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구산면 석곡마을 밀양박씨 석산재 石山齋

천부인권 2020. 2. 20. 07:40



2020.2.15. 구산면 수정리 석산마을 밀양박씨 석산재石山齋


구산면 석곡리 89-1(아랫석곡길 11-6)에는 밀양박씨의 재실인 석산재石山齋가 있다. 석산재는 칠원 화천리에서 처음으로 박창진朴昌震 공이 이 마을에 이주하여 살면서 번창하게 된 가문으로 이를 기리기 위해 1974년 3월 16일에 지은 재실이다.
대문은 소앙문溯仰門이라 편액 했고 본 재실은 석산재石山齋라 이름 했다. 기둥과 방 기둥에는 주련을 붙였고 배기철裵基哲이 기록한 석산재기石山齋記가 걸려있다. 이 재실을 관리하시는 분이 마을에 살고 있어 어렵지 않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소앙문溯仰門 편액



석산재石山齋 본당 모습



석산재石山齋 편액



석산재石山齋 주련


해문-文山
洋洋陟降宛如在  도도하게 오르내리니 마치 계신 듯 하고
孱孫今日自成村  잔약한 후손이 오늘은 마을을 이루었네.
吾祖當年收養地  우리 조상 일 있든 그해 길러 거두니
三哉經營屋數軒  삼년 경영하여 두어칸 재실 이루네.
遺訓貽謨百世敦  유훈 따라 계획하니 백세토록 화목하고
龜山之下滄溟上  구산 아래에 넓고 큰 바다 위라네






石山齋記
馬山市之四十里許 有匡廬山南鄕之名山也 勢秀麗南走數十里 防重重起 伏宛成龍蛇之形 而至放南海之濱 更聳一峯而還抱之中 有一洞府卽石谷也 而朴氏之世庄也 朴氏石山先生 自漆原之化川奠居于 此而世世文學相傳 蔚南州之名閥後裔蕃衍 其胄孫萬洙君 與其諸族合力彈誠築齋於所居洞 公杖履逍遙之地 以爲公墓歲一瞻掃齋宿之所 亦爲聚宗族敦睦 迎友講學之堂 工旣訖額而石山而與其傍後孫仁熙君訪基哲于 佳洞田舍而囑所以記 其事者余衽斂曰 余本不文不敢當 此役云云  則其請愈勤深辭不得 故遂狀而接之曰 先生名昌震字德老號石山 其先密陽也 生於漆原之化川里 第勇力過人矣 幼時遊戲必築城作戰及馳馬之術 而及其長也 當龍蛇之倭亂 自進奮發而討賊成功非 但一二度也 而使蒼生免得魚肉之愚亂 而爲國盡忠親民如子 行折衝將軍副護軍及通禮院引儀昭威將軍 陛曲獄署主簿 而亂旣平 棄官南下擇於風景及水石之佳鮮也 龜山之石谷濱於江海 而景宜處也 先生点得遯踏滄溟之賓 濯襟洗足水石之間 養性收心承祖武貽孫模 漁樵以爲業 詩禮以垂後無窮 而垂訓不愼重豈能致 此乎哉登於此哉齋者 仰然追慕僾然如見其風哉 肅然如承其志 操去其貧慾之心 勵其知足之智 則朴氏之築 此齋朝暮之追慕 非但朴氏一家之家 聲不替而已矣 必將及於廣世後進之人人也 豈不盛哉 余將待淸秘住鄕與二三同志 經山波水而登於 此齋想慕先生之風獻 而與其諸後承把酒相酬 而一吟一唱 則此亦或有當於公垂訓之意也 否齋經始於壬子年三十六日 而畢役於甲寅年四月十五日 是爲之記
歲甲寅淸明節 後生盆城裵基哲謹記


