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구산면 욱곡리 인동장씨 영사재 永思齋

천부인권 2020. 2. 18. 07:33



2020.2.2. 구산면 욱곡마을 인동장씨 영사재(永思齋) 전경


구산면 내포리 1099(욱곡2길 6-33)에는 인동장씨의 재실일 영사재(永思齋)가 위치한 곳이다. 우리 지역의 사람들에게 욱곡마을 방파제는 생활낚시 장소로 제법 알려진 곳이다. 보통은 마을을 방문 하는 경우는 적고 방파제 근처에서 놀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재실이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인동장씨 영사재(永思齋)도 그런 곳 중 하나이다. 이번에도 목적을 재실 탐방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났을 것이다.
규모가 큰 대문에는 공경함이 머문다는 뜻을 담은 ‘경지문敬止門’이라 편액 했고 본당에는 영원토록 생각한다는 뜻을 담은 ‘영사재永思齋’라 편액 했다. 아래에는 기문과 상량문을 옮겼다.




2020.2.2 대문체 경지문敬止門



경지문敬止門 편액



욱곡마을 인동장씨 영사재永思齋



영사재永思齋 편액



영사재永思齋 주련





永思齋記
舊檜山之龜山面 西南數里許有坊曰 旭谷巨山屛於後 大海帶於前 泉淸土沃 可隱而耕讀 卽仁同張氏歲庄也 先世封塋 壘壘於左右 岡巒而翬飛新齋 聳出於村畔者其墳庵也 九世後孫炳洪 與其族弟烘列 抱家乘訪 余而語曰 吾家之宅于 龜山者已爲三百年之久 而尙無祼薦齋宿迎賓之所 實由子孫之不 振爲恨如何 去年丁卯宗會之席 宿議齊發始見 衆口歸一乃 醵歛成金相地于 村畔爽塏處而鳩材招工 旦一年戊辰春功告訖 正堂三架四楹 左右室中爲堂 門亦三間左室右庫 制不甚寬 可能容膝 今欲乞子之文 以爲楣記兼問齋 與門名願惠之也 余辭不容乃按 張氏高麗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諱金用 爲上祖自後世襲簪纓 爲東方著族 十二傳諱安世號松隱諡忠貞 麗亡守罔僕義亨玉溪書院 入李朝諱脩司憲府掌令繕工判事 十二傳諱錫武 號岡石始其于 此公工曹參判諱乃範 號克明堂之五世孫 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諱慶遇號晩晦堂 晋州鎭營將諱楚水軍 虞侯諱宇寬 通德郎諱暐高 曾祖若考也 公生長於忠孝之家承襲乎 詩禮之訓嘉行 懿德必多 可傳者而流離客鄕 屢經滄桑 文獻無徵 此後孫之所 茹恨者也 余擧其實而書之如右名 其齋曰永思 門曰敬蓋 取永言孝思必恭敬止之義也 顧今世道板蕩倫常 掃地而獨 張氏宗員 出篤誠於 不裕之中 能遂累世 未遑之業 可欽可賀也 然諸公無爲 以此能事畢居斯齋也 顧名思義聿修厥德 則先靈必黙 佑慶福於無窮也 可不勉旃哉
戊辰 雨水節 咸安 趙光濟 記


