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향교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24호
산청군 산청읍 지리 369-1
산청향교(山淸鄕校)는 1440년(세종 22)에 세워진 이래 임진·병자 두 전란을 겪으면서 불탄 것을 1755년(영조 31)에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이 지역의 문화 발상지이며, 인재양성의 기관으로 자리하여 왔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5칸의 동재(東齋), 7칸의 명륜당, 4칸의 욕기루(浴沂樓), 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유물로는 와준(窩樽) 1개, 주배(酒杯) 3개, 제구(祭具) 일체, 변두(籩豆) 일체, 유복(儒服), 예구(禮具) 등이 보관되어 있다. 전교(典校) 1명과 6부 장의(掌議)가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홍살문과 산청향교의 수호신 은행나무 노거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다라는 뜻을 지닌 욕기루 편액
[原文]
大成殿重修記
校宮舊在縣治之北數里許 移建于玆盖亦有年 而舊無記不可詳焉 余治玆縣之越三年冬治 新道于縣治之前塞大路之在 校宮後麓從士林願也 粤明年春旣新廨宇進多士 而諗之曰吾 夫子享祀之所 棟嶊樑折瓦毁堊 墮雨雨風風甚非敬重意也 責實在守士 而於多士亦何如多士曰 唯唯以事 聞香祝自京師至於 是鳩財 略干摧折者易之毁墮者 新之疏水道使無停 溜繕墻坦使無缺壤 前樓之舊無號 者使孫勇書而額之其位 維舊其制咸新始事 則在六月甲戌而迄功于 七月乙卯凡得日一月二旬有奇 而終始董役者 掌議朴孝百禹錫龜 齋有司崔見龍閔百孝 都監吳鴻運閔道周也 旣落多士請 余爲記余復執爵 而諗之日竊惟設學宮所 以敬祀先師也 敬祀先師所 以作興多士也 夫長拱徐趨峩冠傳帶之士 登斯堂而修藏游息者 其所明則君君臣臣子子夫夫婦婦五倫之序也 所學則禮樂射御書數六藝之文也 所行則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術也 此爲學之疏節 而袁州學記所以 以敦忠孝爲本邀利達爲戒自也 且吾嘗聞玆顯 以山水之鄕淳之 會稽之勝 鴻匠碩儒 往往出於 其間不滅 江表前輩則何吉所云 而今不然耶方 今聖明在上文敎丕闡 笙鏞之化囿乎八域 絃訟之聲濫於四方 則此正多士砥礪琢磨 爭自待興之會也 玆因校宮重修之日敢勉古鏡重磨之義 多士其勉乎哉 勉乎哉
崇禎紀元後三丁卯仲秋下澣
知顯東萊 鄭有淳 記
[해문]
대성전중수기
산청향교가 옛 날에는 고을 관아 북쪽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여기로 옮겼다. 옮긴지 오래 되었으나 옛날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상세히 알 수 없다.
내가 이 고을엣 와서 다스린지 3년이 지난겨울에 관아 앞에 새 길을 만드는데 향교 뒤 큰 길을 막은 것은 사림(士林)에 뜻을 쫒은 것이다.
다음 해 봄에 관아를 이미 지어 놓고 선비들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우리 부자(孔子)의 향사를 올리는 곳이 기둥과 들보가 부러지고 기와와 벽이 무너져 비가오고 바람이 몰아치게 되면 공경하고 중대하게 여기는 뜻이 아니니 책임을 실재 수토자(守士者:고을 원)에게만 있고 유림에는 없습니까?”하니 선비들이 옳다하거늘 이 일을 조정에 알리니 향축(香祝)비가 서울에서 내려오니 이에 약간의 재정을 모아서 부러진 것을 바꾸고 무너진 것을 새로 하고 수도(水道:도랑)를 넓혀서 막힘이 없도록 하고, 원장을 수리해서 붕괴됨이 없도록 하여 전날 누각에 이름이 없던 것을 손용(孫勇)을 시켜서 써서 현판을 만들어 걸으니 그 모습이 옛스러워 보이고 그 제도가 모두 새로워졌다.