석산재기石山齋記
마산시 서쪽 십리쯤에 광려산匡廬山이 있으니 남쪽 고을의 명산이다. 수려한 산세가 남쪽 수십리를 달려 병풍을 쳐 거듭거듭 일어섰다. 엎드렸다하여 용과 뱀의 형상을 완연히 이루어 남해 물가에 이르러 흩어졌고 다시 한 봉우리가 솟아 돌아 안은 가운데 한 마을이 있으니 즉 석곡이요 박씨들이 대대로 살았다. 박씨인 석산石山선생은 칠원漆原 화천化川으로부터 와서 살 곳을 이곳에 정해 대대로 학문을 서로 전하여 남쪽 고을 이름난 집안으로 후손이 넓게 번성하여 우거졌다. 그 집안 종손 만수군萬洙君이 그 집안 여러 친족들과 협력하고 정성을 쏟아 사는 마을에 재실을 지었으니 공께서 짝지집고 소요한 땅이다. 공의 산소에 한해한번 우러러보며 청소하고 제계하며 묵은 곳이요 또 종족들을 모아 정이 두텁고 화목케 하고 손님과 벗을 맞이하여 강학하는 집이다. 공사를 이미 마치고 혈족의 후손인 석산石山의 인희군仁熙君이 기철基哲이가 사는 농막에 찾아와 기문을 부탁하기에 그 일에는 나는 학문이 없어 이 일에 감당하지 못한다고 이르렀으나 그 청함이 더욱 간절하여 사양 못하고 옛 행장에 쫓아 말하노니 선생의 이름은 창진昌震이요 자字는 덕로德老요 호號는 석산石山이다. 그 선조는 관향이 밀양이다. 태어나기는 칠원漆原 화천리化川里이고 용기와 힘이 남달리 뛰어 났더라. 어린 시절 노는 것이 반드시 성 쌓는 것과 전쟁하는 계략과 말달리는 재주를 부렸고 그가 성장함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스스로 나아가 분발하여 적을 무찌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어육魚肉의 환란을 면하게 하였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백성들을 내 자식과 같이 친하였다. 행정충장군부호군과 통예원인의소위장군通禮院引儀昭威將軍 폐곡옥서주부陛曲獄署主簿의 벼슬을 하였고 난리가 이미 평정되어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경치와 산수의 아름다운 좋은 곳을 택하였는데 구산석곡의 바닷가의 경치가 마땅한 곳이라 선생은 물가에 은둔함을 얻어 옷 씻고 발 적시며 자연 속에서 품성을 기르고 마음을 거두며 조상이 남긴 공적을 이으고 후손들에게 모범되게 끼치고 고기 잡고 나무함을 업으로 하고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산밖에는 무엇이 있음을 알겠는가. 이 마을은 속세를 벗어나 선원이라 이르겠으니 또 어찌 가히 있겠는가. 또 하물며 박씨들이 이 마을에 대대로 이어 온 삶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후예들이 번성하여 백여호에 이르고 집집마다 너그럽고 사람마다 편안하여 집에 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공경을 돈독히 하여 그 집안을 보호하고 명예는 근원에 번졌음에 즉 선생의 음덕이 뒤로 무궁하게 드리워졌고 가르침을 신중히 아니하였으면 어찌 능히 이를 이룰 손가 이 재실에 오르는 자 우러러 보며 추모할 것이요. 어렴풋이 그 풍모를 보는 것 같으면 숙연히 그 지조를 잇게 할 것이고 그 탐욕의 마음은 떠날 것이요 그 만족한 지혜를 알려고 힘쓰면 곧 박씨들이 이 재실을 지어 아침저녁 추모함이 다만 박씨 한집의 명예를 바꾸지 않을뿐더러 반드시 장래에는 넓은 세상에서 후진에게 미칠 것이니 어찌 성하다 아니하랴. 내 장래에 깨끗이 살고 있는 고을 2~3인의 동지들과 산을 지나고 물을 건너다가 이 재실에 올라 선생의 풍모를 생각하고 사모하고 그 뒤를 잇는 모든 후손들과 술잔을 드리고 서로 권하며 한번 읊조리고 한번 주르는 것을 기다릴 것이요 마땅히 공의 가르치신 뜻이 아니랴 이 재실을 처음 시작함은 임자년 3월 16일이요 공역을 마침은 갑인년 4월 15일로 이에 기록하노라.
갑인(1974)년 청명절 후생 분성 배기철 삼가 기록함.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