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양산향교 현판과 기문

천부인권 2019. 9. 7. 17:16

2019.7.24.양산향교 드론 촬영 모습

양산시 교동 198-2번지에 위치한 양산향교(梁山鄕校)는 1982년 8월 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양산향교는 선암산(710m)의 지맥이 흘러 양산천을 만나는 곳의 배산임수(背山臨水), 전저후고(前低後高)의 명당에 자리하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물 배치구조를 가졌다. 
양산향교는 임난(壬亂) 병화(兵火)로 회로(灰爐) 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기록은 전무한 편이며 이후의 기록에 의하면 군(郡) 동서로 여러 차례 이건 되었다 하나 동쪽으로 옮긴 곳은 그 위치가 불분명한 상태이다.

 

2019.7.24.양산향교 대성전 영역 드론 촬영 모습
양산향교 건물 배치도
양산향교 홍살문
양산향교 명륜당
명륜당 내부의 명륜당 편액
2019.7.24.양산향교 펀액

梁山鄕校約條序文
歃良州 州序南 有神主洞 卽 贈佐郎 鄭公好仁 壬辰亂 藏聖廟主之所 而洞逐以名也 時 趙侯英圭 赴萊營 同宋公 立殉 論節烈者 以二公 爲稱首 夫封疆之臣  死於封彊 職也分也 公 以朝筵不與之人 所任在州序 則這便是盡職 且公暨白公受繪 被擄 九年不屈 推是心 易二公地 豈不皆然哉 此 朝家所以 生而爵之 歿而贈之 庸勸來世也 顧鄉之尊奉公者 祗有一畝之宮 今入鞠草 此氣數之變也 主簿李公藝 有功陶山 至今自院助祭 君子曰 是禮也 良之士 又有觀於泮宮乎 鄉校之東 烏頭赤脚 輝映千秋者 不過爲僕隸之微 則以公護聖之功 無所崇報 非州序之欠典乎 玆屬鄉論 定助課儀 式物不在多 惟是禮云 於乎 吾道在天下 殄滅他不得 有是道則 有是序 有是序則 有是禮 茅山可礪 曲浦可渴 公之名 長在神主洞而無窮 苟語夫子處變 其微服過宋之時 而從我於陳蔡之間者歟 公在海窖 日誦論語 素養又可知 使今日執禮者 讀夫子之書 慕鄭公之行 其庶幾乎
鹿脯壹條 大棗伍合 黃栗五合 丹香一封 右四種 校長 具單 呈墳庵 掌議參祭 有故 以曾經人擇送
上之十四年丁丑三月日 眞城後人 李晚燾謹書 

양산향교약조서문
삽양주(歃良州:梁山古號)의 주서(州序:향교) 남쪽에 신주동神主洞이 있으니 이는 곧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추증받은 정공鄭公 호인好仁이 임진왜란 당시에 병화를 피하려고 오성위판五聖位板을 감추어 봉안한 곳으로서 이로써 동명洞名을 삼은 것이니라. 그 때 본군 군수 조후趙侯 영규英圭는 동래東萊 영문에 달려가서 항전하다가 부사 송공宋公과 함께 곧 순사하였으므로 절열節烈을 논하는 자는 조후趙侯와 송공宋公 두 분을 먼저 수위에 이르나니、대저 임지를 다스리는 신하는 국가 존망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임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순사하는 것은 직분이라 할 수 있거니와 공公은 조정朝廷 자리에는 참여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소임이 주서州序(鄕校)의 교임에 불과하나 이런 경우境遇에 대의를 지키고 호성護聖을 완수하였으니 이 또한 직분을 다함이니라. 또 이 백공白公 수회受繪와 함께 사로잡힌 바 되어 구년九年 동안 옥고를 겪었으나 끝내 굽히지 아니하였으니 이 마음을 미루어 생각컨대 송宋·조趙 이공二公과 입장을 바꾸어 본다면 어찌 다 그러하지 않으리요。이는 조정에서 생전에는 작위를 내리고 사후에는 증직을 내려서 떳떳이 오는 세대를 권장하는 까닭이니라. 향중에서 공公을 존봉하는 바를 돌이켜보면 조그마한 제궁祭宮에 정성을 다하면서 있었으나 이제는 풀이 무성한 속에 들어갔으니 이는 기수氣數의 변천이라. 주부主簿 이공예李公藝는 도산서원陶山書院에 공이 있다하여 지금까지 서원으로부터 제사를 도와 드린다 하니 군자君子 가로되 이는 예禮라하니라. 양주良州 선비들은 진궁津宮(成均館 및 文廟)에 가 보았는가? 향교의 동편에 오두적각烏頭赤脚(정문)이 천추에 빛나는 것은 미미한 하복下僕의 신분에 불과하였는데도 그러한데 하물며 공公의 호성지공護聖之功에 대하여 높이 보답하는 바가 없었으니 이는 주서州序(鄕校)로서 의예儀禮의 빠진 바가 아니리요. 이에 중 공론에 붙여 관의(裸儀 : 술을 땅에 부어 신의 강림降臨을 비는 제사)로써 위로하기로 경정決定하였으니 제물祭物이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닐진대 오직 이 예禮라 할 뿐이로다.
아! 우리의 도의는 천하天下에 있어서 아주 없어지는 일은 달리 있을 수 없으니 이 도의가 있은 이 주서州序(향교)가 있고, 이 주서가 있은즉 이 예가 있나니、모산茅山이 다 닳고 곡포曲浦가 다마르더라도 공公의 명성은 길이 신주동神主洞에 있어 끝이 없으리라. 진실로 공자孔子의 변고變故에 대처한  것을 말하자면 공자께서 진陳과 채蔡의 지방에서 위난危難이 있을 것을 느끼시고 변고에 대비하여 미복微服을 하고 송宋나라 지경을 지날 때「나를 따라 진陳과 채蔡의 지방 사이를 같이 갈 자가 있는가?」라고 하시었으니 공公이 바로 그리하였을 것이다. 공公이 해교海窖(왜국 옥)에 있을 때 날마다 논어論語를 암송暗誦하였으니 그 소양素養은 가히 알지니라. 오늘 제관祭官에 참여하는 자가 부자夫子의 글을 읽고 정공鄭公의 행적을 추앙한다면 그는 거의 가까우리라.

