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성균관 명륜당 영역의 존경각과 육일각

천부인권 2020. 6. 19. 09:09

명륜당 뒤쪽의 존경각尊經閣과 육일각六一閣 모습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의 영역 내에 있는 존경각尊經閣과 육일각六一閣은 명륜당의 좌측 뒤쪽에 있는 건물이다. 존경각尊經閣은 책을 보관했던 서고였고 육일각六一閣은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던 궁시(弓矢)·웅후(熊侯)·미후(麋侯) 등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두 건물 다 문이 잠겨있어 내부는 구경을 할 수 없었고 존경각기尊經閣記는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찾았다.

 

2020.6.17. 존경각尊經閣 모습

【고전원문-무명자집-無名子集 詩稿 册二 / 詩】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尊經閣在明倫堂後,貯群書,使一吏掌之,諸生常借讀。今則日漸亡失,層架殆空云。


존경각(尊經閣)은 명륜당 뒤에 있는데 많은 책을 소장하고 관리 한 사람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유생들이 늘 여기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지금은 장서(藏書)가 나날이 망실되어 층층의 서가가 거의 비었다고 한다.

 

尊經閣貯萬牙籤 / 존경각은 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繚以崇墉鎖謹嚴 / 높은 담을 둘러 근엄하게 가리었네
課讀諸生隨意取 / 공부하는 유생들이 마음껏 빌려보며
菁莪樂育化爭霑 / 인재를 육성하는 나라의 교화에 다투어 젖어드네

 

존경각尊經閣 편액

成均館尊經閣記
恭惟我太祖康獻大王。受天景命。建邦設都。立廟學。亟修文敎。太宗恭定大王。誕承丕緖。重新學宮。增修大成殿。躋郕,沂二公於配位。陞子張於十哲。又命詞臣。撰碑竪之。賁飾文治。世宗莊憲大王。右文興化。敎育作成之效。有光前烈。三聖相承。纘而成之。今我殿下崇儒重道。高出百王之上。卽位之三年辛卯春二月乙酉。用大牢。冕服圭璋。親祀宣聖。仍御明倫堂。引文臣二品以上及館官。橫經問難。且賜酒帛。饋諸生酒饌。又命開科取士。冬十有一月。上語左右曰。今布列朝著者。皆紈綺子弟。不學無術。國學生必有通經史。識治體。才堪任用者。其令本館薦擧。本館薦進士安良生。上優秩用之。四年壬辰。上命左議政臣崔恒,判中樞院事臣李石亨,吏曹判書臣成任,參判臣李芮,咸從君臣魚世謙等。輪日仕本館。與禮曹兼判書臣申叔舟,判書臣李承召,同知事臣洪敬孫,臣林守謙,大司成臣權綸。曁臣居正。時相聚會。講論經史。訓誨諸生。屢遣近臣。賜酒饌。六年甲午。命修泮宮。築石以環。如壁雍舊制。七年乙未春三月丙寅。上備禮儀。謁宣聖。遂坐明倫堂。親策取士。是年。左議政臣韓明澮獻議。請建藏書閣。上允之。命立閣于明倫堂北。閣旣成。賜內藏五經,四書各百件。又諭典校署及入道。隨書板所在。打印裝潢以送。於是經史百家諸子雜書。幷前本館所儲。無慮數萬卷。令司藝,學正各一員掌出納。館官諸生。咸蹈舞相慶。欲侈聖賜於無窮。屬居正記。居正竊念。我本朝自祖宗以來。建極作則。設學立師。仁涵義育。殆將百年。我殿下嗣位之初。祗承成憲。再幸泮宮。嚴祀宣聖。凡所以崇化礪賢。興學養士者。無所不用其極矣。而猶慮經籍鮮少。觀覽不博。特命建閣。名曰尊經。其曰尊者。盖尊敬奉持之謂。嗚呼大哉。聖人之言乎。臣聞天地至神。非雨露風霆。罔以成功。斯道至大。非聖君明主。罔以興化。人性至善。非讀書窮理。罔以就器。况大學。賢士之關。而斯文根本之地。經者。載道之器。而道者。聖人之心。可不尊是經以究聖人之心。達是經以行聖人之道乎。師儒而體此。則書無不讀。理無不通。而訓迪明矣。賢士而體此。則窮理盡性。明體適用。而將大有施設矣。聖人培養人才。扶持世道之機。孰有過於此者乎。詩曰。濟濟多士。文王以寧。盖言文王作人之盛。以臣觀之。我殿下作人之盛。夫豈多讓於文王哉。居正章句劣能。忝長本館。目覩盛美。不可闇無撰述。謹書以爲記。