일 시작하기를 6월 갑술일이고 7월 을묘일에 공사를 마치었으니 날짜가 한 달 20일 걸렸다. 시종 일을 감독한 자는 장의(掌議) 박효백(朴孝百), 우석구(禹錫龜)이고 재유사(齋有司)는 최현룡(崔見龍), 민백효(閔百孝)이며 도감은 오홍운(吳鴻運), 민도주(閔道周)이다.
낙성식을 하고 선비들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 하거늘 내가 다시 잔을 들고 말하기를 조용히 생각하니 향교를 건설한 것은 선사(先師)를 공경히 제사지내는 것이고 선사(先師)를 공경히 제사지내는 것은 선비를 많이 양성하는 것이다. 무릇 장공(長拱:긴 옷 소매) 서추(徐趨:정주한 걸음)와 높은 갓을 쓰고 큰 띠를 두른 선비들이 이 당(堂)에 올라와서 공부하고 거처하면서 밝히고자 함이 있으니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를, 아들은 아들의 도리를, 남편은 남편의 도리를, 아내는 아내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오륜(五倫)의 순서이고 배우자 하는 것은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여섯가지 글이고 행하고자 하는 것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하는 술법이니 이것은 학문하는 소절(疏節)이니 원주학(袁州學)이 말한 충효를 도타이 하는 것이 근본이 되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또 내가 일찍이 들으니 이 고을은 산수(山水)가 아름다운 고을이라 하는데 하물며 회계산(會稽山)에 명승지로 큰 문장과 선비가 가끔 그 사이에 배출해서 강표(江表)에서 전배(前輩)가 멸하지 않는다고 하니 어찌 옛날에는 그러하고 지금은 그러하지 않는가.
지금 착한 임금이 위에 있고 문교(文敎:학문)가 크게 열려서 생용(笙鏞:태평성대) 문화가 팔역(八域)에 둘러싸이고 글 읽는 소리가 사방에 넘치게 되면 이것은 정(正)히 많은 선비들이 갈고 닦아 다투어가며 스스로 모임이 될 것이다. 이 향교 중수하는 날로 인하여 거울을 거듭 연마하는 뜻을 용감히 힘쓸 것이니 선비들은 힘쓰고 힘쓸지어다.
숭정기원후 삼정묘(1807) 8월 하순에
동래부사 정유순(鄭有淳) 기록하다.
[原文]
明倫堂重修記
在昔先王設 爲庠序學校內自太學 外室州府郡縣 皆立文廟有學 斯有官所 以置敎授訓導之職 而申之以孝悌之義敎化行於上 人倫明於下衣冠文物 號稱小中華 世級漸降幾不興 行敎選之制學官之職廢不復擧 黌堂學舍久不聞絃訟之聲 其所以誘掖激礪漸磨成就之道 職在守土而守土官之能盡 其職者或其焉 則其聚士子試功令 特存羊而已矧乎挽近 以來世變無窮異流橫流靡哲不愚載胥及溺 安悔先生春艸無人之句不幸 而近之矣 適前知郡金公翰植 以慶州世家來守 是邦首先祗 謁聖廟俯仰咨 嗟周視倫堂脊樑之傾 側深柱大懼不支 逎諗于衆曰 是吾事也 不可以緩與一方 有志紳士 講究財政 捐義扶成有若神助者焉 遂以今年七月 始事瓦礎之 外材木盡掇舊從新 不煩輪運 不奪幾時 而不數月 而輪奐增采 以及正殿丹雘之漫漶者 而次第改觀落 而成之於 是郡人士庶莫不歡悅 僉曰 我公之來 知所先務 學校斯興 繼自今庶幾 矯風化俗本於 人倫明乎 物理丕燮 一路趨向 而不負先王 作養之至意 則不可亦無記也 直員金君性在與有賢勞 而以僉意命文於致亮 顧惟病廢 朽物何敢當 是奇屢辭終 不獲謹叙如右
辛酉重光作噩中秋下浣
驪江 閔致亮 謹書
[해문]
명륜당중수기
옛날 선왕 때에 상(庠:주나라의 교육기관)과 서(序:은나라의 교육기관)라는 학교를 설치했으니 안으로 태학(太學:지금의 대학)으로부터 밖으로 주부(州府“큰 고을)나 군현(郡縣:작은 고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문묘(文廟:향교)를 세워서 배우도록 했으니 이것은 관가에서 교수(敎授)와 훈도(訓導)의 직책을 두어서 효제(孝悌)하는 의리를 가르쳤으니 교화(敎化:교육)가 위에 행해지고 인륜(人倫)이 아래에서 밝게 되니 의관과 문물이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렀다.