영사재기永思齋記
옛 회산檜山고을 구산면 서남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욱곡旭谷이라 했으니 뒤편으로 큰 산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있고 앞쪽으로는 큰 바다가 펼쳐졌는데 샘이 밝고 땅이 비옥하여 가히 숨어 지내면서 밭을 갈고 독서할 수 있는 곳이니 이 곳인즉 인동장씨가 대대로 농사짓고 사는 곳이다.
선조의 산소가 좌우 언덕과 산에 총총히 안치 되어 있고 나래치 듯 새로 지은 재실이 마을 언덕에 자리 잡았으니 그곳이 장씨들의 재실이다.
9대손 병홍炳洪이 그 집안 동생 홍렬烘列과 더불어 족보(家乘)을 안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구산에 자리 잡고 살아 온지가 이미 300여년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까지 재계하고 묵고 제사 모시고 손님 맞을 장소가 없기에 실로 자손들의 부진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탄하였다. 지난해 정묘丁卯년에 종친회의 석상에서 이 문제를 함께 의논했던 바 처음부터 모인 사람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일치되어 곧 성금을 거두고 마을 언덕의 맑고 상쾌한 곳을 택하여 재목을 구하고 장인을 초빙하여 단 1년이 지난 무진戊辰년 봄에 공사를 마치니 본채는 3칸으로 좌우에는 실室이요 가운데는 당堂이며 문간 역시 3칸으로 좌측에는 실室이요 우측에는 창고로 지어졌다.
규모는 크게 넉넉지 못해도 가히 무릎을 펼 만 하더라. 지금 그대들이 문주방위의 기문과 재실의 이름 및 문명을 정하고자 은혜로운 글을 내게 부탁하여 사양했더니 다시 청하여 그 간곡한 마음을 뿌리치지 못하여 장씨 문중을 살펴보았더니 고려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의 이름 금용으로부터 후세에 벼슬을 물려받아 동방의 저족著族이 됐다. 12대에 전하여 이름이 안세安世요 호號는 송은松隱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인데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아 옥계서원玉溪書院에 향사하고 있다.
이조에 들어와 이름 수脩는 사헌부장령선공판사司憲府掌令繕工判事인데 12대에 전한이가 이름이 석무錫武이고 호號는 강석岡石으로 그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분이 공조참판이라는 벼슬을 지냈고 내범乃範이라는 분은 호를 극명당克明堂으로 쓰셨고 석무의 5대손으로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벼슬을 지냈으며 이름이 경우慶遇는 호가 만회당晩晦堂이고 진주진영장晋州鎭營將을 지냈으며 이름이 초楚는 수군으로 우후虞侯이고 이름은 우관宇寬이요 또한 통덕랑의 이름은 위고暐高이며 증조이시다.
공은 태어나 자라면서 충효의 가풍과 시와 예절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아름다운 행동과 덕을 많이 쌓아 칭송이 전해 내려오는 사람이었는데 타향살이를 하면서 세파의 어려움을 여러 번 겪다보니 문헌들을 잃어 증명할 수 없어서 후손들은 한이 많았다.
내 그 사실을 들어 위와 같이 글을 쓰고 그 제실의 이름을 영사永思라 하고 문의 이름을 경개敬蓋라 했으니 이는 오랫동안 효도를 생각하며 반드시 공경을 받는 후손들이 되라는 뜻으로 지었노라.
지금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윤리와 오상이 무너지는데 특히 장씨 문중은 여유롭지 못한 형편임에도 두터운 정성으로 대대로 이루지 못했던 일을 훌륭히 마쳤으니 가히 그 뜻을 공경하고 축하하노라.
그러나 그대들이 이 일을 마쳤다고 방심치 말고 이 재실에 거쳐하면서 웃대의 덕을 기리고 조상의 얼을 오랫동안 사모하며 생각하는 후손일진데 조상들의 영영은 후손들을 묵묵히 도와 경사스러운 복이 무궁하리니 가히 힘쓰지 아니할 손가.
무진 우수절 함안 조광제 씀





永思齋上樑文
人有秉彛之衷心 而必致羹墻不廢 地有淳尨之未開 而必遇賢士得闡 孝莫加於恭先 而實有表蹟 事莫美於開後 而當有敎斅 詩云孝思惟則 傳曰 謀事爲忠 孰不無心莫能如 此嗚呼公相 此地迺奠迺居盩居之物皆被其化 樵牧之竪亦蒙其德 耕於雲釣於月 張翁之閑 情獨樂風乎雩浴乎沂 曾賢之詠歸自取 不求聞達而林泉之間 朝而徃暮而歸 渾得深趣 而詩書之中 尋其朋得 其友嘉謨刑于 一家而當時之人 恒誦其規 芳名流於百世 而後來之士 咸稱其德所以迨 其未陰而綴彼桑土 定之方中而作于 椘室杗樑槯桶 咸稸其材而不違規矩之事 門窓戶扄 皆得其所 而只合開闔之便 輪焉奐焉高出達山之下 翼斯飛斯俯臨南川之上 玆所以上棟下宇 條理乃成於是乎 三百餘年道德 更明因誦斯千之詩 乃唱兒郞之偉抛樑東 夫桑朝日上欄紅 雲仍十室齋其力 花樹春風滿 此中抛樑西 樹影叅差日影低 睱日耕雲 榰杖立聲聲布穀溢長堤 抛樑南 旭谷山水碧如藍醉 來烟景登 欄曲絃誦 華筵益者二 抛樑北 書童頭揷淵明菊 竟日徘徊大有歌 油油禾黍滿平陸 抛樑上 智水仁山 皆勝壯悵仰先生歸去後 書箱夜夜照文昌 抛樑下 出出奇才支大廈章甫 峩冠相迎送 門前大道通車馬
伏願上樑之後 來耳雲仍咸受福膚敏之士 濟濟迺盛爲世師表 爲國柱石 於千萬歲 永遠勿替
戊辰春三下浣
星州 李炳孝 撰


