를 발휘하여 현과 군에 알리고 예조(禮曹)에 전달하였다. 임금께서 특별히 포상하시어 그 명성이 높아 백성들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정려문이 날개를 펼친 듯 서니 축하의 말로 정려각이 이루어지는 것을 돕는다.
들보 동으로 던져라 모든 생물은 동에서 생겨나니 말하기를 부모의 공덕이 천지의 공덕과 동일하다 하네
들보 남으로 던져라 별들이 남쪽으로 둘렀으니 상스러운 빛들이 이를 감싸니 저 효성스런 자손을 위로하는 것이리라
들보 서편으로 던져라. 서산에 해가 지니 봄기운이 이어지기 어려워라 효자는 가을 서리가 내리니 조상을 생각하며 서러워한다.
들보 북으로 던져라. 저 북두성을 보듯이 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지만 이러한 것이 누구의 집안 영역인가.
들보 위로 던져라. 항상 위에 계신 듯하니, 후손들이 언제나 잊지 않고, 우러러 보고 그리워 하노라.
들보 아래로 던져라. 후손에 이르러 창대하게 되었으니 조상의 뜻을 따르니 이렇게 다시 생겨난 것이리라. 대대로 계승하고 또 물려주도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 올린 뒤에 땅은 신이한 영령에 바치고 백성은 지극한 덕을 일으켜 마땅히 하늘에서 펼쳐진 복록과 상스러움이 후대에 생겨나는 일이 기다리지 않아도 곧 되게 하소서.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동서남북에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모범으로 삼아 본받을 것이다.
을축(乙丑) 중양절(重陽節) 덕은(德恩) 송호곤(宋鎬坤) 삼가 쓰다.

 

 

 

 


孝子閣記
古牛山治之東南十許里 有多求村林氏世居焉 孝友爲家法至諱潤弘 幼而知愛親無違拂之事 及長 貧無以養不能專力於學問乃以明農 爲業藜莧不充 而親極滋味每遇美味必懷 而獻之出見異事必 歸 而誦之蓋忠養 而悅其志也 其母病㞃斮指 而回蘇父病積月口苦覓梨時 則山林隕蘀且市遠難求 彷徨號哭 則忽有數顆碩梨供之得效居 前後喪喪 致哀祭致誠逐日展墓當膝處草 爲之枯縣人具 其孝行齊籲營邑 高宗己卯有朝奉大夫之命載 邑志年六十五而卒士友 嗟惜之嗚呼 以若實行實蹟宜有旌其閭樹之風 而世變矣闡揚無路 自鄕有豎碑彰善之議 此亦爲爲世道勸也 公之孫佑澤齎行錄 而來謁余以命名 而且記之 余敬爲之復曰 孝子不匱永錫爾類 自求多福詩人贊頌之詞也 請名之 曰多求孝子碑閣 蓋因地名 而亦取錫類多福之義也 遂書此爲記云
丙寅仲〇進士巴山趙昺奎謹記

 

 

 

 

 

孝子朝奉大夫羅州林公旌閭序
夫孝者天地之性而人之所


丙寅鞠月下澣
前成均館博士光山金驥鍾 謹序

 

 

 

 

 

孝子閣 褒彰完議文
本所建孔夫子廟 刊五倫行實 以爲尊聖裝善 而列郡單子繼續來到中謹安 慶南有司及儒林薦狀 則本道昌原郡鎭東面多求里 孝行林潤弘 官贈朝奉大夫系出羅州 贈禮曹參判號歸來亭 諱鵬之十三世孫 學生諱炳成之子也 生有根千之性 自在齠齡能知事親之道 定省之尊進供三物 無不殫竭及長以孝配孝與 其妻金氏相戒協誠志體奉養隨時無 歲之辛亥玆病危谹侍湯雖百方 無靈漸朮難尤斷指灌血 幸得廻甦壽延四年 又在癸丑父有老病 日事刀圭小無 差道祝天禱地 亦歸無何 其妻金氏斷 其右指出血注口甦延三日 而竟遭屬纊夫妻哀毁瘠立 葬哭泣克遵 家禮少無遺憾遂日 省掃不怕 寒暑侍殯三載 行素心墨服關 當忌必齊誠 祭哀慕如在之靈 嗚乎世之多孝者著 歷史多而鮮見 其雙孝之有傍也 其胄孫正澤繼述世德 孝思攸深齎營 邑文?泣血來呈於 是儒論疏 輿情周聲及於 本所聞而有感 將以付鋟 登梓使之立碑建閣 以爲褒彰而壽傳芳 名於百世廣 風化於八域 以永存無窮之意 成完議文事
孔夫子誕降 千四百七十年七月日

儒林鄕約本所

 

효자각 포창완의문(孝子閣 褒彰完議文)
본소(유림향약본소)에서 공부자(孔夫子) 묘를 세우고 오륜행실을 발간하는 목적은 성인을 본받고 착한 것을 권장하기 위함인데 여러 군(郡)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오고 경남 유사와 유림의 추천장에 의하면 본도(本道) 창원군 진동면 다구리(多求里)에 임윤홍(林潤弘)이라는 효자가 있는데 관은 증 조봉대부(朝奉大夫)요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증예조참판으로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며 휘 붕(鵬)의 13세손이고 학생 휘 병성(炳成)의 아들이다. 타고난 근본 천성이 어릴 때부터 효도를 알아 예의에 어긋남이 없고 부모를 모시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장성하여 결혼했는데 그의 처 또한 효부라 그의 처 김씨와 함께 끼니때마다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그러나 1911년 그의 어머니 병이 위급하자 백방으로 다니며 약을 구해 드렸으나 효험이 없고 점점 더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려 4년을 더 연명케 했고 1923년 아버지가 노환이 들어 매일 약을 다려드렸으나 조금도 차도가 없어 하늘에 빌고 땅에 기원해도 안 되자 그의 처 김씨가 오른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넣어 주어 3일을 더 연명하다가 돌아가시자 부부가 통곡하여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예를 다하여 장례를 모신 후 추우나 더우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일 성묘하였고 빈소를 모신 3년 동안 육식도 멀리하고 단장도 하지 않았다. 또 상복을 벗고 제사 때는 반드시 목욕재개하고 혼령이 계신 듯이 정성을 다하였다.
슬프다! 세상에 효도하는 사람이 역사에 많으나 이집의 쌍효자 같은 경우는 보기 드물다.
그 종손 정택(正澤)이 가문의 이어오는 덕을 본받아 효를 중시하는 마음이 깊어 관과 읍의 축문을 싸가지고 와서 울면서 올리고 유림에서도 추천하고 또 여론도 높아 본소에서 보니 타탕한지라 앞으로 드높게 비를 세워 오랫동안 기리기 위해 완의문(完議文)을 만드는 바이다.
공부자탄강 천사백칠십년칠월일(1919년 7월 일)
유림향약본소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