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북면 인곡 인동장씨 요산재 樂山齋

천부인권 2020. 6. 16. 06:00

2020.6.12. 진북면 인곡 인동장씨 요산재樂山齋

진북면 인곡리 658(의림로 255-12)에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요산재樂山齋 장공張公을 향사하기 위해 1947년 후손들이 요산재樂山齋라는 이름으로 재실을 지은 곳이다. 구글지도는 「위도35°07'46.4"N 경도128°26'45.5"E」를 표시 한다.
대문에는 호인문好仁門이라 편액했고 본재本齋는 아석 김종대의 글씨로 요산재樂山齋라 이름하고 5개의 기둥과 3개의 방기둥에도 주련柱聯을 걸었다. 대청마루 방문 위에는 육대조고둔암부군행기六代祖考遯庵府君行記와 요산재상량문樂山齋上樑文, 요산재기樂山齋記를 비롯하여 요산공樂山公의 원운原韻 및 맏이 지구志九의 복차伏次 시詩, 후손 천상天相, 안릉 이현욱李鉉郁·이종호李鍾浩 등의 시운詩韻이 걸려 있다.

 

2020.6.12. 요산재樂山齋 호인문好仁門
2020.6.12. 호인문好仁門 편액
2020.6.12. 진북면 인곡 인동장씨 요산재樂山齋 전경

 

아석 김종대가 쓴 요산재樂山齋 편액
육대조고둔암부군행기六代祖考遯庵府君行記
요산재상량문樂山齋上樑文

 

樂山齋記
鎭海之仁谷背山而臨海坐 而回東嵂然而聳于 後在尼邱山也 山列如而左右環抱 者曰夜半曰鳳凰山也 前有海水深深望之若明鏡之當于面也 谷幽而窃遠隔塵宜仁者之可居也 昔顯宗朝時 有樂山齋張公 以儒學登上庠遊泮宮 爲儕流所推見 黨議朋興朝著不靖 遂浩然長敀擇里于 是扁其室曰 樂山作詩 以見志歲久窒頹 後孫志九與宗合謀 鳩財殫心經紀歲乙丑之仲春 建齋四間于 舊址左右其室 而中其堂瓦其覆 而宏其制仍舊扁 以揚之謂余 以同源請 以記余惟孔子曰 仁者樂山公之所 樂非直樂蒼蒼者 耳是樂乎仁也 仁者何本心是也 在天而爲元亨利貞之理 在人而爲仁義禮智之心 是人人之所 固有而亦爲氣稟 狗蔽知之者固鮮矣 求之者又鮮矣 好之者尤鮮故孔子曰 余未見好仁者 今樂山公志 在樂山則其心之所 存可之矣 所以能早判明內外輕重之分 勇退而遂其志子之肯構 又出於奉先之孝 則是爲仁之本也 子心之所存又可知矣 雖然仁非遠依 而知之爲尤難乍放 則失乍放 則失乍忘 則馳操則存舍 則亡只在像頃毫忽之間 子毋以肯構是齋爲盡乎仁矣 而必求樂山公之所樂 爲何事存而熟之 則可以淑 吾身推擴之 則足以保四海矣尤 豈不有光於樂山公之樂也哉 遂書此以勗之
彊圄大淵獻陽月上澣 宗後學 志厚謹記

 

요산재기 樂山齋記
진해鎭海의 인곡仁谷이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하는 자리로 가파른 산줄기가 마을 뒤에 있는 니구산尼邱山을 따라 동으로 돌아오고 산이 줄지은 것 같이 좌우를 둥글게 안은 야반산夜半山과 봉황산鳳凰山이 있다. 앞에는 해수가 깊고 깊어 바라보면 명경明鏡같이 깨끗한 모습이다. 골짜기는 아늑하여 세상의 시끄러움과 풍진을 막아주어 어진 사람이 거취할 만한 곳이다. 지난 현종조顯宗朝 때에 요산재樂山齋 장공張公이 경학으로 상상上庠¹⁾과 반궁泮宮²⁾에 등유登儒하여 제류儕流³⁾에 추중推重⁴⁾함이 되었으나 당파싸움이 심하고 조정朝廷이 부정함으로 시골로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고 그 집을 요산재樂山齋라하고 시詩를 지어서 뜻을 나타내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그 집이 퇴락하니 후손 지구志九가 제종과 의논하고 구재탄심鳩財殫心⁵⁾하여 을축년乙丑年 가을이 깊었을 때에 4칸의 재실齋室를 옛터에 세우니 좌우에 방이요 중간에 당堂이라. 지붕은 기와로 이었다 옛 편액을 그대로 게양하고 나에게 청하니 내 생각건대 공자孔子 말씀이 어진자는 산을 좋아한다. 하였으니 요산공樂山公이 좋아하는 것은 한갓 풍경만이 아니라 인仁을 좋아하는 것이니 인仁이란 즉 본심이라 원형리정元亨利貞⁶⁾의 이치와 인의예지仁義禮智⁷⁾의 마음은 사람마다 있으나 기름과 물욕에 구폐한 바 되어 알고자 하는 자와 구하고자 하는 자, 또 좋아하는 자가 드문 고로 공자 말씀이 내가 인仁을 좋아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 하시거늘 이제 요산공의 뜻이 산을 좋아하는데 있은 즉 그 마음의 가있는 곳을 가히 알것이라. 일찌이 내외 경중사를 판명하여 용감하게 은퇴하였고 또 그대가 지은 것이 봉선하는 효에서 나온 것인 즉 이것이 인을 위하는 근본이라. 그러나 인이란 멀어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방심한 즉 잃고 망각한 즉 도망가고 잡은 즉 존재하고 놓은 즉 망실 되는 것이 털끝같은 차이라. 그대가 이 재사를 건립했다고 인仁을 다했다 하지 말고 반드시 요산공의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그대로 두어 숙성되게 한 즉 가히 내 몸을 착하게 할 것이요 미루어 넓힌 즉 족히 사해四海도 보존할 것이니 요산공樂山公의 낙에도 빛이 나지 않겠나 이글을 써서 덧부치노라.
정해년丁亥年(1947) 4월 상한에 종후학 지후志厚 삼가 짓다.

 

【주석】
상상上庠¹⁾ : 태학(太學)으로, 곧 성균관(成均館)이다. 여기서는 진사나 생원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반궁泮宮²⁾ : 조선시대 국학인 성균관을 이르는 말로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와 성학을 강학하는 명륜당의 총칭이다.
제류儕流³⁾ : 나이나 신분이 서로 같거나 비슷한 사람
추중推重⁴⁾ : 사람이나 말씀 따위를 높이 받들어 중요하게 여김
구재탄심鳩財殫心⁵⁾ : 마음을 다하여 재물을 거두어 모음
원형리정元亨利貞⁶⁾ : 《주역》에서 말하는 천도의 네 가지 덕德
인의예지仁義禮智⁷⁾ : 유학에서,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의 성품

 

 

요산재 원운
맏이 지구가 쓴 복차
후손 천상이 쓴 복차
안릉 이현욱 이종호의 차운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