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고사리 원산 창원황씨 원모재 源慕齋

천부인권 2020. 7. 9. 10:44

2020.7.7. 진전면 고사리 원산마을의 원모재源慕齋를 도로에서 본 모습


진전면 고사리 513-3(의산삼일로 258-9)에는 창원황씨昌原黃氏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창黃昌을 추모하는 1997년에 건설한 원모재源慕齋가 있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83m를 알리고 「위도35°09'07.9"N 경도128°22'13.0"E」이라 표시한다.

 

창원황씨 원모재 대문 추인문
추인문 편액
2020.7.7. 진전면 고사리 원산 창원황씨 원모재源慕齋 전경
창원황씨 원모재源慕齋 편액

源慕齋 記文
艅航山 靈氣를 이어 받은 오방지락五坊之落 원산동元山洞은 우리 황씨黃氏의 세거지지世居之地이다. 黃氏根源의 由來를 살펴보건대 檜山이라 함은 昌原에 籍繫되어 있으나 檜山은 卽昌原의 古號이다. 始祖諱는 石奇요 號는 檜巖이시다. 高麗五祖에 出仕하시어 官至壁上三諱三重大匡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推誠佐俚功臣으로 錄勳하셨다. 君號는 檜山府院君으로 封하시고 諡號는 恭僖公이시다. 有諱는 昌이요 正順大夫知平州事를 歷任하시고 贈通憲大夫刑曹參議이시다. 三傳至諱는 衡이요 字는 彦平이시고 世祖午年己卯生이시다. 成廟十一年庚子武科連登進賢試에 及第하시고 成廟十七年丙午魁科에 壯元及第하시어 咸鏡慶尙兵馬節度使를 歷任하셨으며 中宗五年庚午에 五衛都摠府都摠管兼知訓鍊院事를 지내시고 工曹判書를 歷任하셨다.
中宗十五年庚辰에 天壽를 다하시니 王이 爲世亮臣으로 諡號를 莊武公이라 내리시고 命不祧廟하시었다. 累傳至諱는 汎이요 號는 石巖이시다. 壬癸之亂에 自京南下하여 晉州之畓川에 卜基하셨다. 有諱는 凱善이요 號는 靜山 宣略將軍이시며 嗣孫의 十三代祖이시다. 累傳至諱는 浩芳 字는 謹道 號는 谷隱이시다. 英祖十一年乙卯生 弘文館校理이시며 嗣孫의 七代祖이시다. 畓川에서 移居 日岩에 卜基하셨다. 品性이 寬仁淳厚하시고 事親克孝하셨다. 正祖二年戊戌에 違世하시니 享年四十四歲 墓는 日岩里 宗山 㘴佛堂谷子坐이며 配는 恭人草溪卞氏요 戶曹參判完碩의 女이며 墓는 公墓下同原이라 子에 貞仁 孫에 勢熙·錄熙·龍熙요 長房曾孫에 鎬周·鎔周·鐸周·錄周 四兄弟를 두어 家門이 潤澤하였고 校理公의 玄孫諱는 祐常이요 號는 艅岩이시다. 公이 元山洞에 卜地始居하사 祖先 文行의 雅實을 後孫에게 이어주시니 吾門이 益盛하였도다. 鳳容·鍾容·壽容이 宗人과 議論하여 齋室을 建竪하고 齋號를 源慕齋 門號를 追仁門이라 懸板하여 앞으로 다가올 後孫들에게 자랑스러히 傳해주리니 一根萬枝 檜山의 黃花는 祖國과 함께 永遠히 繁昌하리라.
歲丁丑一九九七年 淸明節
七世嗣孫 鳳容 謹記

 