 

성균관 존경각(尊經閣) 기문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한 뒤에 묘당과 학교를 세워 서둘러 문교(文敎)를 닦았다.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태조의 큰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학궁(學宮)을 중수하고 대성전(大成殿)을 넓혀 성국공(郕國公)과 기국공(沂國公)을 배위(配位)에 올리고 자장(子張)을 십철(十哲)의 반열에 승격시켰다. 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비문을 지어 세우게 하여 문치(文治)를 미화하게 하였다. 세종 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는 문교를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켜, 교육(敎育)하고 작성(作成)하는 공효를 이루어 이전 두 대왕의 공렬을 빛냈다. 이 세 성왕들께서 서로 이어서 완성한 것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유교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겨 어느 왕보다 우뚝 훌륭하시다. 즉위한 지 3년이 되는 신묘년(1471, 성종2) 봄 2월 을유일에 대뢰(大牢)를 써서, 면복(冕服) 차림으로 규장(圭璋)을 잡고 몸소 선성(宣聖)께 제사를 올렸다. 이어 명륜당에 납시어 문신 2품 이상과 성균관 관원들을 인견하여 경서를 토론하고 술과 비단을 하사하였으며,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주찬(酒饌)을 내렸다. 또 명하여 과장(科場)을 열어 선비들을 시험 보였다.
겨울 11월에 상께서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조정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귀한 집안 자제들로서 학술이 없다. 국학(國學)의 생도 가운데에는 틀림없이 경서와 역사에 능통하고 정치의 요체를 알아 임용 대상이 될 만한 재능을 지닌 자가 있을 것이다. 성균관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라.”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이 진사 안양생(安良生)을 천거했는데, 상께서 높은 품질을 주어 등용하였다.
4년 임진년(1472, 성종3)에 상께서 좌의정 최항(崔恒), 판중추원사 이석형(李石亨), 이조 판서 성임(成任), 이조 참판 이예(李芮), 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 등에게 명하여, 돌아 가며 성균관에 사진해서 예조 겸판서 신숙주(申叔舟), 판서 이승소(李承召), 동지사 홍경손(洪敬孫)ㆍ임수겸(林守謙), 대사성 권륜(權綸) 및 거정과 함께 때때로 모여 경서와 역사를 강론하고 여러 생도들을 가르치게 하고, 누차 측근의 신하를 보내 주찬을 하사하였다.
6년 갑오년(1474)에 반궁(泮宮)을 수리하라고 명하여, 돌을 둘러쌓아서 벽옹(辟雍)의 옛 제도처럼 하게 하였다.
7년 을미년(1475) 봄 3월 병인일에 상께서 예에 맞는 의장을 갖추고 선성을 배알하였다. 그런 뒤에 명륜당에 앉아 몸소 선비들에게 책문 시험을 보여 선발하였다.
이해에 좌의정 한명회(韓明澮)가 건의하여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할 것을 청하니, 상께서 윤허하여, 명륜당 북쪽에 집을 짓도록 명하였다. 집이 완공되자 내각(內閣)에 있던 오경(五經)과 사서(四書) 각각 100건을 하사하고, 또 전교서(典校署)와 팔도에 유시하여, 서판(書板)이 있는 곳에서 찍어 책을 만들어 보내게 하였다. 이에 경서와 역사서, 온갖 제자(諸子)와 잡서(雜書)들이 이전부터 성균관에서 소장해 오던 것과 합쳐 무려 수만 권에 이르게 되었는데, 사예(司藝)와 학정(學正) 각 한 사람씩으로 하여금 책의 출납을 담당하게 하였다.
성균관 관원과 유생들이 모두 좋아서 뛰며 서로 경하하면서 성상께서 하사한 것을 무궁토록 자랑하고자 하여, 거정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거정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본조는 조종(祖宗) 이래로 표준을 세우고 법칙을 만들며 학교를 설치하고 사부를 정하여, 인(仁)으로 함양하고 의(義)로 훈육한 지가 어느덧 100년이 되어 간다. 우리 전하께서는 즉위하던 초기에, 선왕들이 이루어 놓은 법도를 공경히 이어받아, 두 번이나 반궁에 행차하여 선성을 경건히 제사하였다. 무릇 교화를 숭상하고 현인을 격려하며 학교를 흥성시키고 선비를 기르는 방도가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하고도 오히려 경적(經籍)이 부족해 두루 지식을 넓히지 못할까 염려하여 특별히 서각(書閣)을 세우라 명하고, 이름을 ‘존경각(尊經閣)’이라 하였다. 그 존(尊)이라는 것은 대개 존경하여 받들어 모신다는 말이다. 아! 위대하구나, 성인의 말씀이여! 신이 듣건대, 천지는 지극히 신령스럽지만 비와 이슬과 바람과 우레가 아니면 공(功)을 이룰 수 없고, 사도(斯道)는 지극히 크지만 성군(聖君)과 명주(明主)가 아니면 교화를 일으킬 수 없고, 사람의 본성은 지극히 선하지만 독서와 궁리(窮理)가 아니면 기국을 성취할 수가 없다. 하물며 태학은 어진 선비들이 모이는 관문이고 사문(斯文)의 근본이 되는 터전이다. 경(經)이라는 것은 도를 싣는 그릇이고 도(道)라는 것은 성인의 마음이니, 이 경을 존숭하여 성인의 마음을 탐구하고 이 경을 통달하여 성인의 도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유(師儒)가 이것을 체득하면 읽지 않은 책이 없고 통달하지 못한 이치가 없어서 교육이 밝을 것이며, 현사(賢士)가 이것을 체득하면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극진히 하며 체(體)에 밝고 용(用)에 적합하여 장차 큰 실행이 있을 것이다. 성인이 인재를 배양하고 세도(世道)를 유지하는 기틀로, 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시경》에 “많고 많은 선비들이 있어, 문왕이 이들이 있어서 편안하셨다.”라고 했으니, 대개 문왕이 성대하게 인재를 배양했음을 말한 것이다. 신이 보건대, 우리 전하께서 인재를 배양하는 성대함이 어찌 문왕에게 크게 손색이 있겠는가. 거정이 글재주가 부족하나 외람되이 성균관 장관으로 있으면서 눈으로 성대한 아름다움을 보았으니 찬술하는 말이 없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삼가 글을 지어 기문을 삼는다.

