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구산면 구복리 김녕김씨 영사재 永思齋

천부인권 2020. 12. 23. 18:54

2020.11.25. 구산면 구복리 김녕김씨 영사재永思齋 전경

구산면 구복리 111(구복길 37-31)에는 김녕김씨金寧金氏의 재실인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구글지도에서는 「위도35°04'14.1"N 경도128°34'07.9"E」라 표시한다. 이곳 영사재永思齋는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현손玄孫으로 임진왜란의 공으로 군위현감軍威縣監을 지냈던 김승전金承田의 셋째 아들인 재성再成이 밀양에서 이곳 구복龜伏으로 이거하여 300여년이 넘도록 살아온 세장지世庄地이다. 
대문에는 념수문念修門이라 편액 했고, 재실齋室에는 영사재永思齋라 했으며, 4개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고 문미門楣에는 죽계竹溪 안용호安龍鎬가 쓴 영사재기永思齋記가 걸려있다.

 

2020.11.25. 구산면 구복리 김녕김씨 영사재永思齋 대문
2020.11.25. 념수문念修門 편액
영사재永思齋 전경
영사재永思齋 편액
영사재기永思齋記

永思齋記
義昌治南一舍許 龜山面背山而案海 有坊焉者 曰龜伏 曠如奥如泉甘土肥佳氣扶 與卽金寧金氏世庄也 而甍簷翠飛棟宇 輪奥掩映於雲烟之際者 其先世墳菴也 十代冑孫一權 在世時甲子正月初四日 開大宗會結成推進委員會 而送出委員 卽澤權亨權世權喆權孝權炯祚炯柏乙權炯竣且權等也 基址則澤權出私資買入於洞 後九月 山嶝下爽塏之地 資金則醵歛於宗中 而鳩材募工 始役於同年 仲春越翌年 乙丑四月念八日竣工計 而推進委員代表奉世秉 謁余鎭海寓莊 問其齋名 又屬以記顧年 迫耄 期神識昏耗辞以不堪 而不獲按 其先新羅宗姓 敬順王十一世孫 文烈公諱時興 討平國難 錫采金寧遂 以爲氏軒寬 相承輝暎靑史入 李朝有諱文起 號白村官 吏曹判書 端廟遜位與六臣同死 諡忠毅公 玄孫諱承田于訌以扈 駕功除釜山僉使 贈通訓大夫 軍歲縣監 第三子 諱再成 自密陽移居于 昌原之龜山公以名祖 後裔懿行美蹟 宜多可傳 而今距三百餘載 屡經滄桑文籍散佚殆乎 杞宋吁可慨也 然而子姓蕃衍遂 爲昌原之閥閱繼守乎 泉玆豈非祖先種善之 餘蔭攸曁者 歟聞其齋之構造 則三架四楹 而堂於中室 於左右凉懊 俱適幽敞可眺於 是僃羞齋宿 灌鬯受釐聚族敘倫迎賔 講義儲書肄 業何用不宜揭편 以永思蓋取諸永言 孝思之義也 墻以環之門 而書念修亦念 祖修德之意也 謹扄鑰禁樵牧江山 呈彩洞埾 改觀登斯齋也 孝悌之心 油然自生望松梓 而感慕履霜露  而悽愴臨裸薦 而致誠寔報本 追遠之道也 若以齋宇之創建爲 爲先事畢則未也 惟以繼述先徽敦睦宗族光 前燾后爲傳世衣鉢 而實踐則先靈陟降悅豫 而騭佑茀祿於無彊矣 盍相勉勵哉
檀紀 四三一八年 乙丑 暮春 竹溪 安龍鎬 記

