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자원봉사/사회복지

장애인 당사자주의에 대한 토론

천부인권 2006. 7. 14. 15:57
 

장애인 당사자주의에 대한 토론


조한진(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이 익섭 교수님께서는 “장애인 당사자주의와 장애인 인권 운동: 그 배경과 철학”이라는 발제문에서 먼저 장애를 특별조치가 필요한 문제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완전한 사회참여의 권리를 가진 동등 시민으로서 대우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국제 장애인 인권 운동에서 나타난 ‘장애․비장애 동수 분할론’과 ‘장애인 배제 불가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또한 ‘장애인 인권 운동’과 ‘당사자주의’의 차이점을 비롯한 여러 유사한 개념들 간의 차이점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전체적으로 발제자의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반면 여러 유사한 개념들 간의 차이점에 대하여는 다소의 이견이 있어, 이것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본 포럼의 목적 중의 하나가 장애인 당사자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립과 이념 고찰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더더욱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첫째, 발제자는 “장애인 인권운동은 기존의 사회규범을 전제로 기존의 장애 관련 노력의 효과성을 향상 보완하려는 노력을 시도하려 한다.”고 하였고, 또한 “인권운동이 갖는 보다 심각한 한계는 인권의 보장은 최소한 기회와 환경을 보장할 뿐, 장애인에게 관련되는 각종 결정과정에의 참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이론이 대단히 다른 관점을 가진 무수한 진영으로 쪼개졌던 것처럼, 장애운동 내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관점과 경향이 있어왔다. 그들 중에는 활동가, 사회서비스․학계․정부 전문가 유형, 투쟁적인 사람들, 장애아동 부모들, 좌파 사람들, 부르주아 집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장애인 인권 운동가들은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일했을 것이고, 장애인 인권 운동가들은 ‘장애인 자신들의 인권’을 위해 일했을 것이다. 이 후자의 경우를 당사자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의 관리와 지향에 있어서 장애 인권 운동 내 장애인 활동가와 그 밖의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었을 뿐, 장애 인권 운동이 기존 질서의 보존과 효율성 제고 그리고 최소한의 기회와 환경을 보장할 뿐인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당사자주의는 장애 인권 내의 다양한 관점 중의 하나였지, 결코 같은 수준에서 대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장애 인권 운동과 당사자주의와의 관계는 매우 시사적이어서, 장애 인권 운동 내에서 일정한 함의를 가질 수 있다. 발제자는 ‘장애인 배제 불가론’을 언급하였으나, 이것은 종종 장애 인권 운동 내에서 ‘비장애인 참여 불가론’ 내지는 ‘비장애인 도구론’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장애운동 내에서 가능한 한 많은 힘들을 합치면서도 장애인 활동가의 손에서 그 통제권을 유지하느냐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둘째, 발제자는 “당사자주의는 자립생활이나 자기결정 및 소비자주의와 동질성과 아울러 일정 수준 차별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우선 “소비자의 권한은 이미 정해진 내용에 대한 선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또한 욕구가 공급을 상위하는 경우 소비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에 소비자주권이라는 의미가 없다.”고 그 차별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수요가 공급을 상위하는 경우 자기결정이든 당사자주의든 역시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이것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재활 패러다임 혹은 시설이 문제라는 지적에 대해 많은 소위 ‘현실론자’들이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그것들이 문제라고 할 만큼 재활서비스나 시설이 충분한가라고 늘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 당사자가 선택하고 결정할 만큼 ‘메뉴’가 다양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발제자가 인용한 것처럼, “대안을 찾을 수 없고, 변화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인식하게 함으로써 기존 질서에서의 역할을 수용하는데 불만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위해한 권력행사의 형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서는 장애인 당사자주의가 재활과 시설의 성벽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본 토론자가 가지고 있는 대답은 다양한 재활서비스와 시설을 구비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자립생활과 탈시설화라는 메뉴를 추가해 놓고 장애인 당사자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에 추가하여 혹 발제자가 가지고 있는 적절한 대답이 있다면 듣고 싶다. 이와 아울러 발제자는 당사자주의와 자립생활이 일정 수준 차별성을 갖는다고 하였으나, 정확하게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 이를 설명할 필요도 있다.

셋째, 당사자주의의 “차별성의 핵심 요소가 되는 것은 저항성과 정치성 그리고 집합성”이라고 하였는데, 저항성과 정치성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반면 집합성에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집합성의 이유로 “장애인은 사회로부터 함께 차별 받으며 함께 억압받는 보편적 현실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집합성과 보편성이 강조되다 보면 장애인들 중에 존재하는 여러 다양성을 무시하게 된다.

이것은 과연 누가 당사자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물론 비장애인과 대별하여 생각할 때는 장애인이 당사자이고, 흔히 장애인 당사자주의라 할 때는 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장애인들 내부로 들어왔을 때는 누가 당사자인가? 집합성과 보편성을 생각한다면, 남성 장애인이 여성 장애인을, 신체 장애인이 지적 장애인을, 경증 장애인이 중증 장애인의 차별과 억압을 적절히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중․삼중의 차별과 억압에 직면해 있는 장애인 내의 또 다른 소수자에게는 평균적인 처방으로는 부족하다. 더구나 장애운동 내에서 여성 장애인, 지적 장애인, 중증 장애인의 ‘당사자’의 참여가 극히 저조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우려는 우리나라 장애운동이 장애 대중에 근거하지 못하고 몇몇 화이트칼라의 사람과 단체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현실에서 다시 반복된다. 물론 장애인이 조직화하고 연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운동의 효과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중요하며, 본 토론자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집합성의 강조 때문에 다양성이 묻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불어 말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당사자주의와 다른 것과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리고 당사자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의 재점검을 통하여 우리는 당사자주의의 개념과 관점을 좀 더 선명하게 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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