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향교와 뿌리

창녕향교 대성전 영역과 중수기 重修記

천부인권 2020. 3. 15. 11:07

 

2020.3.9. 창녕향교 내삼문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2020.3.9. 창녕향교 대성전 전경

 

창녕군 교리 440(향교길 54)은 옛 우리나라 전통 교육기관인 창녕향교昌寧鄕校가 위치한 곳으로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된 곳이다. 구글 지도의 좌표로는 「위도 35°32'51.9"N 경도 128°29'52.7"E」를 표시한다.
창녕향교를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1904년에 보수하고 1987년에 동·서재東·西齋를 복원하였다.
건물은 출입문인 외삼문外三門, 배움의 영역인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 사당祠堂인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西廡 등의 건물이 있으며, 명륜당의 왼편에는 관리사가 있다. 창녕향교의 건물배치는 배움의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뒤에 제례祭禮의 영역인 대성전大成殿이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49) 이후 학교의 기능은 잃고 제례祭禮만 지내고 있다.
창녕향교昌寧鄕校는 전체적으로 아담한 규모이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풍화루가 없고 대신 외삼문外三門이 규모가 큰 편이고 입구의 석축들이 폐사지廢寺址에서 가져온 석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혈들이 꽤 있어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대성전大成殿에도 정료대庭燎臺 또는 관세위대盥洗位臺로 사용하는 것 같은 묘하게 생긴 석물이 있다. 이 석물 역시 폐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 석물의 용도는 석전대제釋典大祭 때 집례執禮가 홀기笏記를 얹어 두고 홀笏을 부르는 대臺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창녕향교昌寧鄕校에는 나이가 많지 않은 나무들이 꽤있는 편인데 편백나무, 은행나무, 개잎갈나무, 눈향나무, 주목, 가이즈카향나무, 회향나무, 사철나무, 배롱나무, 매화나무 등 다양하게 식재되었지만 창녕향교을 알리 수 있는 딱 한그루의 나무는 대성전大成殿 왼편 화계花階에 있는 살구나무라고 감히 말한다. 이 살구나무가 꽃이 활짝 피면 전통건축과 어울려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리라 생각한다.

창녕향교 대성전大成殿 편액

 

大成殿重修記
後漢鍾难意 爲魯相出私錢萬三千修 夫子車夫子敎授堂懸甕 有素書曰 後世修吾書者董仲舒護吾車者鍾離意 盖修書護車均之 爲夫子役而必先董 而後鍾者書 爲大道之所載車 爲遺澤之所 存固自有次第哉 歲癸丑二月日 本郡聖殿火 錫八聞不覺聲 淚伹作信乎 新宮火三日哭之禮 宲綠人情而有制也 即馳往在視灰燼形止 謁聖於倫堂権奉之所 遂簇文鄕紳各家入 告郡長語以改築之是急 郡長曰事當報于 道長而後可旣 而郡長曰 自道長報于 總府總府捐金千五百已來 府令曰當修繕倫 當奉安位 版不可改築聖殿云 余駁之曰 倫堂雖大 東西廡諸位 難容并設 且校任與春秋亨 諸執事居宿無所 昌大府也 其在崇奉之義 豈容苟簡改築一款 余雖受錢公之箭 有不欲改 則此捐金不可受也 自是郡警兩廳只知 有府道之令 而鄕議亦或枘鏧同 余議者僅盧啓洪成瑾鎬金性東三人 而己相持五朔竟不帰一不獲已長書于 総府居無何附許牒到于 道郡日道長來郡 爲査問計 吾同議者四人 往焉道長曰 建築費金可幾 何余曰當萬五千曰 材厇価額 各工手料可幾 何余曰又一一條 對與萬五千準曰 此金淀何 而出余曰吾同議者 四人當揑負矣 三人曰吾三人則力 有所不能道長 怒我曰是必有私意於其間攽証岡之爲乎 余笑曰吾豈不知三人之無其力哉 旣同其議 則雖吾獨担 亦四人担也 道長曰當以此意成書捺卬可也 余即從之又曰 其或門排戶歛 或私自役民 則有律此意 亦成書捺亏可也 余又即淀之道長 乃噴噴曰 公誠心真不可奪也 授二冊子曰 建築費唐詳悉記載遂月勘正于 郡警云矣 遂鳩材募工就舊址 而經紀之有隣郡章甫用 若干金來曰 吾亦夫子敎化中一物 有事夫子廟攽 以此爲助余告于 郡警警警招章甫 詰之章甫正色對如語 余者郡警義 兩許之於 是各門各人稍稍有效之者 乃不日而功告訖 噫是役也 不知者或猥推錫八 以鍾公之功 雖鍾猶當有遜於修書之董況 有三人之同議 及章甫各門各人之助 則又何攽以鍾公而自專乎 易曰勞謙君子 有終吉吾夫子贊之曰 勞而不伐有功 而不德厚之至也 語以其功下人者也 錫八之爲此記也 非攽德吾功宲志 吾愧也 嗟夫今之世夫子書雖存而修之者 盖冪彼嶷然之殿宇 何足以盡尊 夫子之道乎 此則不能不有望於吾一鄕 明達識理之君子也
殿成後十六年己巳黃梅節
後學昌寧 曺錫八 謹記