세상의 수준이 점점 강하되어 거의 시행하지 아니하니 교육제도와 학관(學官:교수와 훈도)의 직책이 폐지되어 거행하지 않으니 횡당(黌堂:서당)이나 학사(學舍:글방)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지 못한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가르치고 격려하고 탁마(琢磨)와 성취하는 도는 책임이 수토관(水土官:고을 원)에게 있는데 수토관이 능히 그 직분을 다하는 자 혹 있다면 선비들을 모아 놓고 자격을 시험하거나 특히 제사지내는 것뿐이었으니 하물며 근대에 와서는 세상이 자꾸 변해서 이류(異流:이단)와 횡류(橫流)가 착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아 서로 서로 빠져들었으니 안회헌(安晦軒:이름 珦, 시호 文成) 선생이 말한 “향교에 봄풀만 무성하고 찾아오는 사람 없어 정막하도다.(滿庭秋草寂無人)” 하는 구절이 불행하게도 가깝도다.
마침 전 군수 김한식(金翰植)은 훌륭한 경주김씨로 이 고을 원으로 와서 먼저 성묘(聖廟)를 배알하고 아래 위를 보며 탄식하며 명륜당을 둘러보니 들보가 기울어져 기둥이 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며 대중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할 일이니 늦출 수 없다.”하고 지방유지 신사들과 더불어 재정을 강구하니 의연금 모아지는 것이 귀신이 돕는 듯 했으니 드디어 금년 7월에 일을 시작해서 기와나 주춧돌 이외에는 모두 옛것은 버리고 새것을 쓰는데 운반을 번거롭지 않게 하고 농번기를 빼앗지 아니하니 몇 달 안 되어서 날아갈 듯 채색을 더하고 정전(正殿)에 단청이 벗어진 것도 차례로 도색을 해서 완건 했으니 이에 군내에 인사(人士)들이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 공이 와서 먼저 힘쓸 바를 알아서 학교를 일으키고 계속해서 지금부터 풍속을 바로잡고 인륜을 근본으로 하고 물리(物理)를 밝혀 크게 변해 한 길로 향해서 선왕(先王)의 작양(作養:인재양성)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되면 기록하지 아니할 수 없다.
직원(直員:典校) 김성재(金性在)가 참예해서 노력을 많이 했는데 여러분의 뜻으로 나 치량(致亮)에게 글을 지으라하니 스스로 돌아보니 병들고 늙은 물건이 어찌 감히 이 부탁을 감당하리오. 누차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할 수 없어서 삼가 위와 같이 서술하노라.
신유(1921)년 8월 하순에
여강 민치량(驪江 閔致亮)이 삼가 서하노라.
[原文]
山淸鄕校 明倫堂重修記
明倫堂者何爲而作也曰 將以坐斯堂 而明彛倫者也 何謂之彛倫也 夫君臣父子夫婦朋友兄弟五者 此民彛之所具 而天倫之所叙也 秩秩乎章章乎本然具備 又何事乎明之有也 嗚呼 人類之生久矣 物欲之蔽衆矣 異端邪說 又從以害之者 莫今時若焉 叙之理或幾乎 息矣民彛之則蔑得以正矣 明倫之事於是乎急急矣 余以不才忝土 祗謁先聖 卽見廟貌荒廢堂宇 陊圮將無以奉俎豆 而理絃頌與二三君子 咨歎 有黃進士景鐸者 慨然損金而籌改之毁者 新之敗者易之浴沂樓 則重建之大成倫堂 則修葺之於是乎 輪奐改觀墠宇 復整縫掖之流 相與蹈舞 而慶賀曰 自今以豆於 是絃誦於 是藏修遊息於 是殆庶幾乎 夫子之道矣 余亦聞而興起曰 胥敎詔傚無負 斯堂命名之義 則其天叙有典勑 我五典天秩有禮 自我五禮惇典庸禮之 與諸君子者 其敢不勉之哉 其敢不勉之哉
辛巳十二月上旬
知縣 任悳準 撰
監董有司 李顔希
掌議 吳昺浩
姜趾箕
[해문]
산청향교 명륜당중수기
명륜당은 무엇 때문에 지었는가? 대답하기를 “장차 이 당(堂)에 앉아서 떳떳한 인륜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떳떳한 인륜이라 하는가? “무릇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붕우(朋友), 형제(兄弟) 이 다섯 가지는 백성들이 떳떳하게 갖출바고 천륜을 펼 바이다. 질서 정연하게 근본을 구비하는 것이다. 또 무엇 때문에 발 하는가.
