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보덕각에서 만나 통곡하는 남강과 낙동강

천부인권 2010. 2. 18. 12:04

 

 

 

의령군 지정면의 유일한 등록문화재 보덕각과 쌍절각 있는 곳은 옛 기강나루터 자리이다. 이곳에서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 굽이치는 물길이 남지대교로 흘러간다. 맞은편 함안 대산면 용화산 기슭의 낙동강 가에는 합강정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곳 기강나루터는 낙동강 주물연진에서 올라오는 배가 계속 낙동강을 따라 올라 가거나 방향을 틀어 남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송로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곳을 방어하지 못하면 물길을 따라 내륙 깊숙이 적군이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두어 보덕각이 충익공 곽재우 장군을 기리는 것임을 알게 한다.
『보덕각(報德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82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름난 의병장 곽재우(義兵將 郭再佑)의 전공(戰功)과 유덕(有德)을 기려세운 불망비(不忘碑)를 보호하는 비각(碑閣)이다.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래 함안, 영산, 창녕 등지에서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리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739년(영조15)에 당시의 대첩지인 이곳 기강(岐江)에 “유명조선국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보덕불망비(有明朝鮮國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報德不忘碑)”라 새긴 불망비를 세웠다. 장군은 이곳 기강에서 언덕에 미리 의병을 매복시켰다가 낙동강(洛東江) 수로를 따라 이동하는 왜적의 선단(船團)을 크게 깨뜨렸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세간리 현수고에 북을 매달아 쳐서 최초로 의병을 모으니 겨우 10명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10명의 전사(戰士)가 이곳 보덕각이 있는 기강나루에서 왜군이 오기를 기다리며 매복을 하고 있다가 왜선2척과 마주쳐 전투를 하였다. 승승장구하던 왜구에게 달랑 10명의 의병이 싸운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불을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과 무엇이 다를까마는 홍의장군 곽재우는 멋지게 이곳에서 승리를 거둔다. 혼비백산한 왜선이 도망을 가고난 후 본격적으로 의병이 모아졌고 홍의장군과 함께 싸우면 승리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서 많은 의병들이 모였고 멀리서는 전라도에서도 의병이 오게 된다. 


낙동강과 남강을 따라 홍의장군 곽재우의 흔적들이 산재해 있는데, 창녕의 화왕산성과 도천면의 망우정, 남강을 굽어보는 의령 호미산성, ‘천강홍의장군’이라는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신화를 만든 의령 정암전투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구국의 영웅 곽재우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굶어 죽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이 있으니 처음 전투를 한 이곳 보덕각에서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 어찌 통곡하지 않겠는가!

 

왜구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이웃에 있는 합천에서도 쌍절각의 주인공 손인갑 장군과 그의 아들 손약해도 의병을 모아 황강과 낙동강을 오가며 전투를 하였다.


 

 

 

이곳의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쌍절각(雙節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82

 

손인갑 장군(孫仁甲 將軍)과 그의 아들 손약해(孫若海)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광해군(光海君)의 어명(御命)으로 광해군 원년(元年, 1609)에 건립한 것이다.
손인갑(1544~1592) 장군은 선조(先祖) 4년(1571) 무과에 급제한 후 가덕진 첨절제사(加德鎭 僉節制使)를 지냈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합천(陜川)에서 김면(金沔), 박성(朴惺) 등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성주 무계(星州 茂溪)에서 왜적을 격파하였으며 현풍(玄風)에서도 박응성(朴應成), 장기길(張寄吉)과 함께 왜적을 크게 무찔러 동래부사(東來府使)가 되었다. 그러나 부임하기 전 초계 마수진(草溪 馬首津)에서 잔적(殘敵)을 섬멸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그의 아들 손약해(1565~1592)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적진에 들어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당시 경상감사(慶尙監史) 김수(金睟)가 장군의 공적을 상소(上疏)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 되었으며 그의 위폐는 밀양 충효사(忠孝祠)에 배향 되었고 손약해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 되었다.
당초에는 후손들의 거주지였던 봉수면 신현리(鳳樹面 新峴里)에 세웠으나 1943년 5월 임진왜란의 전첩지(戰捷地)인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남강과 낙동강이 구국의 영웅들이 죽어가는 것을 통곡했다면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망해가는 고향을 두고 봐야 하는 주민들의 통곡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성산 일대 땅은 낙동강의 수위와 높이가 같아 논밭에 물이 올라오는데 낙동강 함안보가 생기면 습지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이곳 주민들은 오랜 생활의 터인 고향을 잃게 될까봐 통곡을 한다.

 

 

 

백성과 나라도 버리고 도망간 선조(宣祖)가 임진왜란을 평정하고 망한 조선을 살린 전쟁의 영웅들을 죽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4대강을 파괴하여 자신들의 이익만 채웠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그리고 진정 올바른 지도자라면, 신중하고 신중을 기하여 미래세대에게 부끄럽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소중한 것인지 당장의 이익을 위하여 4대강을 망쳐놓는 것이 좋은지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덕각 앞에 보덕각, 쌍절각이란 글씨를 새긴 비석이 서있는데 측면을 보니 <박통이 분부하여  의령군수 정규수가 세웠다.>고 적어 두고 있어 무엇이 옳고 그런지가 아니라 권력에 아부하여 자신의 공덕인양 자랑하는 못난 사람의 이야기도 사람들을 통곡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