 

대성전중수기(大成殿重修記)

후한(後漢)의 종리의(鍾離意)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때 사재 13천 전()을 내어 공자(孔子)의 수레와 강학하시던 집을 수리하였습니다. 그때 (집에) 걸려 있던 항아리에서 오래된 글이 나왔는데, 이르기를 후세에 나의 책을 수리할 자는 동중서(董仲舒), 나의 수레를 보호할 자는 종리의(鍾離意).”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책을 수리하는 것과 수레를 보호하는 것은 똑같이 부자(夫子, 공자)를 위한 일이지만, 반드시 동중서를 먼저 말하고 종리의를 뒤에 말하는 것은, 책은 위대한 도()가 실린 것이고 수레는 남기신 자취가 깃든 것이니 본래부터 차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계축년(癸丑年;1913) 2월 어느 날, 우리 고을의 성전(聖殿, 대성전)에 불이 났습니다. 저 석팔(錫八)은 그 소식을 듣고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눈물을 흘렸으니, 참으로 옛글에 '새 궁궐에 불이 나면 사흘을 곡()한다'는 예법이 사람의 마음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실감하였습니다. 즉시 달려가 보니 재만 남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명륜당(明倫堂)에 임시로 위패를 모신 곳에 가서 성인께 아뢰고, 마침내 향교의 여러 어른들과 각 가문을 찾아가 군수(郡守)에게 고하여 개축(改築)이 시급함을 아뢰었습니다.

군수가 말하기를, “이 일은 마땅히 관찰사(觀察使)께 보고한 뒤에야 가능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군수가 말하기를, “관찰사를 통해 총독부(總督府)에 보고하였더니, 총독부에서 15백 냥의 돈을 보내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의 명령은 명륜당을 수리하여 위패를 모시되, 성전은 개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를 반박하며 말하기를, “명륜당이 비록 크다 하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의 여러 위패들을 모두 모시기에는 어렵습니다. 또한 교임(校任)과 봄가을 제사를 지내는 여러 집사(執事)들이 머물 곳도 없습니다. 이곳은 위대한 관청인데, 성현을 받드는 의리에 어찌 이리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개축 한 가지에 대해 말하자면, 제가 비록 높은 벼슬아치의 위협을 받을지라도, 만약 개축을 원치 않으신다면 이 기부금은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군()과 경찰서(警察署) 양 관청은 오직 부()와 도()의 명령만 따랐고, 향교의 여론 또한 서로 맞지 않아 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겨우 노계홍(盧啓洪), 성근호(成瑾鎬), 김성동(金性東)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서로 버티기를 다섯 달, 끝내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부득이하게 총독부에 장문의 편지를 보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허가한다는 공문이 도()와 군()에 도착하였습니다.

하루는 관찰사가 군에 와서 조사를 하게 되어, 저와 뜻을 같이한 네 사람이 찾아갔습니다. 관찰사가 묻기를, “건축 비용은 얼마나 들겠소?” 하기에 제가 답하기를, “마땅히 15천 냥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 “재목의 가격과 각 공인들의 품삯은 얼마나 되겠소?” 하기에 제가 또 하나하나 항목별로 답하여 15천 냥에 맞추었습니다. 또 묻기를, “이 돈은 어디서 나오게 할 것이오?” 하기에 제가 답하기를, “저와 뜻을 같이한 네 사람이 힘을 합쳐 부담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세 사람이 말하기를, “저희 세 사람은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찰사가 저에게 노하여 말하기를, “필시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이 있는 것이 아니오? 무엇을 증명하려고 이러는 것이오?” 하였습니다. 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제가 어찌 세 분에게 그럴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뜻을 같이했으니 비록 저 혼자 짊어지더라도 이는 네 사람이 함께 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찰사가 말하기를, “이 뜻을 글로 써서 도장을 찍으시오.” 하기에 제가 즉시 따랐습니다. 또 말하기를, “만약 집집마다 돈을 걷거나 사사로이 백성을 부역시키는 일이 있다면 법률에 따라 처벌될 것이니, 이 뜻 또한 글로 써서 도장을 찍으시오.” 하기에 제가 또 즉시 따랐습니다.