원모재 源慕齋를 기록하는 글
여항산艅航山의 신령스런 기운을 이어받아 5개 마을이 나타났고 원산元山마을은 우리 황씨黃氏가 대대로 살아온 땅이다. 황씨의 근원적 유래를 살펴보면 회산檜山은 창원昌原의 기록 속에 있으며 회산은 창원을 옛적에 부르던 이름이다. 시조의 이름은 석기石奇이고 호號는 회암檜巖이다. 고려의 다섯 조정에 벼슬을 하여 벽상삼휘삼중대광壁上三諱三重大匡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고 추성좌리공신推誠佐俚功臣으로 공훈이 있음이 기록되어있다. 군君 호號는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으로 봉封하시고 돌아가신 후 이름을 주시길 공희공恭僖公이다. 가지고 있던 이름은 창昌이고, 정순대부지평주사正順大夫知平州事를 역임하고 돌아가신 후 내리신 벼슬은 통헌대부형조참의通憲大夫刑曹參議이다. 3세대를 전하여 이름이 형衡은 자字가 언평彦平이고 세조世祖 5년 기묘己卯(1459)년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11년 경자庚子(1480)년 무과武科에 이어 진현시進賢試¹⁾에 올라 급제하고 성종成宗 17년 병오丙午(1486)년의 괴과魁科²⁾에 장원급제 했으며 함경咸鏡·경상절도병마사慶尙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중종中宗 5년 경오庚午(1510)에 오위도총부도총관겸지훈련원사五衛都摠府都摠管兼知訓鍊院事를 지내시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 하셨다.
중종中宗 15년 경진庚辰(1520)에 천수天壽³⁾를 다하시니 왕이 세상에 빛나는 신하라 했고 돌아가신 후 내리신 이름은 장무공莊武公라 하시고 부조묘不祧廟⁴⁾를 명하시었다. 누대로 전해오는 이름은 범汎이요 호號는 석암石巖이다. 임진壬辰·계사癸巳(1592~1953)년의 전쟁으로 스스로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서 진주의 답천畓川에 처음 터를 닦고 입향하였다. 이름은 개선凱善이고, 호號는 정산靜山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이시며 대를 이은 손자의 13대 조상이다. 누대로 전하여 오는 이름은 호방浩芳이고, 자字는 근도謹道이며, 호號는 곡은谷隱이다. 영조 11년 을묘乙卯(1735)에 태어나셨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으며 대를 이은 손자의 7대 조상이다. 답천畓川에서 이사를 하여 일암日岩에 처음 터를 닦고 입향하셨다. 품성이 너그럽고 어질며 순박하고 친절하여 어버이 섬김이 지극한 효도로 임했다. 정조 3년 무술戊戌(1779)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44세이었고 묘는 일암리日岩里 종중산 좌불당곡㘴佛堂谷 자좌子坐이며 배우자는 공손한 사람 초계변씨草溪卞氏로 호조참판戶曹參判 완석完碩의 따님이시며 묘는 공公의 묘 아래 같은 자리에 있다. 아들은 정인貞仁이고 손자는 세희勢熙·록희錄熙·용희龍熙가 있고, 장방長房⁵⁾ 증손曾孫에 호주鎬周·용주鎔周·탁주鐸周·녹주錄周 등 4형제를 두어 가문이 윤택潤澤하였고 교리공校理公의 손자孫子의 손자는 이름이 우상祐常이고 호號는 여암艅岩이다. 공이 원산동元山洞에 처음 자리를 닦고 입향을 하여 조선祖先 문행文行의 아실雅實을 후손에게 이어주시니 우리 가문이 향상되고 왕성하였다. 봉용鳳容·종용鍾容·수용壽容이 종인宗人과 의론議論하여 재실을 건립하고 재실의 이름을 원모재源慕齋라하고 대문의 이름을 추인문追仁門이라 현판하여 앞으로 다가올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전해 주려니 하나의 뿌리에서 만개의 가지가 나와 회산의 황씨가 꽃피워 조국祖國과 함께 영원永遠히 번창繁昌하리라.
정축丁丑 1997年 4월 5일
7세 사손嗣孫 봉용鳳容 삼가 짓다.

 

【주석】
진현시進賢試¹⁾ : 조선 시대, 1482(성종 13)년에 현직 문무 관료를 대상으로 실시했던 임시 시험.
괴과魁科²⁾ : 조선시대 때 과거(科擧)에서 가장 어려운 문과(文科)의 갑과(甲科)를 일컫던 말
천수天壽³⁾ : 타고난 수명
부조묘不祧廟⁴⁾ :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부조묘는 본래 국가의 공인절차를 받아야 하나 후대로 오면서 지방 유림의 공의에 의해서도 정해졌다.
장방長房⁵⁾ : 동고조(同高祖) 자손 가운데 항렬(行列)이 가장 높은 연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