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가덕도 외양포엔 뼈아픈 역사가 남긴 일본마을이 있다.

천부인권 2010. 7. 30. 11:53

 

 <고갯마루에서 바라 본 외양포마을 전경>

 

30여년 전에 마을 후배들과 용원에서 배를 타고 가덕도 대항에 내려 고갯길을 걸어서 외양포로 놀러 간 기억이 용원에 오니 문득 생각이 났다. 텐트는 남의 집 마당에 세워두고 낚시도 하고 물놀이도 하면서 신나게 놀았으나 저녁때 즈음 갑자기 폭풍이 불면서 비가 오기 시작하자 그 집 할머니께서 방에서 자라고 하여 태풍을 피한 추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나니 텐트는 부셔져 물속에 잠겨 쓸모가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 때 할머니께서 방에 재워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 일행을 손자들처럼 대하시며 아침밥을 할머니께서 손수 마련하여 공짜로 주셨는데, 그런 인심이 요즘은 아예 사라져 버린 세상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가덕도에 가고 싶어졌다.

 

 

<선착장에서 바라 본 외양포>

 

그때 가덕도의 주소는 의창군 천가면으로 창원군에서 분리 된지 얼마지 않은 때로 기억한다. 오로지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은 뱃길 밖에 없던 섬이었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주소도 부산시 강서구 천가동으로 바뀌었고 다리가 놓여 육지가 되었다. 정말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그때 마을 이름이 외양포인 줄은 몰랐지만 대항을 넘어 외항포마을이 보이는 언덕에 오르니 하나도 바뀌지 않은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일본 사령부발상지지 비석>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이곳에서 일본군 비행기격납고를 보았다는 생각이 나서 마을 어르신 분에게 물어보니 일본군 사령부자리가 마을 뒤에 있다고 하여 마을 뒤쪽 20m여를 올라보니 지금도 그대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의 시설물이 남아 있다. 돌을 쌓아 만든 수로(水路)와 군막사, 우물, 장교들 숙소 및 모든 건물들이 옛 모습 그대로 시간이 멈춰진 세상처럼 완벽하게 남아있다.


 

 <일본 사령부발상지지 앞뒤면>

 

 

사령부 진지입구에는 앞면에 사령부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라는 글을 새기고 뒷면에는 소화 11년 6월(1936)이라 쓴 비석이 있다. 탄약고와 곡사포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콘크리트 시설물 상부에는 대나무를 심어 외부로의 노출을 완벽하게 위장하였다. 입구에서 왼쪽 편으로 장방형의 건물이 있고 외벽은 붉은 벽돌로 쌓았고 그 안에는 폭 5m의 방 두 개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높이 4~5m , 폭 10여 m 크기의 시멘트 건물 두 동이 나란히 서있고 들어가는 입구는 한번 꺾어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습격에 대비한 것 같았다.


 

 

 <진지 내부 모습>

 


'일본축성사'(죠호지 아사미, 1971)'에 외양포 포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진해만 입구 양안(兩岸)에 저도(猪島)와 외양포에 임시로 축성한 것으로 명치 37년(1904) 8월에 착공, 12월에 준공한 것이다. 보조 건설물이 준공된 것은 1905년 2월이다. 이들 포대는 28㎝ 유탄포 6문 편성이다. 포를 설치한 것은 1905년 1월이다. 건축 재료는 이 지방에서 많이 나는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출처] (8)외양포, 시간이 멎은 공간|작성자 봉팔

 

 

 <일본 사령부발상지지의 풍경>

 


 

청일전쟁의 승리로 사기가 고조된 일본은 조선이 러시아에 아관파천을 하는 등 조선침략의 걸림돌이 되자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일본해군은 조선바다의 장악을 위해 진해가 가장 좋은 요새라 보고 이곳 가덕도 외양포와 거제도에 포대를 구축하고 진해로 일본해군을 집결시키고 러일전쟁을 감행하자 러시아는 발틱 함대를 파견하여 만회를 시도하나 1905년 5월 27일 진해 앞바다에서 일본군에 의해 러시아의 자존심 발틱 함대는 격파되고 러일전쟁에서 패하여 물러난다. 이후 조선은 패망하고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다양한 풍경들>

 

 

 <언덕에서 바라 본 진지의 모습>

 

 

 <일본 병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건물>

 

가슴 아픈 조선의 멸망을 바라보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이곳 가덕도 외양포는 일본에 있는 오래된 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풍경은 일본에서도 사라지고 없는 오직 이곳에만 남아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곳 외양포는 일본군이 패망하여 도망을 가고 난 후 대항마을 사람들이 초가집 보다 엄청나게 좋은 집들을 차지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이곳이 일본군 주둔지라는 것 때문에 진해 해군사령부가 관리를 하고 있다. 실질적 주인은 주민들이지만 법적으로는 해군사령부가 주인인지라 이곳이 개발되지 아니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는지 모를 일이다.


 

 

 <외양포마을의 여러 집들>

 

 

 <이런 집을 보노라면 시간이 멈춘것 같다.>

 

 

 <지붕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우물풍경>

 

마을을 둘러보면서 혹시나 30년전 폭풍우를 피하게 해 주셨던 할머니를 추억하며 기억을 더듬어 그 위치에 가니 할머니 한분이 일을 하고 계셨다. 그때의 일을 설명하자 방에 계시던 따님께서 할머니가 93세 되시며 그때도 여기에 사셨다고 하신다.
오랜 기억을 되살려 보니 아~ 그때 그 모습이 보인다.


참으로 반갑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마을 선착장 입구에 있는 가계로 가서 음료수와 과자를 사드렸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별것 있겠는가? 이렇게 옛 기억 하나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외양포는 일본이 아니라고 해도 일본으로 보여지는 곳이다.>

 

 

 <가덕도 등대가는 곳 언덕에서 바라 본 모습>

 

외양포를 문화전쟁의 표본으로 만들어 보자.

 

세상이 바뀌어 역사와 문화가 곧 돈으로 환산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100여년 전 일본마을의 모습이 외양포에는 그대로 남아있어 이제 주민들과 진해 해군사령부, 부산시는 외양포를 옛 일본 체험마을로 만들어 관광 상품으로 내어 놓을 때이다. 외양포의 주택을 옛 일본 집처럼 보수를 하여 일본 관광객을 유치한다면 이를 마다할 일본인은 없을 것이다.

 

일본이 우리의 자원과 옛 것을 빼앗아 갔다면 이제 우리는 높은 문화와 역사를 되파는 일들을 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 외양포로 오가는 배편을 만들고 가덕도 일원을 걸어서 여행을 하게하는 코스를 개발하고, 인근의 ‘가덕도 등대’와 ‘옛 방식 숭어 잡이 체험’도 하게하며, 외양포마을에서 숙식을 하게 하여 과거로의 여행에 정신까지도 놓고 그 재미에 푹 빠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항을 개발하여 일본인들이 가지고 온 돈을 모두 소비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연구하여 외양포가 받은 억압을 관광 상품으로 내어 놓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