그러자 관찰사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공의 정성스러운 마음은 참으로 빼앗을 수가 없구려.” 하며 책자 두 권을 주며 말하기를, “건축 비용을 상세히 기록하여 매달 군과 경찰서의 검사를 받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재목을 모으고 인부를 모집하여 옛터에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웃 고을의 한 유생(儒生)이 약간의 돈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저 또한 공자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공자님의 사당에 일이 있다 하니 이것으로나마 돕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를 군과 경찰서에 알리니, 경찰서에서 그 유생을 불러 심문하였습니다. 유생은 정색하며 저에게 말했던 것과 같이 대답하였고, 군과 경찰서는 이를 의롭게 여겨 모두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가문과 여러 사람들이 조금씩 그를 본받기 시작하여, 마침내 오래지 않아 공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 이 공역(工役)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혹 저 석팔을 종리의의 공()에 멋대로 비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종리의조차 책을 수리한 동중서에게는 마땅히 겸양해야 할진대, 하물며 세 분의 동의와 이웃 고을 유생, 그리고 여러 가문과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음에랴! 그러니 또 어찌 종리의의 공을 내세워 저 혼자 오롯이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수고하고도 겸손한 군자는 마침내 길()함이 있다.’고 하였고, 우리 부자(공자)께서도 이를 찬미하여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이 있어도 그 덕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지극히 두터운 것이다. 이는 자신의 공을 다른 사람보다 아래에 두는 것을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저 석팔이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은 저의 공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저의 부끄러움을 기록하고자 함입니다.

, 슬프도다! 지금 세상에 공자님의 책은 비록 남아있으나 이를 수리하는 자는 드무니, 저 우뚝 솟은 전각을 세운들 어찌 공자님의 도()를 다 존숭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우리 고을의 사리에 밝고 이치를 아는 군자들에게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각을 이룬 지 16년이 지난 기사년(己巳年) 황매절(黃梅節), 후학(後學) 창녕(昌寧) 조석팔(曺錫八)이 삼가 기록하다.

 

 

大成殿重修記
盖北郡設 校盛行俎豆之禮者 非直謂名物 器數之粲 然備具而已使 其四方秀艾 鼓笥踵堂閑閑秋秋 一以洙泗模範 效窃模倣 而皆可與齊魯質行 庶其擬焉 上有好者 下必有甚 焉亞聖所訓 而惟我列聖朝 尊祀文廟 崇獎聖學 陶甄士類 扶植正導 文風於是乎 丕振治具 與三代比 隆而五百餘年 基業正脉 其在斯歟 余驪興人也 是歲春恩命 自安陰移于 是郡其於 爲政齡蕞識短 且局格生疎只 是應文備數已 尊敬先聖 素乏羹墻 然春秋合奠 朔望炷香 卽守宰之責 依例奉行 而慮有風雨之傷 審省殿宇 則原位正間 泥水浸壁 幾及韜籍 毁瓦汙墁漏痕已甚惕 然之心油 然自發深思修繕之方 捐補千金 卽日就事 以鄕人成瑾鎬監 其役乃用民力 亦有子來之應 莫非聖化所感 一心董功少 有日完矣 鳴呼物無終完 而不毁終毁 而不完者不可專 以氣數付之而叅 以人事觀之 則此幷行 而不相悖也 校宇崇設之道 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 則其完而無毁亦庶幾焉
光武九年乙巳季秋下澣知郡閔丙吉謹識
                    監役有司成瑾鎬
                        掌議成樂淳
                            楊粲奎

 