녹포 1조, 대추 伍合、단향 1봉、황률 伍合 위 사종四種을 교장校長(향교장)은 단자를 갖추어 분암墳庵(묘소를 수호하는 곳)에 드리고 장의掌議를 시켜 참제參祭케 하고 유고有故 시에는 미리 경험있는 자를 선택하여 참제케 할 것.

今上十四年 丁丑(서기 1977)年 三月
군수郡守 진성眞城 이만도李晩燾 삼가 씀.

 

 

[原文]
大成殿重修記
不佞 以丁酉十二月 出守梁 梁巖邑 民俗樸古 章甫焉 多慕聖向學 甚嘉尙焉 越明年春 校宮 有譆出之災 堂榭榱桷 至於黔壤燒殘 不侫不謹之咎 已所難逭 而一郡士流 擧驚唶奔趨 移奉聖牌於別處 夙夜祇憑 與郡人合議重葺之計 而顧財力微弱 無以興功 遂先出官廩一月俸 以爲首倡 郡士人 丁壬敎 柳淇潤 傾財殫誠 鳩財興工 課日董飭 費一月餘 而工始迄 堂宇增光 棟楹斯煥 玆豈非成毁之有數歟 遂以重修校宮之意 備報府部 自儀曺 有還奉聖牌之回題 兼賞送香祀 乃擇日會士 謹以本年四月初五日 灑掃堂廡 躬奉位牌 敬妥于舊所 精具脯果 祗告事由 不侫 何力之有 斯皆二士之 慕聖出義 克儧巨工之苦心美誠也 付記顚末于壁上 俾玆州人 咸觀感而興起焉 遂爲之詩曰
梁山何奕奕 祗媼毓氣淑
有儼夫子宮 巖巖觀瞻肅
千年東方國 至今聖化篤
菲才沾隆渥 猥紆玆州紡
課月朔與望 祗謁輪悃愊
忽値鬱條災 聖牌震且驚
堂榭燒而傾 菁莪意㛁㛁
遂捐一月俸 首倡事葺營
亦有忠信士 傾財殫其誠
干干來董役 杍工不日成
成毁亦有數 廟貌增丹艧
笙鐘今有所 士林樂且悅
儀曹騁使价 香祀自丹楹
揀日還妥靈 禮儀庶不乖
微功歸太守 太守有何力
本朝五百年 培養邁古昔
媺哉二雅士 羹墻慕無斁
豈獨二士然 擧郡皆樸棫
願言玆州士 繼繼承此跡
光武二年 戊戌四月 初五日 大成殿重修記
行郡守 任喆宰 敬敍
時都有司 前延日縣監 丁奎烈
掌議 李圭泳 金溶會
都監 柳淇閏