아! 인류가 태어난 것이 오래 되었고 물욕이 덮인 것이 많으니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이 또 방해하기를 지금보다 더 심함이 없으니 하늘이 펼치는 이치가 거의 종식되고 백성들의 떳떳한 이치가 바름이 없어졌으니 인륜이 이에 급급하게 되었다.
내가 재주가 없는데 이 지역 군수로 선성(先聲:공자 사당)을 배알하고 곧 사당을 보니 모습이 황폐하고 명륜당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장차 제사를 받들고 학문을 익힐 수 없게 되어서 두서너 분의 군자(君子)와 탄식을 하는데 다행하게도 진사 황경탁(黃景鐸)이란 분이 비분강개해서 존을 내어 개수(改修)하기를 “계획해서 훼손된 것을 새롭게 하고 부패된 것을 바꾸고 욕기루(浴沂樓)를 중건하고 대성전과 명륜당을 수리하니 이에 아름답게 경관이 달라지고 제사 지내는 곳을 다시 바로 잡아 선비들이 서로 더불어 춤추며 축하하기를 지금부터 앞으로는 여기서 제사 지내고 여기서 글 읽고 여기서 수신하고 휴식할 수 있으니 자못 부자(夫子:공자)의 도가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도다 하거늘 내가 듣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서로 가르치고 서로 본받아서 이 명륜당에 뜻을 저버림이 없게 되며 하늘이 펼치는 법이 있고 나에게 오전(五典:오륜)을 경계하고 하늘이 마련한 질서와 예절이 있고 내가 오례(五禮)를 지켜서 떳떳한 예절을 도타이 하게 되면 내가 모든 군자와 더불어 감히 힘쓰지 아니 하리오. 감히 힘쓰지 아니 하리오.
신사(1941)년 12월 상순
지현 임덕준 찬
감동유사 이안희
장의 오병호
강지기
[原文]
明倫堂重修上樑文
正紀立倫行 王道之必首 五倫之明 惟我山淸 山明水媚文物由是而繁 飮水
尊聖刱學吾 儒門之所先 百行之本 俗厚民淳禮樂從此而起 採薪
民霑耕醫之俗誦時 文人口頭縱有山陰換鵝之說 奎運照臨不屑漢唐之記誦
學禮士有俎豆之儀 名士門下寔聚嶠南英駿之鄕 心惟爲學直接洙泗之淵源
戶有可封之風豈但一道之爲美 夫何 風氣隨時而降 故家世族未有耆舊之儀
人無不誨之士盡是六藝之可通 人物遂年而杳 型鄕黨州閭不見往昔之
忠 白日鄕孰久絶讀書之聲 家門相訟嗟吾俗之漸衰 寅承聖訓誰誰八百之威
厚 靑袍儒生誰識治心之道 道義不磨庸吾道之至此 申明舊章莫犯三千之罪
顧此挽回世道之策 士不讀書其奈六經束閣之恨 而況 寂寞夫子數間之庭
寔在明叙彛倫之中 人不學禮誰救三綱掃地之歎 興起志士千秋之感
詩廢樂缺歎夏禮之未修 春秋蘋蘩之薦不過餼羊 剝丹摧桷零落於斜陽綠樹之
牲瘠酒酸痛秋艸之己滿 閭巷菁莪之才誰是騂角 間斷簡殘編流存於窮篰白屋
之 連天畵閣盡是殊敎宣布之堂 人知有忠信孝悌是誰之恩 天長地久不足語
裏 滿地雕墻無非富翁偃居之處 世知有喪祭冠婚是誰之敎 其光明山高海深