대성전중수기 大成殿重修記
대개 매每 군郡마다 향교鄕校를 설치設置하여 조두俎豆¹⁾의 예禮를 성대하게 거행하는 것은 다만 명물이나 그릇의 숫자만 찬란하게 갖출 뿐만이 아니고 그 사방의 어린 수재秀才들로 하여금 고사鼓笥²⁾하여 명륜당明倫堂에 발길이 모이게 하여 한한閑閑 하고 추추秋秋 하여 한편으로 수사洙泗의 모범으로서 본받아 가만히 사모하고 모방하여 모두가 가히 제齊나라 노魯나라와 더불어 바르게 행하면 거의 그에 비교가 되리라.
위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래에 반드시 지나침이 있음은 아성亞聖³⁾께서 가르친 바인데 오직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문묘에 높이 제사를 모시고 성학聖學을 높이 장려하며 사류士類들을 도견陶甄⁴⁾하여 정도를 부축하여 세우니, 그제야 다스리는 도구道具가 크게 진작振作하여 삼대三代⁵⁾와 더불어 비교되도록 융성하였으니 오백여년의 기업基業의 바른 맥락脈絡이 그야말로 여기에 있으리라.
나는 여흥인驪興人이다. 이 해의 봄에 聖恩의 명命하심으로 안음安陰(산청)으로부터 이 군郡으로 옮겼으니 그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나이는 적고 식견도 짧은데 또한 국량局量이나 격조에도 생소生疎하여 다만 이렇게 문장에 응하여 숫자만 구비하였을 뿐이고 선성先聖을 존경함은 본래 갱장羹墻⁶⁾보고 사모함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봄과 가을에 합동으로 제전祭奠을 올림과 초하루와 보름에 향불을 피움은 수재守宰(고을 원님)의 책임이라 예例에 의거하여 봉행하였으니 비바람에 손상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대성전을 살펴보았더니 원위原位의 정간正間에 진흙물이 벽에 침입하여 거의 도자韜籍⁷⁾에 까지 미치고 기와도 훼손되어 벽이 더렵혀져 샌 흔적이 이미 심하여 두려운 마음이 뭉게뭉게 저절로 발생하였다.
깊이 수선할 방법을 생각하여 천금千金을 들어내어 돕고 즉일卽日에 일을 시작하여 향인鄕人 성근호成瑾鎬로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여 이에 백성들의 힘을 이용하였더니 역시 자식이 아버지의 일에 달려오듯이 호응呼應함이 있었으니 모두가 성현의 교화에 감응한 바가 아님이 없었으며 하나같은 마음으로 공功을 독려督勵하여 적은 일자日字에 완성함이 있었다. 아! 만물은 끝까지 완전하여 훼상毁傷되지 않음도 없고 끝까지 훼상되어 완전하지 않음도 없는 것은 가히 오로지 기운이나 운수에만 붙임은 옳지 않으며 인사人事를 참작參酌 하여 본다면 이것은 아울러 행함이고 서로 어긋남이 아니다.
향교의 묘우를 높이 설치하는 도는 후일後日에 금일今日을 봄이 역시 금일今日에 석일昔日⁸⁾을 봄과 같다면 그 완전하여 훼상함이 없음도 역시 거의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광무9년 을사乙巳(1905)년 9월 하한에 군수 민병길閔丙吉 삼가 기록함.
                               감역유사 성근호成瑾鎬
                                   장의 성악순成樂淳
                                        양찬규楊粲奎

 

【주석】
조두俎豆¹⁾ : 제사 때, 음식을 담는 그릇의 하나.
고사鼓笥²⁾ : 북을 처서 학생을 모으고 상자를 열어 책을 꺼낸다는 뜻.
아성亞聖³⁾ : 안연顏淵이나 맹자孟子와 같은 성인을 말함.
도견陶甄⁴⁾ :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림. 조화造化가 만물을 화성化成함.
삼대三代⁵⁾ : 하夏•은殷•주周 세 나라를 말함.
갱장羹墻⁶⁾ : 갱장(羹牆)은 국과 담장으로, 고인(故人)을 추모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성현(聖賢)이나 선조(先祖)를 추모하는 뜻으로 쓰인다.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날 요 임금이 붕어한 뒤 순 임금이 3년 동안 요 임금을 앙모한 나머지, 자리에 앉으면 요 임금이 담장에 보이고, 밥을 먹으면 요 임금이 국그릇 속에 보였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牆, 食則睹堯於羹.]”라고 한 고사이다.
도자韜籍⁷⁾ : 신주神主를 씌우는 집
석일昔日⁸⁾ : 옛 날

 

 