郡守敬助錢三百両
丁奎烈出義錢一千四百六十五両六戔
柳淇閏出義錢四百四十五両

 

[해문]
대성전중수기
내가 정유년(1897) 12월에 양산에 부임하니 양산은 산간읍(山間邑)이라 순박하고 선비가 독실하여 모두 성현을 숭모(崇慕)하고 학문을 힘쓰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라.
이듬해 봄에 교궁이 깜짝 놀라 소리 지를 만한 화재로써 서까래가 검은 흙이 되도록 다 타버려 나의 불근(不謹)한 허물은 이미 면하기 어려운 바이었는데 일군(一郡) 사류(士類)가 모두 놀라고 탄식하면서 달려가서 성패(聖牌)를 별처(別處)에 이봉(移奉)하고 조석으로 지신에게 의지하다가 군인(郡人)과 더불어 중수할 것을 합의 계획했으나 돌이켜보니 재력이 미약(微弱)하여 시공할 방도가 없는지라. 드디어 내가 먼저 일월봉(一月俸)을 희사하여 수창(首倡)하고 군내의 사인(士人) 정임교(丁壬敎)와 류기윤(柳淇潤)이 재물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하여 자금을 모아 공역을 시작하고 매일 공사 감독을 성실히 하여 일개월여 만에 준공되니 당우(堂宇)가 한결 새롭고 기둥과 보가 이에 빛나는지라. 이 어찌 이룸과 무너짐에 운수가 있는 것이 아니리요. 드디어 교궁의 중수전말(重修顚末)을 서울 관청(官廳)에 보고하였더니 예조로부터 성패환봉(聖牌還奉)의 회시(回示)가 있었고 겸하여 향사(香祀)을 상으로 보내 왔도다. 이에 길일을 택하여 사회(士會)를 열고 삼가 본년(本年) 4월 초5일에 당우와 동서무를 청소(淸掃)하고 몸소 위패(位牌)를 받들고 삼가 옛 자리에 환안(還安)하고 정(精)하게 포과(脯果)를 갖추어 공경스럽게 사유를 고(告)하였도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이와 같은 큰 역사를 마쳤으리요. 이는 모두 두 사인(士人)의 성인을 추모하는 의리의 발로(發露)와 훌륭한 장인(匠人)의 고심과 아름다운 정성이 애써 모였기 때문이리라. 그 전말(顚末)을 명륜당 벽상(壁上)에 기록하여 우리 고을의 사인들이 모두 보고 느껴서 의로운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려 하노라. 나아가서 시(詩)로 찬(贊)하니 시(詩)에 말하기를
양산(梁山)은 어찌나 크고 큰지고 지령(地靈)이 숙기(淑氣)를 길렀도다.
근엄한 공자의 궁이 있으니 높고 높아서 처다 보기에도 엄숙하도다.
천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지금껏 성화(聖化)가 돈독(敦篤)하였도다.
불초가 높은 은혜에 젖어 이 고을의 경륜을 맡아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공경스럽게 배알하고 크게 정성을 밭쳤더니
문득 답답하고 요란한 재난을 만나서 성인의 위패가 진동(震動)하고 또 놀랐으며,
당우는 불타서 기울어지고 많은 사림들은 생각이 황급(遑急)해 졌는지라.
드디어 일개월분(一個月分)의 봉급을 희사하고 수선(修繕)할 것을 앞장서서 부르짖었더니
또한 충신의 선비가 있어 재물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하며
함께 참여하면서 공사를 감독하였으므로 목공(木工)이 불일간(不日間)에 이루어졌도다.
이루어지고 헐리는 것이 운수(運數)가 있으니 이제 묘우의 모습은 장식(裝飾)을 더하였고
생(笙)과 종(鐘)의 악기들은 제자리에 놓이게 되었으므로 사림들이 즐거워하고 또 기뻐하였도다.
예조(禮曹)에서 사자(使者)를 달려 보내어 향(香)과 축문(祝文)이 붉은 기둥 밑에 놓여 있도다.
길일(吉日)을 간택(揀擇)하여 위패를 환안(還安)하니 예의가 거의 어긋남이 없도다.
미공(微功)을 태수(太守)에게 돌리니 태수가 무슨 힘이 있으리요.
본조 오백년 동안 옛것을 숭상하는 정신을 배양하였기 때문이니라.
착하구나! 바르고 품위 있는 두 선비여, 옛 모습 그리워하여도 끝이 없구나.
어찌 홀로 두 선비만 그러하리요 전군(全郡)의 많은 선비들이 다 같이 순박하도다.
원컨대 이 고을 선비들이여 이 행적을 계승(繼承)하겠다고 이르소서.
광무이년 무술(1898) 4월 초5일 대성전중수기
행군수 임철재(任喆宰) 공경히 진술하다.
시도유사 전연일현감 정규렬(丁奎烈), [改 임교(壬敎)]
장의 이규영(李圭泳) 김용회(金溶會)
도감 류기윤(柳淇閏)

