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창녕 지석묘의 주인공은 권력자일까

천부인권 2010. 2. 16. 11:27

 

 

 

예전에 한번 이곳을 탐방해 볼까하고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산위에 있다고 하여 포기를 했는데, 막상 가보니 얕은 구릉에 위치를 하고 있어 누구나 쉽게 접근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요즘은 진입하는 도로도 새로 만들었고, 주차장도 있으며 산위로 오르는 길도 잘 정비가 되어 있어 ‘지석묘(고인돌)’까지 접근하는 것엔 문제가 없다.

 

 

 

 

창녕 장마면 유리 산9번지에 있는 ‘창녕 지석묘(고인돌)’는 “원래 7기의 고인돌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무리지어 있었는데, 지금은 파괴되어 2기만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정상부에 있는 지석묘 아래에는 근래의 묘들이 들어와 있어 다른 것들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고인돌은 발굴당시 큰 규모의 상석에 비해 무덤의 방이 너무 작아 우리가 흔히 상석이 크면 권력도 강력했을 것이라는 것에 의문을 던져 주었다. 반면에 ‘창원 동읍 덕천리 지석묘’는 상석에 비해 무덤의 크기가 두 배 이상 되었고, 지석묘를 둘러싼 경계표석이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넓게 자리하고 있어 비교가 된다.

 

 

 

‘창녕 지석묘’는 철분이 매우 많은 화강암으로 보아 이런 성분의 화강암을 찾는다면 어느 곳에서 이곳까지 돌을 운반해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두어 옮겨 놓는다.
『창녕 지석묘(昌寧 支石墓)
경상남도 기념물 제2호
경상남도 창녕군 장마면 유리 산9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그 가운데 특히 규모가 크거나 부장품이 많은 것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네 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무덤 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땅 속에 무덤 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원래 7기의 고인돌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무리지어 있었는데, 지금은 파괴되어 2기만 남아 있다. 그 중 한개는 덮개돌이 있고 그 밑에 평평한 돌을 이용하여 길이 1m, 너비 0.3m의 돌 상자 형태로 무덤 방을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덮개돌이 없어지고 하부 구조만 남아있다.
길이 0.67m.너비 0.27m의 돌 상자 형태로 무덤 방을 만들고 벽면과 바닥도 정연하게 쌓아 그 위에 2중으로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이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구릉 밑이나 평지에 있는 다른 지역의 고인돌과는 달리,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이 고인돌이 지닌 학술적 가치는 바로 이 특이한 입지조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