文廟重建記
於乎天其欲喪斯文乎哉 癸丑春回祿告災禍及文廟 事出暮夜蒼皇急遽僅 救位板幷祭器 其餘棟宇瓦甍已灰燼掃蕩矣 天日無光士民相弔是何變也 於是乎同志人士汲汲 收議捐義鳩醵浮屠合尖思所  以新之舊制大成殿內設東西廡廟貌甚壯麗矣 斯今之役 則實無麵之托也 不得仍舊貫 而迺易其制度殿與廡三分焉經始于 秋告成于冬明年 春還安五聖于 殿內宋賢以下列兩廡 其規模位置 前後殊觀而其制 則實一邦通行之例也 巍巍當座萬人瞻仰廡幾 斯文之墜而復昇耶 猗歟盛哉 或者曰聖學之不講尙矣 春秋二亨亦隨 而存羊世變 以來儀節淘汰 犧牲不費 先聖先賢 固已不欹久矣 況乎 宮墻㥘灰一經震撞 陞降之靈 其不眷戀也必矣 子應之曰 不然雖有惡人 齋戒沐浴 則可以祀上帝迨 此廟宇重新之日講明乎 賢聖之道崇蠲乎 俎豆之筵心 誠求之雖 不中不遠矣 況天之未喪斯文也 孔聖豈欺我哉 盍胥與勉之落成之日承僉 君子之命 而爲之記
關逢攝提仲春下瀚 鄕後學成瑾鎬謹撰
任司錄
成造都監 金奎華
      都檢 盧啓洪
   會計員 成瑾鎬 曺錫八
      監役 金性東 盧鶴容
義捐金
右各三百兩
盧啓洪 成璨永 成瑾鎬 金〇東 孔載都 金性東 盧鶴容 曺錫八 盧湊學 孔錫顓 成敦鎬 楊址煥 陳東旭 孔錫圭 金秉灝 孔泰永 盧莊容 孫炳英 朴鍾吉 卞斗星 曺柄庸
李炳珉 一百五十兩
右各一百兩
崔炳翰 丁淑爕 文在元 成元鎬 河一秉 徐炳斗 成鳳庠 河泰奭 許遇 朴曾彦 朴炳縞 石大寬
右各六十兩
陳德奎 孔錫英
右各五十兩
曺赫範 孔鉉東 金在範 黃賢柱 成信鎬 朴芝林 楊鍾晦 金敎源 許珠 文鍾煥 石大有 朴永勳 金敎文 崔承敎 成達永 金祥基 金淸愚 黃炳雲 金鏞大 金敎熙 崔憐述 徐丙晳 許延
尹正鎭 四十兩
曺泰承 二十五兩
右各二十兩
盧秀憲 宋鎭欀 石炳杓 河慶崑
右各十兩
張柄大 文虎成 成璣雲
文尙成 五兩
文承纘 二兩

 