군수 경조전 200냥
정규렬 출의전 1465냥 6전
류기윤 출의전 445냥

 

[原文]
鄕校重修記
學校者 國家爲治之源脉 後學八德之正門也 覆照之下 書坑一同 然我 聖朝崇學之典 與三代同視 而此隆於宋明迄至 于仐則中華陸沉之後聖宋皇 明理學之源脉 獨守于海東 而海東之學尤盛於嶺南 炳然有鄒魯之風 則梁之於嶺表 一鄒魯鄕也 粤在癸亥秋 余篆視玆土 才不足剸煩 ◆弊政木遑獎學牑後 然俗古風純率 皆勘夯本源地 頭洗濯磨淬 而黃髮履禮 靑襟向訓 梁之於嶠南 風敎之所 從來者尙矣 豈可以地之高 下較之哉 翌三年乙丑仲春 鄕中章甫 憫校宮之傾圮渗頹排 斂儒戶畧干錢 仍舊而葺之 不賴 獎源林侯之刱始南康王公之董事 而鄕老 安君景祿甫 意亘克恢宇量宏閜 幹其繕後 鋸彼刀彼三門四表 洞然俱開 輪焉煥焉 十哲宗師庸乎如在 而文廟明倫堂 東西廡齋 如新之擧鄕生徒皆知校爲敎 而至於化 成敎立之域則 豈非斯文之大幸乎 日安君 袖而曺侯一部記 踵致壁而徵記 沃繙冄三汗覺 平日學問之不慱◆ 不敢孤强顔血斮曰 玆鄕之校 蕩鏖於龍蛇灰燼 而文趙朴曺四公 相繼莅郡 分俸重創四公 慕聖尙學之誠 永世不磨 而松潭白先生 亦請記于曺公挺融 以爲後學常目之資 其衛道之心 與校宮蘬然者也 其數百年後 安君掌繕校役 不煩公私 而訖功其扶風綱植彛倫之道 鳥可小補云爾
崇禎紀元後五旃箂鳴桐月上弦知郡靑松沈樂正謹記

 

[해문]
향교중수기
학교란 것은 국가의 다스리는 근원이요. 후학(後學)의 입덕(八德) 하는 바른 문이라. 우리 국가의 숭학(崇學)하는 제도는 옛날 하은주(夏殷周) 3대와 그 융성(隆盛)함을 비(比)하리라.
그 가운데 성리학(性理學)에 있어서는 영남(嶺南)이 더욱 성하였으니 양산(梁山)은 영남에서 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니라.
지난 계해년(癸亥年) 가을에 내가 이 고을을 맡아 부임해 왔을 적에 향중(鄕中) 선비들이 학교의 향교가 기울어지고 무너졌음을 민망하게 여겨 유가(儒家)에서 약간의 금전을 거두어서 옛 모양에 따라 보수 하였는데 안군 경록(景祿)이 그 역할을 주간한 결과 대성전과 명륜당과 동서무와 동서재가 모두 웅장하고 빛나게 되었으니 어찌 유림의 큰 다행(多幸)이 아니리요.
어느 날 안군이 조군수(曺郡守)의 기문 일부를 가져와 옛 기문에 이어 달아서 기록을 남겨 달라고 하기에 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어 가로되
이 고을 향교가 용사(龍蛇)의 난에 회신(灰燼)되고 그 뒤 문·조·박·조군수(文·趙·朴·曺郡守) 등 4공이 뒤를 이어 이 고을에 재직하면서 봉급을 나누어 희사(喜捨)하여 중창하니 4공의 선성(先聖)을 앙모(仰慕)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정성은 영세토록 불멸할 것이로다.
송담 백선생이 또한 전군수(前郡守) 조공(曺公) 정융(挺融)에게 청하여 기문을 남겨 후학들이 항상 눈여겨보게 하였으니 도를 지키는 마음이 학궁(學宮)과 더불어 우뚝하도다.
수백 년 후에 안군이 교궁 수선의 큰 역할을 주간하여 공사를 번거로이 생각하지 않고 준공을 보게 하였으니 그 뜻뜻한 인륜의 도를 지키고 전하는데 어찌 소보(小補)라 하리요.
갑자년(甲子年) 5월에 군수 심낙정(沈樂正)이 삼가 기록하다.

