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18. 낙동강 굽어보는 반구정 절경
대산면 장암리 333번지에 위치한 반구정伴鷗亭은 함안조씨의 사폐지인 용화산(190m) 자락으로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 지은 정자이다.
오늘 아들과의 추억을 위해 낙동강을 따라 가며 정자들을 찾아 봤다. 별 여흥이 없는 아들은 힘들어하고 그래도 이야기 꺼리 한줌을 만들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어쩌다보니 마지막 목적지가 된 함안 반구정伴鷗亭은 여전히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4월이면 남방바람꽃 향기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겠지만 오늘은 온전히 우리 둘만의 차지였다.
지금까지 몇 번 들렀던 반구정은 경관을 보기위해 또는 나무 때문에 또 남방바람꽃을 보기 위해 왔지만 오늘은 반구정의 주련과 기문記文들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오늘도 “모든 사물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 하루였다.
2014년 4월 20일에 보았던 반구정伴鷗亭의 남방바람꽃
2020.2.18 함안 대산면 함안조씨 반구정伴鷗亭
반구정伴鷗亭 편액
반구정伴鷗亭 주련
洛水之陽名勝區 낙동강 볕이 잘 드는 명승지에
君恩許我此間遊 임금의 은혜로운 허락으로 나는 이곳에 노닐 구나.
囂塵不到閒翁耳 시끄러운 속세의 소리가 한가로운 늙은이의 귀에는 이르지 못하고
踈雨三便夢伴鷗 거친 비가 오는 삼경에 갈매기와 짝 이루는 꿈을 꾸노라.
반구정 내부에 걸린 반구정 편액
伴鷗亭記
處士趙公作亭於洛江之斗巖各其亭曰伴鷗因自號斗巖斗巖顯而伴鷗顯其顯也於龍華泛舟錄徵之矣萬曆丁未歲寒罔鄭文穆旅軒張文康忘憂郭忠翼同舟相訪時如李獨村成鵲溪李葛村諸君子三十三人在焉江在龍華山下故當時錄之傳以爲美事傳曰不知其地視其草木不知其父視其子不知其人視其友視公之師友可以知公矣公早事李篁谷篁谷陶山高弟也李應敎家淳氏所稱學有淵源者是己龍蛇之亂與兄判官公倡義兵從忘憂于鼎津火旺數立功不自伐歸臥江上以沒身而無悔焉豈不高於人一等哉夫樂富貴而喜功名者進而不退托長往而果忘世者處而不出惟工則不然見危則爲國奮忠事定則斂跡尙志不言平吳之事固守東罔之志伴鷗亭之顯名於世不亦宜乎亭舊在上浦與忘憂之滄巖亭相望歲久永激而頹後孫改建于合江亭之右合江公之從子澗松之所居也平沙十里蒼壁千仞風帆煙釣翠松綠竹景各不同靈山昌寧漆原數郡之名山川皆在眼下云十世孫性珏從于遊數十年以公遺稿徵序又請爲亭記遂書以應之.
丙寅四月 小滿節 孔巖 許傳 記
반구정기伴鷗亭記
처사조공(處士趙公)께서 정사(亭榭)를 낙동강(洛東江) 말 바위에 지어 그 정자(亭子) 이름을 반구정(伴鷗亭)이라 하였다. 두암(斗巖)에서 비롯하여(始顯) 반구(伴鷗)로 알려져 그 들남에서 용화(龍華) 범주록(泛舟錄)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정미년(丁未年)(1607年宣祖40)에 한강(寒岡) 정문목(鄭文穆), 여헌장문강(旅軒 張文康), 망우당 곽충익(忘憂堂郭忠翼), 동주상방시(同舟相訪時)에 이독촌(李獨村), 성작계(成鵲溪), 이갈촌(李葛村) 등 제군자(諸君子) 삼십오현(三十五賢)이 함께 하였고 江이 용화산(龍華山) 아래인고로 그 전해진 기록이 아름답도다. “전기(傳記)에 이르기를 그 지형(地形)을 모르면 그곳 초목(草木)을 보아 알수 있고 그 어버이를 모르면 그 아들을 보고 알게 되고 그 사람됨을 모르면 그 벗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공의 스승과 벗으로 가히 公의 인품(人品)을 알겠도다.