영사재상량문
사람은 천부적天賦的인 항심恒心이 있어 반드시 갱장羹墻¹⁾을 이루어 료療하지 않으며 땅은 태고太古 때의 미개지未開地가 있어 반드시 현사賢士를 만나야 드러나게 된다. 효孝는 공선恭先하는 것보다 더할 수 없으니 실로 표적表蹟이 있으며 일은 후에 온 사람을 계도啓導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으니 마땅히 가르쳐야 하느니라. 시경詩經²⁾에 이르기를 효사孝思는 오직 법칙法則이라 하였고 서경書經³⁾에 전하기로 모사謀事에는 충忠이 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누가 이러한 마음이 없으리오 마는 공公과 같이 능할 이 없느니라. 슬프고 장壯하도다 공公이 이 땅을 살펴 전거奠居 하시니 산천초목도 모두 덕화德化를 입었고 초목동樵牧童⁴⁾들도 또한 그 사혜思惠를 입었도다. 구름 밭 갈고 달밤에 낚시질 함은 장옹張翁의 한가한 정情을 독락獨樂 함이요 우雩에 풍욕風浴하고 기沂에 목욕沐浴 함은 증현曾賢⁵⁾의 노래하고 돌아감을 자취自取함 이로다. 드러내고 등용登用됨을 싫어하여 임천林泉⁶⁾에 숨어서 아침에 밭갈이 가고 저물제 돌아와서 혼연渾然히 깊은 뜻을 얻어 시서중詩書中에서 그 벗을 찾고 얻었도다. 아름다운 말씀은 온 집에 법이 되니 당시當時 사람들이 항상恒常 그 규약規約을 외웠고 방명芳名은 백세百世로 흘러 이후 선비들이 모두 그 덕德을 칭송稱頌 하도다. 그 미개未開한 곳에 뽕나무를 파내고 중간中間에 방위方位를 정定하여 초실椘室⁷⁾을 짓고 들보와 서까래는 모두 그 체격體格에 알맞게 하여 규구規矩에 어기는 것이 없고 문門과 창牕은 모두 적소適所에 나서 개합開闔에 편리便利하며 우렁차고 빛나게 달산하達山下⁸⁾에 솟아있고 산뜻하고 나는 듯이 남천南川 위에 부림俯臨⁹⁾하였네. 이 상동하우上棟下宇¹⁰⁾가 짜임새 있게 이루어 졌으니 300여년을 지낸 오늘에 도덕道德이 복명復明하여 사간斯干의 시詩를 외우고 이에 갸륵한 아랑가兒郞歌를 부르노라. 들보를 동東쪽에 올리니 부상扶桑¹¹⁾에 뜬 아침 해가 난간欄干위에 붉었도다. 후손들이 집집마다 힘을 합하니 화수花樹의 정의情誼가 가득 찼구나. 들보를 서西쪽에 올리니 수영樹影이 아기자기 일영日影이 낮았도다. 하일睱日에 구름밭을 갈고 지장榰杖에 비켜서니 뻑국새[布穀] 소리 장제長堤에 넘치도다. 들보를 남쪽에 얹으니 욱곡旭谷¹²⁾ 산수山水가 한량限量없이 구비쳐 흐르니 현송絃誦¹³⁾하는 빛난 자리에 참여參與하는 자 서넛 되도다. 들보를 북北쪽에 얹으니 서동書童¹⁴⁾이 도연명陶淵明¹⁵⁾의 사랑하는 국화를 머리에 꽂고 종일토록 배회徘徊하며 크게 노래 부르니 기름진 벼와 기장이 온 들에 가득하구나. 들보를 위로 얹으니 지수인산智水仁山¹⁶⁾이 모두 장壯하도다. 슬피 우러러 보니 선생先生이 가신 후로 서상書箱¹⁷⁾에 밤마다 문창성文昌星¹⁸⁾이 비친다네. 들보를 아래로 걸치니 출출기재出出奇才들이 큰 집을 지탱하리라. 등실등실한 아관峨冠들이 손님을 영송迎送하니 문전대로門前大路에 차마성車馬聲이 요란하구나.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上樑한 후로 내세후손들이 모두 복록福祿을 누리고 즐비한 선비가 두루 성盛하여 그 세상에 사표師表¹⁹⁾가 되고 나라에 주석柱石이 되어 어천만세於千萬歲에 영원히 어기지 말게 하소서.
무진년 3월 말미에
성주 이병효 적다.