 

2020.6.17. 육일각六一閣 모습

 

【고전원문-무명자집-無名子集 詩稿 册二 / 詩】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六一閣在香大廳西,正錄廳在享官廳南;“六一”者六藝之一也,“正錄”者學正、學錄也。古者士論於此爲之,雖朝士,被之者不得齒云。


육일각(六一閣)은 향대청(香大廳) 서쪽에 있고, 정록청(正錄廳)은 향관청(享官廳) 남쪽에 있다. ‘육일(六一)’은 육예(六藝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 중 하나를 뜻한다. ‘정록(正錄)’은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을 뜻하는데, 옛날에 사론(士論)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아무리 조정의 관원이라 해도 사론의 탄핵을 받은 사람은 함께 어울릴 수 없었다고 한다.

 

六一閣中弓矢儲 / 육일각 안에 보관된 활과 화살은
先王大射禮行餘 / 선왕(先王)께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신 물품
向前正錄廳空闊 / 정록청은 앞마당이 시원하게 트였으니
游詠時時好發舒 / 때때로 놀고 읊조리며 회포 풀기 좋다네

 

육일각六一閣 편액


육일각六一閣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던 궁시(弓矢)·웅후(熊侯)·미후(麋侯) 등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 중의 하나라 하여 ‘육일각’이다.
명륜당의 동북쪽에 위치한 남향의 두 칸 집으로, 1743년(영조 19)에 건립되었다. 원래 향사례(鄕射禮)와 대사례는 세종 때부터 실시되어 성종조까지 행하여졌으나 도중에 중지된 것을 영조조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여 시행하였다.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대사례를 실시하였는데, 대사례가 끝난 뒤에는 그 용구들을 이 전각에 보관하였다.

 

출처 및 참고
한국고전번역원-한국문집총간-사가집-四佳文集卷之一 / 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육일각六一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