공은 일찌기 이황곡(李篁谷) 칭(偁)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황곡(篁谷)은 퇴계(退溪)선생의 고제(高弟)이다. 이응교(李應敎) 가순(家淳)씨는 학문(學問)의 연원(淵源)이라 칭송(稱頌)함이 옳도다. 임진계사(壬辰癸巳)의 왜란(倭亂)에 형 판관공(判官公)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의병(義兵)을 이끌고 곽망우당(郭忘憂堂)과 함께 정암진(鼎巖津)과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많은 공훈(功勳)을 세웠으나 공적(功績)을 자랑하지 않고 강상(江上)에 돌아와 은거(隱居)하시다가 세상을 떠남에도 후회(後悔)함이 없었으니 어찌 고상(高尙)하지 않으랴? 사람으로서는 제일인자(第一人者)이다.
대저 부귀(富貴)를 좋아하고 공명(功名)을 기뻐하는 자 더욱더 나아가고자 하고 칭탁(稱託)으로 장왕(長往)과 망세(忘世)를 결단(決斷)하는 자 더욱더 머물러 있고자 하는데 오직 공은 그러하지 않고 위난(危難)을 직면(直面)하여서는 나라를 위해 분연(奮然)이 일어서 충성(忠誠)을 다 했었고 나라가 안정(安靜)되고서는 고상(高尙)한 뜻을 지니고 자취를 숨겼음은 공적을 자랑하지 않은 오(吳)나라를 평정(平定:伐吳之功)한 왕준(王濬)과 같았었고(不言平吳之事) 벼슬을 사양(辭讓)하고 세장을 지켰던 주섭(周燮)의 뜻이었다(固守東岡之志)
반구정(伴鷗亭)이 세상에 들어나게 된 이름 또한 당연하지 않으리요. 정자(亭子)는 옛날 웃개(上浦)에 있었다. 곽망우당(郭忘憂堂)의 창암정(滄巖亭)과 같이 마주보는 곳으로 세구(世久)하여 물결 풍우(風雨)로 허물어져 다시 옮긴 곳이 합강정(合江亭)의 우편(右便)으로 합강정(合江亭)은 공의 종자(從子) 간송당(澗松堂)이 계셨던 곳이다. 십리평사(十里平沙)에 창벽(蒼壁)이 천인(千仞)하고 범선(帆船)의 어부(漁夫)와 청송록죽(靑松綠竹)의 경색(景色)은 각각 달라 영산(靈山) 창녕(昌寧) 칠원(漆原) 여러 고을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이 한눈에 보여 진다. 십세손(十世孫) 성각(性珏)은 나와 종유(從遊)함이 수십년(數十年)으로 공의 유고(遺稿)에 서문(序文)을 지었고 또 정자의 기문(記文)을 청(請)하기에 드디어 응(應)했도다.
병인년 사월 소만절 공암 허전 근찬
(丙寅年 四月 小滿節 孔巖 許傳 謹撰)
註 ❍托(탁)--핑계함 稱託, 假託. ❍長往(장왕)--멀리가 돌아오지 않음. ❍果(과)--결단. ❍忘世者(망세자)--세상을 잊음. ❍處而不出(처이불출)--머물로 있고자 함. ❍不出所料(불출소료)--미리 생각한 바와 같음. ❍風帆(풍범)--돛배. ❍然釣(연조)--然波釣徒(연파조도)연기가 차 있는 물결 위에서 고기 잡는 어부. ❍東岡(동강)--周섭이 世庄을 지킨 고사. ❍孔岩(공암)--陽川舊號(양천구호) ❍忘機(망기)--세속을 잊음. ❍事定(사정)--평정(平靖) ❍見危(견위)--위난에 직면. ❍不言平吳之事(불언평오지사)--晉나라 王濬이 吳나라를 征伐한 攻이 컸는데 大軍이 凱旋하는날 衣冠을 私第에 걸어두고 攻蹟을 자랑하지 않았던 일. ❍王濬(왕준)--晉나라 湖의 사람. 官 撫軍大將軍. ❍范通(범통)--晉人. 官 益州外軍. ❍和氏之璧(화씨지벽)--(和璧)卞和가 楚나라 厲王(려왕)에게 바친 玉. ❍千仞(천인)--千丈萬丈(천장만장) 극히 높음, 深高..
