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밀양향교 외부 영역과 풍화루 기문 風化樓 記文

천부인권 2020. 3. 13. 21:00

2020.2.10. 밀양향교 외삼문外三門과 개복청改服廳

 

밀양시 교동 733(밀양향교3길 19)은 옛 우리나라 교육기관인 밀양향교密陽鄕校가 위치한 곳으로 1983년 8월 12일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된 곳이다. 구글 지도의 좌표로는 「위도 35°30'23.1"N 경도128°45'17.1"E」를 표시한다.
이 밀양향교密陽鄕校는 서기 1100년경에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교동(校洞)마을 뒤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25년(1602년)에 부사府使 최기崔沂가 중건重建하였고, 특히 제례의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은 순조 21년(1821년) 부사 이현시李玄始가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며 동무東蕪, 서무西蕪, 내삼문內三門이 있다. 교육의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을 위시하여 동재東齋, 서재西齋, 풍화루風化樓 등이 있고, 건물 배치형식은 경사지에 이축선二軸線 전학후묘前學後廟 병렬형 배치이다. 풍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 2층 누각이고 5량구조로 경상남도의 어느 향교보다 규모가 커다. 명륜당明倫堂의 좌측에는 담장으로 분리하고 협문을 통해 출입하도록 한 전사청 및 집무실과 창고 등의 건물이 있다.
밀양향교密陽鄕校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마을의 윗쪽 막다른 골목에 향교로 들어가는 솟을삼문인데 정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1칸에만 출입문이 있고 양쪽은 방의 형태를 갖추었다. 『밀양향교지』에 의하면 개복청改服廳을 겸한 이 외삼문外三門은 해방 전후에 이 위치에 재건하였고 옛 기록은 마을 골목길 끝에 위치했고 세 개의 문이 모두 개폐開閉 가능한 문으로 되었으며 진입로 어귀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었으며 개복청이 딴 건물로 있었다 하며 일제를 거치면서 향교의 형태가 지금처럼 축소되어 바뀌었다고 한다.
이 외삼문外三門은 삼량가三樑架의 구조이며 건평은 약 13평인데 일반적으로 향교에 사례가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밀양향교 건물배치도

 

밀양향교를 방문하기 전 미리 시간을 약속하고 교동손씨들 밀집 도로를 따라 입구를 향하니 12대문집 앞에 하수구공사로 풍화루 입구 주차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래에 주차 후 걸어들어 가니 명륜당을 해체하여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의 방문이 있었지만 문이 열려 있지 않아 내부를 볼 수 없었는데 공사로 어수선한 분위기지만 밀양향교의 분위기를 볼 기회를 가졌다. 풍화루에는 부사府使 오장묵吳章黙이 쓴 밀양향교풍화루중건기密陽鄕校風化樓重建記만 걸려 있어 다른 편액들은 보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밀양향교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노거수들이 제법 있는데 소나무, 은행나무, 사철나무, 주목, 카이즈가향나무 등과함께 독보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매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 매화나무는 꽃이 피지 않아 다음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2020.2.10. 밀양향교 전사청 및 관리사 입구

 

2020.2.10. 밀양향교 풍화루 전경

 

2020.2.10. 밀양향교 풍화루 편액

 

 

密陽鄕校風化樓重建記
凡州郡之皆立學校 倣古家有塾黨有庠術有序之制而所 以風化萬世者也 是以建校宮而置門樓盖示尊首善儼觀瞻 則其名之揭 以風化顧不重歟 余以庚辰冬來守玆土愛 其山川之融結 文獻之足徵 雖處嶺陬 尙有鄒魯遺風焉及夫 春秋之釋菜就校中而循視 則黌廡制度壇壝規畵眞大都學宮 然嗣葺歲久稟乎 有將圮之漸而惟玆風化一樓尤急 其慮顧余諛學斯文糟粕用是興歎 乃謀重建邀鄕士之幹錬者而語之曰 以若文雅之鄕 此樓頹覆 是豈重校堂 崇儒學之本意乎 或以歲儉辭 卽損若千廩揀 其人而庇大事昉于 辛巳十月竣于粤翌年三月 而倂與聖殿東西廡之罅 漏處亦加修補 其衡縮廣狹複桷唐欄雷面揆度芿舊改葺 燦然復新矣 於是大會章甫而落之繼以勉旃 嗟我州士生斯聖世居 此名鄕宜各 以道學自任忠信自持 麗澤相資仞山莫虧 則先聖人培植風化之功 庶可與斯樓益煥 而今之密爲古之密矣 厚有望於從 余遊之諸君子焉
壬午維夏 知府 吳章黙 謹記
          都有司 孫學秀
       重修有司 安孝龜 孫喆遠 李鍾夏
             掌議 李鴻儀 朴東都
          別有司 韓克成
    重修色戶長 尹秉友
       約史史房 尹熺震
             記官 尹秉淵
          都書員 金龍洽
          都木手 朴振英