【주석】
갱장羹墻¹⁾ : 갱장(羹牆)은 국과 담장으로, 고인(故人)을 추모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성현(聖賢)이나 선조(先祖)를 추모하는 뜻으로 쓰인다.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날 요 임금이 붕어한 뒤 순 임금이 3년 동안 요 임금을 앙모한 나머지, 자리에 앉으면 요 임금이 담장에 보이고, 밥을 먹으면 요 임금이 국그릇 속에 보였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牆, 食則睹堯於羹.]”라고 한 고사이다.
시경詩經²⁾ : BC 470년경에 만들어진 책이다. 고대 중국의 풍토와 사회를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을 노래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이다. ‘시경’이란 ‘시의 성전(聖典)’이라는 뜻이다. 서주(西周) 초기(BC 11세기)부터 춘추시대 중기(BC 6세기)까지 전승된 많은 시가 실려 있다. <다음 백과사전>
서경書經³⁾ : BC 60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성왕(聖王) · 명군(名君) · 현신(賢臣)이 남긴 어록이자 선언집이다. 오경(五經)에 속하며, 중국 정치의 규범이 되는 책이다. 옛날에는 『서(書)』 또는 『상서(尙書)』라 했다. ‘글로 쓴 것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핵심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다음 백과사전>
초목동樵牧童⁴⁾ : 땔나무나 하고 소먹이를 뜯는 아이들
증현曾賢⁵⁾ : 공자의 제자 중 증점曾點을 말한다. 자는 자석(子晳). 아들 증자와 함께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인물이다. 늦은 봄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며 산책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혀 공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유가사에서 존경을 받는다. <다음 백과사전>
임천林泉⁶⁾ : 숲과 샘이라는 뜻으로, 은사가 사는 곳을 이르는 말. <다음 국어사전>
초실椘室⁷⁾ : 산뜻한 집.
달산하達山下⁸⁾ : 달산達山은 합포구 구산면 내포리 욱곡마을 뒷산. 해발 150m정도
부림俯臨⁹⁾ : 아래로 (무엇에) 임하다
상동하우上棟下宇¹⁰⁾ : 「대들보는 위에 꼿꼿이 가로 놓였고, 서까래는 그 양편에서 밑으로 내려뜨렸다」는 뜻으로,  집을 짓는 것을 이르는 말
부상扶桑¹¹⁾ : 부상(扶桑)은 해 뜨는 동쪽 바다에 있다는 전설상의 신목(神木)을 말한다.
욱곡旭谷¹²⁾ : 합포구 구산면 내포리에 있는 마을
현송絃誦¹³⁾ :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음
서동書童¹⁴⁾ : 글방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
도연명陶淵明¹⁵⁾ : 동진, 유송 대의 시인으로 당나라 이후 남북조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동진 시대 지방 하급 관리로 관직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일평생 은둔하며 시를 지었다. 술의 성인으로 불리며, 전원시인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는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귀거래사〉 등이 있다. <다음 백과사전>
지수인산智水仁山¹⁶⁾ :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 한다.
서상書箱¹⁷⁾ : 책을 넣어 두는 궤
문창성文昌星¹⁸⁾ : 북두칠성 중의 여섯째 별을 달리 이르는 말
사표師表¹⁹⁾ : 학식과 덕행이 높아 세상 사람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