不足喩 千載思敎之化如彼其長 士論方發天心始復於一陽之回 運磚搬土有
其遺澤 一岩尊奉之誠如披其褻 倫理必修人道最靈於萬物之衆 庶民子來之
休改俎易樽無 嵬煥殿宇類吾道之復新 伏念翰稙 靑春俗史 才無文翁之治
羣産未盖之禮 肅雍儀容如先聖之對越 白面書生 徒愧百里之命
德乏武城之化 鄕山螢牕粗識聖經之服膺 敢陳善頌 兒郞偉抛樑東 欲知
未見十室之忠 嶺海鳧舄英效文化宣傳 助擧脩樑 東天旭曰滿海紅 夫子
道德大尊親 兒郞偉抛樑西 五更風雨開霽後 兒郞偉抛樑南 欲知
彛性天下同 庭艸不除草萋萋 海天曙色唱金鷄 三峰山色碧如藍 夫子
滿空澤 兒郞偉抛樑北 一曲猗蘭中和氣 兒郞偉抛樑上 連天大野歲功
月滿澤 杏壇講樹暎春色 祥風化日滿槿域 殿庭如水春無量 熟戴饁女子路
相 兒郞偉抛樑下 試看庭鳥哺其母 伏願上樑之後 家有絃誦之聲 敦習
讓 光風霽月滿樓榭 徵物亦能霑聖化 人行忠孝之本 詩書
士知洛聿修禮讓民
懷江閩之學漢之思
孔子誕降二千四百七十二年辛酉菜月下澣
知郡 金翰植 謹撰
[해문]
명륜당중수상량문
기강이 바르고 윤강을 세우는 것은 왕이 제일 먼저 할 일이고
성인을 존경하고 학궁(學宮)을 세우는 것은 유림이 먼저 할 일이다.
오륜(五倫)의 밝음과
백행(百行)의 근본인 효도를 하니
우리 산청 고을은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서 문물이 이로 인해 번창했고
풍속이 후하고 백성들이 순박해서 예악(禮樂)이 이를 쫓아 일어났도다.
물마시고 나무하니 백성들이 밭 갈고 샘 파는 풍속에 젖어 있고
시를 외우고 예를 배우니 선비들은 조두(제사)에 절차가 있도다.
문인들 입에는 산음 환아정에 말이 있고
명사문하에는 영남에 준수한 인물이 모였도다.
규성(奎星:문창성)이 비치니 한당(漢唐)시대처럼 기송(記誦)하는 것 좋게 여기지 않고 학문하는데 마음 쓰니 공자의 연원을 바로 접속하도다.
집집마다 아름다운 풍속 있으니 어찌 한 고을에만 아름다우리요.
사람을 가르치지 않는 선비가 없으니 모두 육예를 통했도다.
무릇 어찌해서
풍속은 시대를 따라 강쇠하고
인물은 해마다 줄어드는가.
고가세족들도 옛날 법이 있지 않고
향당군 주려면에도 지난 날 충성보지 못할 지로다.
백주 대낮에도 서당에는 글 읽는 소리 끊어진지 오래 되었고
도포 입은 유생은 누가 마을 다스리는 도를 아는가.
집집마다 송사하니 우리 풍속이 점점 쇠해지는 것 슬프고
도의를 배우지 아니하니 우리의 유교가 이처럼 용렬하네
공경히 성훈(聖訓)을 받드는 누가 팔백(八百)에 위엄을 닦으며
옛 글을 거듭 밝히니 삼천(三千)가지 죄로 범하지 않도다.
세도(世道)를 만회할 방법 생각하니
이륜(彛倫)을 밝게 펼치는데 있도다.
선비들 독서 아니 하니 육경(소학,대학,논어,맹자,예기,효경)을 묵어 둔 한(限)을 어찌할꼬
사람이 예를 배우지 아니 하니 누가 삼강(三綱)이 땅에 떨어진 것 구원 하리오.
하물며
적막하고 조그마한 공자 사당에
지사들 흥기하니 천추에 감동할 것이다.