 

[주석]

추로지향(鄒魯之鄕) :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이르는 말

 

 

梁山鄕校重建有功記文
夫時有顯晦하고 事有隆贊者는 古今之所同也라 斯道之隆於往者는 勢之然也오 替於近也者는 時之然也라 聖學이 失宣於今하니 民生無衣하고 彛倫이 掃地하니 良俗이 自頹라 學政이 有異於仁義하니 斯道는 迂濶而不行이라 然而天日은 終無陰雲之蔽하고 秉彝는 尙存方寸之中이라. 是以로 尊聖之體는 無情於勢難之中하고 修道之規는 不廢於混亂之中也아. 想夫先聖正敎之方이 綿綿於千六百有年之長하여 夫植於血脈之中而寔爲東方禮儀之邦乎아. 然이나 鄕儒無擔力하여 聖宮은 難欲淸淨이나 修葺無力이라. 棟宇는 將傾하고 牆垣은 日頹러니 幸而梁山鄕校典校 金斗成甫는 一九八一年 辛酉에 典校就任以來로 晝宵勤苦하여 梁山鄕校地方文化財第二〇五號 指定에 奏功을 爲始하여 自越明年 甲子로 至于戊辰 槪五載之間에 大成殿 明倫堂 神門 風詠樓 等을 次第重建造成하고 連而丹靑이 完訖하였으며 宮牆을 新築하고 環境을 整齊하였고 次而 東西兩齋와 紅門乃至內三門과 階段路가 新造 및 改修되었으니 誠會人改觀而 如斯大小少施設이 無復顧餘와 凡在任七歲之間에 聖潮는 斯煥而莊蔽하고 堂宇는 增光而優雅하며, 環境은 淸淨而肅然하니 此豈非成毁之有數也며 待其人而成事耶아 若無當時守宰 安康植 李斗淵 金明奎 諸賢 修誠懇之明察이런들 焉有今日之盛事乎아. 自今以後로 梁山諸士는 諸賢候春秋之深慮하고 效典校職事之誠勤하여 晶勉尊聖崇學之風하고, 以明孝悌忠信之道하여 遂化民成俗之美擧而 庶幾有補施也면 斯道之晶은 可立而待矣리라. 蓋如許大業이 何謂一人之獨奏乎아. 于間掌議諸賢之勞苦라. 鄕儒僉位之協助가 渾然一體之所致는 誠可激讚而不巳者也라. 近因諸章甫 文報是有하여 是以感發人心이라 於此求文하여 以示永以故로 余玆爲敍其實하고 兼以表彰碑賞之하노라.
孔紀二千五百三十九年菊秋節
成均館長 金敬洙
時任典校 金斗成
時任掌議 李之熙 崔桭澤 鄭鎭玉 車炳載 金周浩 安孝材 李聖熙 金德遭 黃興道 鄭龍滈 趙鏞河          

             金鍾喆 朴慶洪 白聖淳 丁有燮 孫圭永 成炳達 朴容漢 南志寬 李義五 姜道龍 許  達
             鄭徹謨 安尙鎬 洪成憙 李在完 禹東臣 柳致兩 朴在益 崔元鳳 朴仍鎭 李秉燮 朴哲洙
             朴鍾琯 安孝千
鄕約長 丁海龍 鄕班首 朴興祚 鄕公員 鄭慶謨
儒道會支部長 安鍾九 副支部長 黃宇贊 丁福東

 

 

 

