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덕 6

정열공 최윤덕 상국 기록 엉터리 칠갑

통천 최씨가의 족보와 창원시 각지에 설치된 최윤덕 상국의 어머니에 대한 금석문 오류는 수정해야 한다. 이제까지 파비니, 문인석의 가슴이니, 하면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창원이씨를 들먹였지만 호연공문집에 어머니의 성씨와 외할아버지의 이름 및 본이 확연히 밝혀진 이상 정열공 최윤덕 상국의 어머니 청주 양씨가 창원 이씨로 잘못 기록된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한다. 1. 최윤덕 상국의 출생 근거에 대해 통천 최씨가에서는 창원 이씨 부인이 최윤덕을 낳았다는 근거로 파비에 적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비(어떤 이유에서 파괴한 비를 말함)라는 것이 실존하는 것이라면 사진이나 탁본 등으로 증거를 남겼을 것인데 증거가 없다. 또한 족보에는「문인석 가슴부위에 기록 있음」이라고 하지만 창원 이씨라고 읽을 수 없다. 그리고..

최윤덕 장군 생가지에 대한 이견

생가지와 유허지는 완전 다른 개념이다. “정열공 최윤덕장상 연보”에는 “부북면 내곡에서 출생했다.”고 기록하여 생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유허지와는 아무른 관련이 없다. 따라서 “정열공 최윤덕장상 연보”는 수정해야 한다. 창원시는 “이 외에도 영조대 국가차원에서 간행된 『여지도서』(창원도호부, 인물조)에는 ‘최윤덕은 부북 내곡인’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기록은 최윤덕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공신력 있은 자료이며. ‘무동리’와 관련된 문헌 자료는 19세기까지 자료에서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고 답하였습니다. 창원시의 답변이 문제가 있는 것은 『여지도서』는 유허지란 뜻으로 말한 것이지 생가지의 이야기는 아니다. 결국 출생이란 생가지 이야기이다. 창원시가 말하는 19세기 당시 ‘부북 내곡’이..

최윤덕 장상 연보 수정필요

창원 용지역사공원에 세운 최윤덕 장상 연보는 엉터리 기록이므로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엉터리 역사를 만든 사람에게 그 비용을 청구해야 할 것이다. 금석문에 기록한 연보를 보면 “고려우왕 2년(1376) 5월 16일 창원부 북면 내곡리에서 양장군 최운해 장군의 장남으로 출생하다. 6세에 모친 창원이씨 별세(양수척에게 위탁)”라 기록했다. 최윤덕 장군의 출생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록을 하면서 태어난 곳은 엉터리로 적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최윤덕 장상 생가 터 고증 중단되나’라는 제목의 경남도민일보 2011년 3월 24일자 이일균 기자의 기사에 의하면 최씨 문중에서 제공한 목판본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이 목판본에 의하면 ‘정열공 유지 창원북면’이라 적고 내곡리라 표기된 곳에 집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원광장에 세워진 말대가리를 치워야 하는 이유

최윤덕 상국(相國)이 왜 저곳 창원광장에서 해괴한 짓을 하고 있는지 창원시는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최윤덕은 영상(領相)을 지낸 사람으로 문(文)을 숭상하던 조선에서 문인(文人)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분으로 전쟁터나 누비는 일개 장군이 아닌데 그런 분을 영웅으로 만들자면서 전쟁이나 하는 꼴사나운 모습의 동상을 제작한 것은 영상(領相)을 장군으로 격하(格下)시킨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전쟁터에서 사람의 피 냄새를 맡으며 살았다 할지라도 적어도 장군의 모습이라면 전쟁에서 패하여 자신이 직접 활을 쏘는 급박한 상황의 모습은 아니어야 한다. 구국의 영웅이라 칭송하는 이순신의 동상을 보면 대체로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이지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제작하지 않는 것도 장수에 대한 예이기 때문이..

최윤덕장군의 영웅 만들기 왜하나?

창원시가 수십억원을 들여 최윤덕장군의 동상을 만들어 거리에 세워서 홍보를 하고, 생가지를 복구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정작 최윤덕장군의 정려각(旌閭閣) 하나도 돌보지 않는 다고 한다면 웃음꺼리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최윤덕장군은 1446년(세종 28년)에는 세종께서 친히 정렬공의 제문을 하사하였으며, 1450년(문종 즉위년)에 세종묘 배향 신하 중 1번으로 선정되어, 세종묘(종묘)에 배향된 인물이다.1683년(숙종 9년)에는 통천의 상열사에, 1707년(숙종 33년) 안주 청천사에 사액하고 을지문덕과 함께 제향하였으며, 이어 용천의 용천사에 사액하였다. 문종즉위년에 조선최초의 정려각을 창원에 세웠으며, 정조 3년, 정조 18년, 순조 18년, 헌종 5년에는 창원에 세워진 정려각을 각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