伴鷗亭重修記
海上有鳥脚尺餘㖨三寸頂毛十數枝人有機心者不相親斗巖先生趙公能伴之公其忘機者歟公在壬辰擧義鼎津岐江之間斬獲無數是時也公自公鷗自鷗何嘗以片翮跬步而相近哉及至辭功歸田之日機心漸消從寒旅兩先正同泛龍華之際稍與鷗慣顔竟卜斗巖名區築亭自娛而得與鷗相忘伴鷗之扁人無得以議焉先師文憲公記曰高於人一等又曰見危則爲國奮忠事定則斂跡尙志者定以是也霞溪李公撰行狀曰常玩索聖學十圖又曰著忠孝實鑑六篇家訓八箴余窃惟之以是而亭益著而家敎久而愈菀登斯亭者不可不知亭舊在上浦與忘憂亭相望置小 往來講磨盖火旺軍謀公實協贊一江南北起止相接一則忘憂一則忘機蓋見聲氣之始而終也今所以重新者在寒旅舊遊之地而從子澗松翁合江之榭同一邱壑十世相守云刱其役者後孫珩植也 謁余記者嗣孫鏞德也.
己巳 端午節 光州 盧相稷 謹書
반구정중수기伴鷗亭重修記
세상에 백구는 다리의 길이가 한자 남짓하고 주둥아리는 세치 가량이며 이마의 털은 십수개로 사람 중에 교사한 마음을 가진 자와는 서로 친할 수 없는 데에도 두암 선생 조공은 능히 반여(伴侶)가 되었으니 공은 그러한 교사한 미음이 없고(野心) 세상사를 저버리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공은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정진과 기강에서 왜적을 수없이 무찌르고 노획(虜獲)이 많았음은 이때였다. 공은 공대로 백구는 배구대로 어찌하여 늘 반쪽 나래(羽)를 펼치고 한쪽 다리로 겁(刦)없이 거닐면서(步) 가깝게 친했으리. 이르러 미치었음은 공훈을 사양하고 전원(田園)에 돌아온 날로부터 교사한 마음이 점점 사라졌음에서이다.
한강(寒岡) 여헌(旅軒) 두 분 선현(先正)과 더불어 용화산 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할 즈음 백구와 더불어 차츰 낯이 익어 침 말 바위에 정자를 지어 스스로 즐거워하고 백구와 더불어 세정을 잊고자 반구정의 편액(扁額)이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얻어질 수 없는 지모였다.
옛 스승 문헌공(許傳)이 기문에 이르기를 고절(高節)함이 첫째가는 인물이라 하였고 다시 위난을 당해서는 나라 위해 충성을 떨쳤었고 난이 평정된 후 고상한 뜻을 지니고 자취를 감쳤으니 이로서 그의 인품을 정평(定評)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하계 이공(李家淳)께서 지은 행장에 이르기를 항상 성학십도를 탐구하고 또 충효실감 육편과 가훈 팔잠을 지었다고 하였었다.
혼자 생각으로 다만 이로서 이 정자는 더욱 저명할 것이고 가교는 영원할 것 같았었다. 더욱 울창할 이 정자에 오른 자 여태 알지 못했음이 옳치 않았었다. 옛 정자는 웃개(上浦)였는데 망우정과 더불어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어서 적은 배로 왕래하며 도의를 강론하고 연마하였었다. 대개 화왕산성 군사 모략이 실은 공의 협찬이었다.
하나의 강이 남북으로 나눠졌어도 서로 가까이 접해져 한곳은 망우(忘憂) 한곳은 망기(忘機)로 대개 짐작컨대 성음(聲音)과 기세(氣勢)를 같이하고 그쳤었다. 이제 새로이 중수한 곳은 한강 여헌과 함께 선유하셨던 구지(舊址)이고 종자(姪) 간송선생 합강정사와 같은 언덕 같은 골짝으로 서로 십세(十世) 동안 수호하고 있다한다. 중수에 힘쓴 자는 후손 형식(珩植)이고 나에게 기문을 청한 자 사손(嗣孫) 용덕(鏞德)이다.
기사 단오절(1929년) 광주 노상직 근서
출처 및 참고
함안조씨 두암공파 종회(http://hamanjoduam.co.kr)
함안누정록-함안문화원/대보사(201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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