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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이명리 한경유 기리는 효자한공기실비 孝子韓公紀實碑

천부인권 2019. 12. 3. 06:00



2019.10.30 진전면 이명리 효자한공기실비(孝子韓公紀實碑)


진전면 이명리 626-1번지에는 청주한씨 문경공(文敬公) 한경유(韓敬維)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한공기실비(孝子韓公紀實碑)가 있다. 불과 20m 뒤에는 청주한씨 이명리 입향조 한희로(韓希老)를 기리는 운계정(雲溪亭)이 있다.
아버지 덕문(德文)이 병에 걸려 24년이나 되었지만 효성이 지극하여 냇가에 아버지께 드릴 물고기를 잡아 두었는데 이 물고기를 왜가리가 훔쳐가다 그가 호소하자 다시 물고기를 돌려주고, 겨울에 잉어가 얼음 위로 뛰어 오르는 이적을 행한 인물이다.
문경공(文敬公)의 효행을 그의 후손들이 1928년 무진(戊辰)에 마을 입구에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황병관(黃炳瓘)이 기록했다.





孝子韓公紀實碑
雀入于幕鯉躍于氷 在昔賢孝子之至誠攸感也 是以紫陽夫子編之于小學歷 千百載無異辭焉 吾嶺之南 牛山縣理明里 有韓孝子諱敬維字士行 淸州人 文敬公柳巷諱脩之后 其考曰德文 偶嬰奇病積廾四載矣 公無兄弟家甚貧窶 賦性至孝 惋愉承順養志致樂治 畬採薪甘旨不匱侍病 迎醫合樂必身親爲之煎湯進飮亦 不以人代 時當極炎饌鮮易致色敗欲作乾進曝置于 架鴟烏掠取飛空而去感其泣懇 還墮再三又至 祈寒思食水澤之味 剖氷而叩魚自出躍異哉孝也 果感於誠矣 此鴟之墮魚之躍頗類乎 雀鯉之感應矣 公生後晦翁雖未及列於小學 而鄕道多士呈于 棠營啓于 春曺載于 縣誌雖未蒙 天褒亦足 爲公案豈 烏頭赤脚之榮所能易也 哉公之孫 祥棋氏抱家狀 及籲狀與縣誌 而流涕告余曰吾己耋矣 及今未就土之前 不能闡明 徽蹟則恐 遂湮沒將樹石于 道周俾百世之後 知有吾祖焉 余固知子 不輕與人 文字以子 爲吾舘甥也 夙稔吾祖實行 故敢藉以 爲請柄瓘屢辭不獲 子夏曰事 父母能竭 其力雖不學吾必謂之學 其斯之謂歟繼之 以銘銘曰
猗公誠孝 天性之能 鴟墮于空 魚躍于氷 積湍四載 不怠如一 雖業耕樵學之謂必棠軒春曺多士凸足石乎 在玆我銘不泐
歲戊辰二之日 下澣 鄕後生檜山黃柄瓘識