밀양향교풍화루중건기 密陽鄕校風化樓重建記
무릇 모든 주군州郡에서 학교를 세우는 것은, 옛날에 가家에는 숙塾이 있었고, 당黨에는 상庠이 있었고, 술術(遂)에는 서序가 있었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니 풍속風俗과 교화敎化를 만세萬世에 끼치고자 한 까닭이다. 때문에 교궁校宮을 세우면서 문루門樓를 두는 것은 대개 수선首善(太學)을 높이 나타내어 우러러보기를 장엄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풍화風化로 편액扁額하여 거는 것이니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내가 庚辰年(1880,고종17)에 이 고을의 원이 되어 왔을 때, 그 산천山川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고 문헌으로도 증거 할만한 것이 있었는데 비록 영남의 한 구석에 위치해 있지만 오히려 추로鄒魯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춘추로 지내는 석채釋菜 때에 향교에 나아가 두루 살펴보면 학교와 사무祠廡의 제도며 단유壇壝의 규모가 참으로 큰 도시의 학궁學宮과 같았다.
그러나 계속하여 수리를 해 온 것이 세월이 오래되어 조마조마하게 장차 무너질 위험이 있는데 유독 이 풍화루가 위독하였다. 그 일을 걱정하면서 나를 되돌아보니 배움에 아첨을 일삼는 사문斯文의 술찌꺼기와 같은지라 때문에 탄식이 일어나는 도다. 이에 풍화루를 중건할 것을 도모하고 고을 선비들을 맞이하여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만약 문학文學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이 풍화루가 무너져 엎어진다면 이것이 어찌 학교를 중하게 여기고 유학을 숭상하는 본뜻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혹 어떤 이는 흉년이라 사양을 했지만 곧 약간의 녹미祿米를 내놓고 그 일을 맡을 사람을 간택하여 큰일을 부탁하였다.
신사년辛巳年(1881, 고종18) 10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3월에 준공을 하면서 아울러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西廡에 벽이 갈라지고 비가 새는 곳도 또한 보수 하였다. 그 가로와 세로, 넓이와 좁음, 서까래, 당마루, 난간欄杆, 소로小櫨 등 규모와 제도를 옛 모습대로 고치고 지붕을 이으니 찬연하게 새로움을 되찾았다. 이에 선비들을 크게 모아 낙성落成을 하고 이어서 그들을 격려하였다.
아아! 우리 고을 선비들은 이러한 성세盛世에 태어나 이 이름난 고장에 살면서 마땅히 각기 도학道學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고 충성과 믿음을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이다. 벗끼리 서로 돕고 학문과 덕을 산처럼 높이 쌓아 무너지지 않도록 하면 선성先聖이 풍속과 교화를 북돋우어 심은 공적이 아마도 이 풍화루와 더불어 더욱 빛날 것이니 오늘의 밀양이 옛날의 밀양이 되도록 나를 좇아 종유從遊하는 여러 군자君子들에게 정중하게 희망하노라.
임오壬午(1882, 高宗19)년에 부사府使 오장묵吳章黙은 삼가 쓰다.
       도유사 손학수
    중수유사 안효구 손철원 이종하
          장의 이홍의 박동도
       별유사 한극성
중수색호장 윤병우
   약사사방 윤희진
         기관 윤병연
      도서원 김용흡
      도목수 박진영

 

출처 및 참조
문화재청-밀양향교
밀양향교지-밀양향교지간행위원회/폴리테이아(200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