문묘중건기
아! 하늘이 사문斯文(儒學)을 죽이고자 할까? 계축년(1913) 봄에 회록回祿(火災)의 재화災禍가 문묘文廟에 미치게 되었다고 보고하였으니 사건이 저문 밤에 출발하였으니 너무 급하여 어찌할 길이 없었으며 겨우 위판位板과 아울러 제기祭器만 구원하였으나 그 나머지 동우棟宇와 기와나 용마루는 이미 송두리째 타버렸다.
하늘의 해가 빛이 없으니 사민士民들이 서로 위로하였으나 이것이 무슨 변고變故일까? 그제야 동지同志의 인사들이 서둘러 수의收議¹⁾하여 의연금義捐金²⁾을 모우고 부도浮屠³⁾도 합하여 첨예尖銳하게 갹출醵出하여 새롭게 하기로 생각하였으니 옛날의 제도는 대성전 안에 동서무東西廡를 설치하여 사당祠堂의 모습이 매우 장려壯麗하였다.
이제 지금의 역사役事는 실재로 면자麪子⁴⁾도 없는 부탁이어서 옛날의 관행貫行을 따름에 얻을 수 없어 이에 그 제도를 바꾸어 대성전大成殿과 그리고 동서무東西廡를 셋을 나누어서 가을에 경영을 시작하여 겨울에 완성을 고告하였고 명년明年 봄에 오성五聖⁵⁾을 대성전 안에 본안奉安하여 돌아왔고 송현宋賢⁶⁾ 이하는 양무兩廡에 배열配列하였으니 그 규모와 위치는 전후로 경관景觀이 달랐으나 그 제도는 실재로 한 나라에서 통용하여 시행하는 예例이었다.
높고 크고 웅장함은 마땅히 만인萬人이 우러러 보겠으니 거의 사문斯文이 실추하였다가 다시 승격昇格함일까? 거룩하고 성대하구려!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성학聖學을 강론하지 않음은 일찍부터 이였고 봄가을 두 차례 향례도 역시 따라서 존양存羊⁷⁾을 하니 세상이 변한 이래로 의절儀節이 도태淘汰되고 희생犧牲⁸⁾은 허비되지 않았으니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에게 이미 아름답지 않았음이 오래되었거든 하물며 교궁과 원장이 잿더미에 겁박함을 한번 거치며 진동하여 부딪쳤으니 올라가고 내려오시는 영혼이 그야말로 권련眷戀⁹⁾함이 틀림없으리라.』라고 하기에 내가 대응對應하며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비록 악인惡人이 있더라도 재계齋戒하고 목욕한다면 가히 상제上帝에게 제사祭祀를 모실 수 있나니 이렇게 묘우廟宇를 새롭게 하는 날에 미쳐서 성현의 도道를 강론하여 밝히고 조두俎豆¹⁰⁾의 자리를 숭상하여 밝히면서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여 구한다면 비록 적중敵中에서 어찌 나를 속이랴. 어찌하여 서로 더불어 구하지 않으랴.
낙성落成하던 날 여러 군자君子들의 명命함을 받들어 기문記文을 지었노라.
알봉閼蓬(甲) 섭제격攝提格(寅) 갑인甲寅(1914) 중춘仲春 하한下澣에 향리의 후학 성근호成瑾鎬 삼가 찬양하여 기록함.
임사록任司錄
성조도감 김규화
    도검 노계홍
  회계원 성근호 조석팔
    감역 김성동 노학용
의연금義捐金
우각삼백량右各三百兩 우측에 기록한 분들은 각각 300량을 냄.
노계홍 성찬영 성근호 김〇동 공재도 金성동 노학용 조석팔 노주학 공석전 성돈호 양지환 진동욱 공석규 김병호 공태영 로장용 손병영 박종길 변두성 조병용
이병민 일백오십량一百五十兩
우각일백량右各一百兩
최병한 정숙섭 문재원 성원호 하일병 서병두 성봉상 하태석 허우 박증언 박병호 석대관
우각륙십량右各六十兩
진덕규 공석영
우각오십량右各五十兩
조혁범 공현동 김재범 황현주 성신호 박지림 양종회 김교원 허주 문종환 석대유 박영훈 김교문 최승교 성달영 김상기 김청우 황병운 김용大 김교희 최연술 서병석 허연
윤정진 사십량四十兩
조태승 이십오량二十五兩
우각이십량右各二十兩
로수헌 송진양 석병표 하경곤
우각십량右各十兩
장병대 문호성 성기운
문상성 오량五兩
문승찬 이량二兩

 

【주석】
수의收議¹⁾ : 의견을 두루 거두어들임
의연금義捐金²⁾ : 자선이나 공익을 위하여 내는 기부금
부도浮屠³⁾ : 부처, 절
면자麪子⁴⁾ : 국수
오성五聖⁵⁾ : 다섯 성인을 이르는 말로 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말한다.
송현宋賢⁶⁾ : 송조宋朝의 명현名賢
존양存羊⁷⁾ : 현재에는 행하지 않으나 옛적에 하던 형식 목적을 버리지 않고 그냥 두는 것.
희생犧牲⁸⁾ :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쓰는 살아 있는 소. 색이 순수한 소를 ‘희(犧)’라 하고 길함을 얻지 못해 죽이는 것을 ‘생(牲)’이라 한다.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이나 재물, 또는 권리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 <다음백과-고사성어대사전>
권련眷戀⁹⁾ : 간절히 생각하며 그리워함
조두俎豆¹⁰⁾ : 조두(俎豆)는 제사를 지내는 그릇의 한 종류이다. 널리 쓰이는 뜻은 제사(祭祀)를 뜻한다. 

 

살구나무와 대성전 풍경

집례執禮의 홀기대笏記臺

창녕향교 평면도

창녕향교 대성전 앞 동무東廡 

창녕향교 대성전 앞 서무西廡

 

출처 및 참고
창녕향교지

문화재청-창녕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