영사재기 永思齋記
의창義昌의 치소治所에서 남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는 구산면龜山面은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하였다. 그곳에는 마을이 있는데 구복龜伏이다. 환한 듯 그윽하며 샘은 달고 토양은 비옥하여 아름다운 기운이 감도는 곳인데 이곳이 곧 김영김씨가 대대로 살아온 세장지世庄地이다. 기와를 이은 처마가 날듯하고 기둥이 환하게 구름과 노을 사이로 비추는 것은 그 선대를 모시는 재실이다. 10대 주손胄孫인 일권一權이 갑자甲子 정월正月 초4일初四日에 대종회를 열어 추진위원을 결성하여 위원을 뽑으니 택권澤權·형권亨權·세권世權·철권喆權·효권孝權·형조炯祚·형백炯柏·을권乙權·형준炯竣·차권且權 등이다. 그 터를 닦으니 택권澤權이 개인재산을 내어 마을 뒤 구월산九月山 아래에 환하게 밝고 높은 땅을 매입하였다. 나머지 자금은 종중에서 갹출하여 재목을 모으고 목수를 불렀다. 같은 해 중춘仲春에 공역을 시작하여 다음 해 을축년乙丑年 4월 염8일念八日에 준공을 계획하였다. 추진위원 대표로 세병世秉을 뽑아 진해에 있는 집으로 나를 방문하여 그 재실의 이름을 묻고 또한 기문을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나이가 이미 늙어 죽을 때를 기약하고 생각도 어두워 감당할 수 없다고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살피건대 그 선대는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경순왕敬順王 11세손 문열공文烈公으로 이름은 시흥時興인데 나라의 난리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김녕金寧으로 성씨를 받았다. 이후로 관직과 명성이 대를 이어 청사靑史에 그 일들이 빛났다. 조선에 들어서 이름이 문기文起이고 호가 백촌白村으로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분인데 단묘端廟가 손위遜位할 때 6신과 함께 죽으니 시호諡가 충의공忠毅公이다. 현손玄孫의 이름은 승전承田으로 임진왜란 때 어가를 호종하여 부산첨사釜山僉使에 제수되었고 통훈대부에 증직되었으며 군위현감軍威縣監을 지냈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재성再成으로 밀양密陽에서 창원 구산으로 이거하여 공이 이름난 선조의 후예로써 의로운 행실과 아름다운 행적이 의당 많이 전해지니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번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고를 겪으며 문책文冊도 거의 다 잃어 증험할 기록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그러나 자손들이 번성하여 창원에 이름난 가문이 되어 대대로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선대 조상의 선한 음덕이 쌓여서 그런한 것이 아니겠는가. 재실의 구조를 들으니 4개 기둥에 3칸이며 가운데 당을 두고 좌우에 서늘하고도 따뜻한 방을 두었으니 아늑하고 화창함이 고루 갖추어졌다. 여기에서 재숙하고 재물을 준비하고 술을 거르고 종중이 모여 의리를 닦고 손님을 맞이하고 강학하고 책을 읽으며 조상의 유업을 이어가니 어찌 쓰임에 마땅치 않음이 있겠는가. 편액을 영사永思라고 한 것은 대개 『시경詩經』의 ‘효도를 길이 하니라. 효도가 오직 법이 되시니라[永言孝思 孝思有則]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담장을 두르고 문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수양을 생각하고 또 조상을 생각하고 덕을 닦는다는 뜻이다. 삼가 이곳에 나무하고 목축하는 것을 금하니 강산이 그 빛을 발하고 골짜기가 그 모습을 바꾸었다. 이 재실에 오르면 효도와 공경하는 마음이 유연히 저절로 생겨나고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바라보면 조상에 대한 감사와 연모가 생겨나고 봄가을 서리와 이슬을 밟으면 선조를 그리워하는 처연한 마음이 생기며 향사를 올리며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먼 조상을 그리워하고 근본에 보다하는 도일 것이다. 이처럼 재실을 창건하는 것으로써 선조를 섬기는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오직 선대의 업을 계술하여 이어가고 종족을 돈목하게 하며 앞에서 비추고 후대에 빛나게 되며 선대의 의발衣鉢을 대대로 전하여 실천하면 선조의 영령이 오르내리며 그 기뻐하는 조짐으 바로 옆에 드러낼 것이니 영원토록 복록이 무성할 것이니 대개 어찌 서로 권면하여 노력하지 않겠느가. 
단기檀紀 4318(1985) 어느 봄날 죽계竹溪 안용호安龍鎬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