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友山文集(우산문집)』은 우산(友山) 최상연(崔相淵 1899~1969)의 시문(詩文)을 4권 2책으로 엮었으며 상권은 구하지 못했고, 2025년 10월에 하권만 합동북에서 16,000원에 구입하게 됐다. 友山文集發行所에서 최임환이 발행했고, 허정열(許貞烈)이 1996년 10월에 발간했다. 책은 전통 한지로 엮었으며, 순 한문본으로 가로 192cm, 세로 281cm이다. 인쇄는 영남인쇄사에서 했다.
우산(友山) 최상연(崔相淵 1899~1969) 그는 천석꾼으로 미대 어른, 미대 댁으로 불렸다. 조선 중종 때 경주에서 한사동으로 이주한 경주인 최곤(崔崑, 경주 최씨 한사리 입향조)의 후손이다. 둘째 아들은 독립운동가 최인환(崔仁煥)이다. 그는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에 다닐 때(1935년)부터 일본인 교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학생을 응징하는 등 항일투쟁 열혈아였다. 서울대 약학과를 나와 유한제약에 근무하면서 폭탄 제조를 시도했다. 1944년에는 총독 방문 시 총독을 제거하기 위해 독약을 제조했다. 총독 방문이 취소되자 동지들과 과학자로서 독립운동 방책을 논의했다. 거사를 단행하기 전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 등으로 30살에 요절했다. 유족들이 그가 25살에 쓴 유고 『근대 과학 사상사』를 책으로 출판했다. 셋째 아들은 최임환(崔壬煥) 전 성균관대 교수이다. 그는 우리나라 재정학의 권위자로 한국재정학회장을 역임했고, 경제학 대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최초로 완역했다.
이 책을 발행한 곳은 『동산재(東山齋)』로 하양향교 인근인 교리 365번지 대나무 숲에 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최문환 박사의 증조부인 최경규(崔景珪) 처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우모소로 1932년 무렵에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ㄱ자형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정면)正面) 쪽으로 온돌방 2칸과 대청 1칸을 연접시킨 후, 좌측 온돌방 뒤로 2칸 대청을 달아내어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다. 건물 주위에 쪽마루를 둘렀으며, 우측 마루방 둘레에는 계자각(鷄子脚)을 설치하였다. 전정 양쪽에 학자수 은행나무를 한 그루씩 심고 가운데에 연못을 배치하여 조화를 이루었다. 완산(完山) 이후(李?)의 춘우당기(春雨堂記), 후손 최종만(崔鍾萬)이 쓴 동산재기(東山齋記), 이후와 채경원(蔡景源)의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 와은(臥隱, 조선 후기의 학자, 장위항, 자인현감) 동산서회(東山書懷) 등이 전해지고 있다.



杏東第宅建築小記
吾家世食淸寒 先祖考處士公以 高宗丁卯三月三間室 其後産業稍潤隨力之所 逮遂建東西翼庇 先府君以壬子(距丁卯四十七年)十一月初二日丑時 建正寢四門前退以地挾故難擴大而甲寅 又建西翼庇乙丑十二月十九日丑時 建大廳而東翼庇仍舊而存 府君不忍盡發 先祖考遺 而亦一生起居于 此處耳
행동(杏東)의 집을 지은 짧은 기록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함을 먹고 살아왔다. 선조이신 처사공께서 고종 丁卯년(1867년) 3월에 세 칸짜리 집을 지으셨고, 그 뒤로는 살림이 조금 넉넉해짐에 따라 힘이 닿는 대로(조금씩) 보탰다. 이에 이르러 마침내 동쪽과 서쪽에 익랑(날개채)을 지었다. 아버님께서 임자년(丁卯로부터 47년 뒤, 즉 1912년) 11월 초이틀 축시에 정침(본채)과 사문(四門)을 지으셨다. 앞으로 물러서서 지으셨는데, 터가 옆으로 끼어 있어 크게 확장하기는 어려워 그 뒤 갑인년(1914년)에 다시 서쪽 익랑을 지었다. 을축년(1925년) 12월 19일 축시에 대청(큰 마루)을 지었다. 그러나 동쪽 익랑은 옛 그대로 두어 보존하였다.
부군께서는 선조이신 처사공의 유작(옛집)을 다 헐어버리기를 차마 하지 못하였고, 그리고 또한 평생을 이곳에서 기거하셨을 뿐이었다.
行狀
族祖府君 諱相淵 字汝顔 號友山 籍慶州 生長於花城杏東 養性修德 不求榮辱 而文藻右宅 不失先業 孝友根天 敦宗睦族 以文會友 遠明自來 吟風弄月 以遣心懷 遽然謝世 鄕里流涕 占基己葬
後二十四年乙亥肇夏 公之次子壬煥 叔 袖其遺黑 訪余于京都寓舍 泫然流涕曰 先府君生平著述 其數不多 恐或流失 挽近世道異昔 故猶
행장
족조(族祖) 부군(府君)의 휘는 상연(相淵), 자는 여안(汝顔), 호는 우산(友山)이시다. 본관은 경주이다. 화성의 행동(杏東)에서 태어나 자라며 성품을 기르고 덕을 닦으셨다. 영화와 욕됨을 구하지 않으셨으나 문학적 재주는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잃지 않으셨다. 효성과 우애가 천성에 뿌리박혀 있었고, 종족을 돈독히 하고 화목하게 하셨다. 글로써 벗을 사귀셨으며, 원명(遠明, 밝은 뜻을 멀리서 드러냄)은 스스로 나왔다. 늘 바람을 읊고 달을 노래하며 마음을 달래셨는데, 홀연히 세상을 떠나니 향리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였고, 기(基)를 점쳐 묘를 정해 기해년(己亥年)에 장사 지냈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을해년(乙亥) 여름 초, 공의 차자(次子)인 임환(壬煥) 숙(叔)이 부친의 유고 원고를 품고서 경도(京都, 한양)의 나의 객사로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선부군께서 생전에 저술하신 것이 많지 않은데, 혹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가까운 세상의 도가 옛날과 달라져서, 그 때문에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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