시악(詩樂)이 폐지되었으니 하(夏)나라 예 배우지 못함 탄식하고
제욕과 제주가 없고 사당에 추초(秋草) 가득함 가슴이 아파하네.
춘추로 제수 올림은 희양(餼羊:양고기)에 불과하고
여항(閭巷)에 훌륭한 제사들 누가 성각(騂角:산천에 제사지내는 중요한 제육)하리오.
단청이 벗어지고 서가래 부러진 것은 석양 푸른 나무 사이에 떨어지고
떨어지고 끊어진 서간이나 책은 궁한 마을 쓸쓸한 집에 남아 있네.
하늘에 닿을 듯한 누각은 모두 다 특별히 가르치고 선표하는 집이고
땅에 가득한 담장은 부자, 사람 거처하는 곳일러라.
사람들 충신효제(忠信孝悌)할 줄 아니 이것은 누구의 은혜인고
세상이 상제관혼(喪祭冠婚)을 알게 되니 이것은 누구의 가르침인가.
천장지구(天長地久)하도록 그 광명을 다 말할 수 없고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그 혜택을 깨우치지 못할 지로다.
천년토록 교육하는 덕화는 저 같이 길고
한 때 높이 받드는 정성 저 같이 소홀하네.
사론(士論)이 바야흐로 발표되니 천심(天心)이 다시 일회(一回) 회복했고
윤리를 반드시 닦으니 인도(人道)가 만물지중에 가장 신령하더라.
돌을 운반하고 흙 나르기도 서민들이 아들처럼 와서 하니 아름답고
제기와 술잔을 새로 장만하니 뭇 선비들 미진한 예(禮)가 없네.
전우(殿宇)가 높이 빛나니 우리 도(道)에 새로움과 같고
용모가 엄숙하니 선성(先聖)이 월(越)나라를 대하는 듯하네.
엎드려 생각하니 한식은
젊은 아전이고
백면서생(글 배우는 사람)이다.
문왕처럼 다스리는 재주 없으니 한 고을 맡은 것 부끄럽고
덕은 무성(武城)고을처럼 다스리지 못하니 조그마한 동리에 충신을 볼 수 없네.
고향마을 창문에는 성경(聖經)을 배우는 것 알 수 있고
영남에 부석(鳧舄:벼슬)은 문화 선전을 본받지 못했네.
어기어차 들보를 동쪽으로 맞추니
동쪽 하늘 아침 햇살 바다에 가득하네
공자의 도덕 큰 것 알고자 하니
부모를 존경하는 성품 천하가 동일하다.
어기어차 들보를 서쪽으로 맞추니
뜰의 풀 베지 않으니 풀 우거졌네.
새벽 비바람 개인 뒤에
하늘에 새는 빛 금계(金鷄)가 부르네.
어기어차 들보를 남쪽으로 맞추니
삼봉산 빛이 푸르기 쪽빛 같네.
깊은 밤 고요한 맛 알고자 하니
물 가득한 못에 달빛 가득하네.
어기어차 들보를 북쪽으로 맞추니
행단(杏壇)에 나무 봄빛 띄었네.
난간에 기대에 노래들으니 화기(和氣) 가득하고
좋은 풍속 문화가 근역(槿域)에 가득하네.
어기어차 들보를 위로 맞추니
전정(殿庭)이 물처럼 고요해 봄을 헤아릴 수 없네.
하늘은 연한 들판 해가 풍년들었고
점심 나르는 여자에게 길을 양보하네.
어기어차 들보를 아래로 맞추니
광풍과 제월이 누대에 가득하더라.
뜰의 까마귀 그 에미 먹이는 것 보니
미물도 또한 성인덕화에 젖었더라.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한 뒤로
집집마다 글 읽는 소리나고
사람마다 충효에 근본을 행해서
시서를 잘 익혀서 선비는 낙민(洛閩)의 학문을 알도록 하고
오직 예양(禮讓)을 닦아서 백성들은 강한(江漢)에 생각을 가지도록 할 것이다.
공자탄강 2472년 신유(1821) 3월 하순에
현감 김한식(金翰植) 삼가 지음.
출처 및 참조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산청향교
산청향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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