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대마도(對馬島)-사적 금석성터(史跡 金石城跡)와 덕혜옹주

천부인권 2026. 4. 19. 19:35

2026.4.6.배-승선표

 

부산에서 출발하는 배편은 대마도의 번화가 엄원(厳原_이즈하라)과 비전승항(比田勝港_히타카츠항_ひたかつこう_Hitakatzu Port)을 이용한다. 이번에 우리 일행은 비전승항(比田勝港_히타카츠항)을 이용해 12일의 여정으로 대마도에 들어갔다.

 

2026.4.6.대마도(對馬島)-사적 금석성터 (史跡 金石城跡-사적 가네이시성터) 성문

 

비전승항(比田勝港_히타카츠항)에 도착 후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서 준비된 버스로 엄원(厳原_이즈하라)으로 이동한 일행이 처음 찾은 곳이 사적 금석성터(史跡 金石城跡-사적 가네이시성터)와 그 속에는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德惠翁主 結婚 奉祝 記念碑)가 있는 곳으로 사적 금석성터는 일본국 지정 사적지이다.

사적 금석성터(史跡 金石城跡)의 입구에 李王家·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이왕가·종백작가 어결혼봉축기념비) 안내표지의 한글 표기가 이왕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라 새겼는데 왜()가 이렇게 글을 새긴 의도가 불쾌했다.

 

2026.4.6.대마도(對馬島)-사적 금석성터 (史跡 金石城跡-사적 가네이시성터) 성문

 

2026.4.6.대마도(對馬島)-사적 금석성터 (史跡 金石城跡-사적 가네이시성터) 안내문

 

사적 금석성터 (史跡 金石城跡-사적 가네이시성터)의 성문 입구에는 성터의 안내문을 세워 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적 가네이시성터 (史跡 金石城跡)

국가지정: 1995(헤이세이 7) 328

(추가지정): 2016(헤이세이 28) 31

가네이시성은 중세 말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소() 씨 가문의 거처(본거지)가 위치했던 성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가네이시 강을 따라 고저 차가 있는 좁고 긴 평지에 조성되었으며, 동서 약 400m의 부지가 석벽으로 구획되어 있다. 동쪽 끝에서 120m 정도에 있는 야구라몬(망루문)을 지나 마스가타(성문 앞 사각형 구역)를 통과하면, 대마도 소 가문 관련 자료 등 여러 그림에 그려진 큰 계단이 나오며, 이 계단을 올라가면 저택이 있던 평지가 나타난다.

이곳에 저택이 놓인 것은 16세기의 일로, 그 시작은 1528(쿄로쿠 원년)에 발생한 일족의 내분 때문이었다. 당시의 거처였던 '이케노야카타'가 소실되자, 가네이시하라 땅으로 피신했던 14대 종가 종성긴(宗盛緊_소 요시시게)이 새로 지은 것이 '가네이시 야카타(저택)'이다.

이곳이 체재를 정비하고 ''의 모습을 갖춘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이다. 요시시게가 저택을 지은 지 130년 정도 후인 제3대 번주 종의진(宗義真_소 요시무네) 통치기에 조카마치(성하 마을)에 대화재가 잇따랐다. 특히 1659(만지 2)1661(칸분 원년)에 일어난 대화재는 마을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요시무네는 막부의 원조를 받아 재건을 기하며 대규모 마을 정비에 착수했고, 호황을 누리던 왜관 무역의 지원을 받아 가네이시 저택의 확장과 개수를 진행했다.

국분사(고쿠분지)를 긴석하라에서 현재의 덴도우시게로 옮기고, 성벽을 정비하고 망루를 세워 현재의 성 체재가 완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1665~1669(칸분 5~9)경에 정비된 저택의 형태를 가네이시성(金石城)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대마도 통치의 거점이 되었다. 그 후 요시무네는 1678(엔포 6)에 사지키바라에 거관(은거지)을 지어 거처를 옮겼으며, 막말에 이르렀다.

1811(분카 8) 이치무지(역지) 예우로 조선통신사가 내방했을 때, 이 성은 막부의 상사(상급 사신)인 오가사와라 다이젠노스케(고쿠라 성주)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이를 위해 새롭게 각종 시설을 많이 건축했는데, 자세한 성 내부의 모습은 당시 그린 회도(그림 지도)가 대마도 소 가문 관련 자료로 남아 있다.

성의 서쪽에 있으며 과거 '신지이케(心字池)'라 불렸던 구 가네이시성 정원은, 대마도 번사로서 왜관 가마터의 도자기 제작에도 관여했던 나카니와 모젠이 번주의 명에 따라 17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정원이다. 2007(헤이세이 19)에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대마시시 교육위원회

 

*성적(城跡):성이 있던 자리

 

대마도(對馬島)-사적 금석성터 (史跡 金石城跡-사적 가네이시성터) 내부
대마도(對馬島)-사적 금석성터 (史跡 金石城跡-사적 가네이시성터) 내부
2026.4.6.대마도_덕혜옹주 결혼비

 

李王家·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이왕가·종백작가 어결혼봉축기념비)

對馬支廳長赤木眞 謹書(대마지청장적목진 근서)

2026.4.6.대마도-덕혜옹주 결혼비

 

李王家·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이왕가·종백작가 어결혼봉축기념비)

對馬支廳長赤木眞 謹書(대마지청장적목진 근서)

제목 없는 안내문

 

李王家·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이왕가·종백작가 어결혼봉축기념비)

對馬支廳長赤木眞 謹書(대마지청장적목진 근서)라 새긴 비석의 옆에는 제목 없는 안내문이 일본어와 국한문 혼용체로 아래와 같이 적었다.

일본어 번역:

1931(쇼와 6), 신혼인 종무지(宗武志_소 다케유키) 백작과 덕혜옹주는 이곳 쓰시마를 방문하여 도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덕혜옹주는 조선왕조 제26대 고종황제의 왕녀(옹주)입니다.

이 비석은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쓰시마에 거주하던 한국(조선)인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또한 가네이시성 뒤편 시미즈산성에는 쓰시마 사람들에 의한 결혼 축하 진달래 식수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25년에 걸쳐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불구하고, 외딸 정혜(마사에)와 함께 신뢰와 애정의 끈으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 민족의 관계는 참으로 엄혹했고, 시대의 격랑 속에서 1955년 어쩔 수 없이 이별(이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케유키 공은 1985,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돌아가 1989년에 서거하셨습니다.

이에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이 비석을 재건하며, 두 분의 고난 가득했던 생애를 떠올림과 동시에 양 민족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국한문 혼용체:

조선국 제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19315월 종무지(宗武志_소 다케유키)공과 결혼하여 동년11월에 대마(對馬)를 방문했다. 옛 대마도주 종가당주(宗家當主)가 조선의 왕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내도(來島)하였으므로 열렬(熱烈)한 환영(歡迎)을 받았다. 이 비는 두분의 성혼(成婚)을 축하하여 대마거주 한국인들이 경축하여 세우고 심었던 기념비와 철쭉이 지금도 잘 남아 있다.

결혼생활은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딸 정혜(正惠)를 낳아 서로 신뢰와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갈등이 심하여 두 분은 1985년에 덕혜옹주(德惠翁主)1961년 귀국 후 1989년에 별세(別世)하였다. 이제 역사에 묵혀있던 이 기념비를 재건하여 두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양국민(兩國民)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