효자한공기실비(孝子韓公紀實碑)
참새가 장막으로 날아 들어오고 잉어가 얼음 속에서 뛰어나온 것¹⁾은 옛적의 어진 효자의 지성에 감동한 까닭이다. 이것을 자양부자(紫陽夫子)²⁾는 소학에다 엮은지 유구한 세월이 되었음에도 이단이 없는 것이다.
우리 영남의 우산현 이명리에 한효자(韓孝子)가 있었는데 휘(諱)는 경유(敬維)이고, 자(字)는 사행(士行)이며 청주인(淸州人)이다. 시(諡)는 문경공(文敬公)이고 호(號)는 류항(柳巷)이며, 휘(諱) 수(脩)³⁾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덕문(德文)이라 하는데 우연히 괴이한 병에 걸린 지 24년이나 되었다.
공(경유)은 형제도 없고 집안은 몹시 곤궁하였지만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늘 흐뭇한 마음으로 명령을 잘 받들어 따르며 뜻에 잘 맞추어 즐겁게 해드리고 따비밭을 일구며 땔나무를 하여 생활하면서도 어버이가 맛나게 드시는 음식은 끊어지지 않았으며 병환이 계실 때에는 의원을 맞아들이는 일과 약 짓는 일은 반드시 몸소 친히 하였으며 약을 다려드리는 일도 역시 다른 이를 대리로 시키지 않았다.
때 마침 혹서에 반찬과 생선이 부패하기 쉬운 계절을 당하여 물고기를 말려서 드리고자하여 시렁에 얹어 볕을 쬐는데 수리와 까마귀들이 채어 공중으로 날아가다 그의 울음이 간절함에 감동되어 물어가던 것을 되돌아와 떨어뜨렸는데 이와 같은 일이 두 세 번이 아니었다.
또 혹한이 되었을 때 생선을 잡숫고 싶다하여 얼음을 깨고 정성을 드리니 물고기가 스스로 뛰쳐나왔다. 신기 하도다! 과연 효도에 감동된 것이다.
수리가 물고 가던 생선을 되돌아와 떨어뜨린 일이나 잉어가 스스로 뛰쳐나온 일은 자못 참새가 그물에 들어오고 고기가 얼음에서 뛰쳐나온 감응과 유사하구나. 공이 주부자(朱夫子)보다 늦게 태어나서 비록 소학에 올리는 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도(道 )와 향당(鄕黨)의 유림 여러 선비들이 감영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예조에 보고되어서 군지(郡誌)에 등재 되었으니 비록 주상(主上)이 내리는 은전(恩典)은 입지 못했지만 관공서(官公署)의 문서에 기록 되었으니 어찌 오두적각(烏頭赤脚)⁴⁾의 영화와 바꾸리오.
공의 손자 상기(祥棋)씨가 가장(家狀)⁵⁾과 유장(儒狀)⁶⁾과 현지를 안고 와서 나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나이 이미 70인데 지금 취토지전(就土之前)⁷⁾에 아름다운 행적을 밝게 드러내지 않으면 끝내는 인멸될까봐 두려워 장차 큰길가에 비석을 세워 백세의 뒤에라도 나의 할아버지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이네. 나는 본디부터 자네의 인격과 지식이 가볍지 않음을 알아 자네를 내 사위로 삼았기에 일찍이 내 조부의 행적을 익히 알 것이므로 감히 청하는 것일세. 하기에 병관(柄瓘: 자신을 말함)이 여러 번 사양했으나 되지 않았다.
자하(子夏)⁸⁾의 말에 부모를 섬김에 그 힘을 다하였다면 비록 배우지 아니했어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할 것이다 했으니 그것은 이분 같은 경우를 말함인 것이다. 계속하여 명(銘)⁹⁾하노니
아아! 공이 부모를 섬긴 정성은 하늘이 내린 성품(性稟)으로 수리가 채갔던 고기를 되돌아와 떨어뜨리고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쳐나오게 했구나.
아버지의 병환(病患)에 간호(看護)하기를 24년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도다.
비록 밭 갈고 나무하는 업이었지만 나는 반드시 학문(學文)을 하였다고 하겠다.
감영(監營)에 장계(狀啓)하고 예조(禮曹)에서 군지(郡誌)에 실었고 많은 사림들이 청원하였도다.
비석(碑石)에 공의 실기(實記)를 기록하였으니 나의 명(銘)도 영원(永遠)하리라.
무진(1928) 2월 하순에
고향의 후생 회산 황병관(黃柄瓘)은 짓다.


【주석】
참새가 장막으로 날아 들어오고 잉어가 얼음 속에서 뛰어나온 것¹⁾ : “雀入于幕鯉躍于氷”은 중국 진(晋)나라의 효자 왕상에 나오는 고사. 왕상의 계모가 겨울에 참새구이가 먹고 싶다 했을 때에 참새가 방으로 날아들고 겨울에 잉어를 찾을 때는 잉어가 뛰쳐나왔다고 함.
자양부자(紫陽夫子)²⁾ : 주희(朱熹)를 이르는 말.
수(脩)³⁾ : 한수(韓脩)는 고려 충정왕(忠正王) 때의 명필가. 자(字)는 맹운(孟雲), 호(號)는 류암(柳菴),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오두적각(烏頭赤脚)⁴⁾ : 검은 머리에 붉은 다리 즉 효자, 충신, 열녀들이 살던 마을 앞에 세워주는 정문(旌門).
가장(家狀)⁵⁾ : 가승(家乘)과 행장(行狀)
유장(儒狀)⁶⁾ : 유생들이 내는 진정서
취토지전(就土之前)⁷⁾ : 흙속에 들어가기 전(죽기 전)
자하(子夏)⁸⁾ : 공자의 제자로 학문에 능했음.
명(銘)⁹⁾ : 공덕을 기리는 말이나 경계의 글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