양산향교중건기문

梁山鄕校重建記文
西紀 一九八五年 이른 봄에 本郡에 到任하여 바로 文廟를 奉審하였더니 明倫堂은 이미 解體되어 있었고, 廟殿은 낡고 헐어서 보기에 悶然하고 悚懼한 마음 禁할 바 없었다.
내 일찍 들으니 梁山은 文鄕이라。自古로 郡守는 모두 文官으로 補職되었다 하기에 餘他郡의 鄕校에 比하여 많이 特異한 바 있으리라 여겼더니 오늘 비로소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環境의 荒涼함과 殿廡와 門樓 等 數多한 建物이 한결같이 荒廢되어 있으니 참으로 보기에 難堪한 處地였다. 그러나 한편 돌이켜 生覺하여 보면 비록 옛날에는 郡誌에 記錄되어 있는 바와 같이 멀리 壬亂 經亂時에는 身命의 安危를 不顧하고 賊寇의 釰戟을 헤쳐가며 護聖衛道한 蘇山 鄭先生이 계셨고、그 後 承承相繼하여 歷代 郡守 中에는 兵亂에 灰爐되었던 校宮을 復設하기에 勞苦하신 功績이며 또는 俸米를 義捐하여 隨毁隨補에 業績이 歷歷한 事實은 一一이 枚擧할 수 없고、又且 丁·柳 두 士人은 數千金 或은 數百金을 義捐하여 聖宮修繕을 請願한 事實 等은 참으로 文鄕다운 傳統이 아니고서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王朝가 물러간 지 이미 一世紀가 지났는지라、그 동안 星換物移하고 移風易俗하니 激流같은 時代의 흐름 앞에 누가 能히 沮止하리요。道義觀念은 날로 흐려지고 祖上傳來의 美風良俗은 비 갠 날에 안개 걷히듯 흔적 없이 사라지니 校宮인들 어찌 옛 모습 같으리요 대저 事物에는 盛衰와 興廢가 있는 理致니 이 모두가 氣數라 어찌하리요. 오늘 여기에 이와 같은 現狀을 보는 것이 實은 怪異한 일은 아니리라. 그러나 極하면 하는 것은 亦是 哲理。오늘날 우리 社會가 道義를 부르짖고 倫理를 强調하고 傳統文化를 繼承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官民이 同格이며 必然之勢니라. 그 原因을 追究해보면 오직 不增不減하고 不易不遷한 것은 우리의 血脈中에 分明히 天賦되어 있는 眞理니 즉 五常이요、良知良能이니라。 고기가물을 떠나서는 잠시라도 살 수 없듯이 사람 亦是 사람의 道理를 버리고서는 잠시라도 이가 營爲될 수 없을 것이니라. 이것이 곧 옛글에 이르는 바 聖人이 비록 親히 말씀하시지 않아도 百姓이 스스로 親하고 萬邦이 저절로 和平해진다는 것은 오로지 倫理秩序와 禮儀道德이 있다는 것이니라. 그 동안 회오리바람처럼 몰아닥친 世波에 밀려 잠시 잊었던 本性을 되찾으려고 애쓰는 것도 亦是 氣數가 돌아온 것이리라。方今 擧國的으로 國民道義 昻揚이며, 或은 正義社會 具顯이란 大口號를 외치며 大命題를 完遂하려고 애쓰고 있는 바이라。이러한 때에 地方鄕校의 使命을 다시 한번 再照明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내 梁山鄕校의 現況에 對하여 알아본즉 「前任郡守 安康植 先輩 亦是 나와 같은 生覺으로 文化財指定에 登錄되기에서부터 校宮面貌를 一新하려고 計劃을 하였으나 사정상 明倫堂이 毁屋된 채로 遞任되어 떠나니 後來者를 기다리노라。」하였다。나 亦是 不敏하나 一地方의 守郡者라。어찌 짐작하는 바 없으리요마는 대저 校宮은 民族文化의 傳統的 大殿堂이요、全人修養의 唯一的 大本源이라. 이를 깊이 想念하면 그대로 放置할 수 없는 切迫한 處地。이에 여러 가지 어려운 事情도 있었으나 萬難을 排除하고 今年 五月에 于先 大成殿과 神門을 重建 告訖하고, 이어 十二月에 明倫堂을 重建工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風詠樓를 移建할 것과 아울러 廟域을 造景淨化하며、垣墻을 改築 設計를 作成하였던 바이다. 如斯한 大役事는 校宮創建 以來로 일찍 없었던 일이며、廟域이 이렇게 淨化造景된 事例도 없었을 것이며、廟貌가 이렇게 一新된 적도 없었을 것이리라.
오직 바라건대 梁州의 士人들이여、奕奕한 先祖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 이 殿堂과 더불어 날로 새로이 하여 忠義롭고 孝誠스러우며、誠實하고 勤勉한 氣風이 振作되어、民俗이 熙熙하고 闔境이 總和하면 진실로 이 堂의 보람이며 梁民의 矜持로다。이에 重建의 顚末을 略述하고 나의 바램을 아울러 記하면서 特記할 것은 이 大役을 完遂하기까지 典校 金斗成甫와 鄕儒僉位의 至大한 勞苦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되리라。
丙寅 二月
郡守 李斗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