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재잘단의 마을 역사탐방기 8월

천부인권 2010. 8. 27. 14:36

 

 

사)지역문화공동체 경남정보사회 연구소에서 “문화예술 교육활성화 지원사업”으로 운영하고 있는 재잘단의 마을 역사답사기의 일정이 달라져 8월 21일 아침에 용지공원 일대를 답사하기로 했다. 사림사회교육센터에 모인 아이들을 차량에 나누어 태우고 ‘새영남포정사’가 있는 용지공원에서 모두 모였다.


 

 

우리 마을 봉림동과 관련이 있는 봉림사지에서 일제에 의해 1919년에 반출되어 서울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던 것을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간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와 ‘진경대사보월능공탑’을 모사한 복제품이 있는 장소에서 탐방이 시작되었다.


 

 

이곳 복제기 비문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원래의 탑비(塔碑)는 신라(新羅) 구산선문중(九山禪門中)의 봉림사(鳳林寺)를 개산(開山)한 진경대사(眞鏡大師)의 탑(塔)과 비(碑)로 탑(塔)은 경명왕(景明王) 7년(923)에 비(碑)는 경애왕(景哀王) 1년(924)에 창원시(昌原市) 봉림동(鳳林洞) 176번지 봉림사(鳳林寺)에 안치(安置)되었던 것을 1919년 3월 일인(日人)들이 서울 경복궁(景福宮) 경내로 이건(移建)하였다.
이 탑비(塔碑)는 조각수법과 비문내용(碑文內容)이 역사연구(歷史硏究)에 귀중(貴重)한 자료(資料)이기에 탑(塔)은 보물(寶物) 362호 비(碑)는 363호로 지정(指定)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歲月)에 마멸이 심하므로 창원시(昌原市)에서는 그 원형대로 복제 (複製)하여 영구보전코져 이곳에 건립함으로서 많은 시민(市民)이 우리의 보물급 문화재(文化財)를 직접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탑(塔)은 높이 2.9m 화강암으로 만들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었고 특유의 온화(溫和)함은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의 대표적(代表的) 걸작이다.
비의 조각은 구부(龜趺)에 용두(龍頭)가 특이(特異)하여 구갑문(龜甲紋)과 비신(碑身)양측면의 운용문(雲龍紋) 등은 짜임새가 뛰어나고 이수반용 등의 조각기법은 당시대 비 중에서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원래의 비는 밑면이 수평으로 절단되어 원각자(原刻字)가 인멸(湮滅)된 것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서 보완(補完)하였고 판독 불가한 것을 비워두었다. 비문(碑文)은 왕(王)의 친찬(親撰)이며 전액(篆額)은 최인연(崔仁渷) 비문(碑文)은 문하승행기(門下僧幸期)의 서(書)이다.

1990年 11月 16日
창 원 시 장 (昌 原 市 長)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는 특히 비신을 지고 있는 용생구자의 첫째 비희의 모습에서 발가락을 보면 앞발은 5개이고 뒷발은 4개이다. 이는 거북이 전진을 하기 위해서 뒷발의 마지막 발가락을 지렛대처럼 만들어 안쪽으로 꺾었기 때문에 4개로 표현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왕의 비신을 지는 비희는 앞. 뒤 발가락이 5개이지만 왕이 아닌 사람의 비석에는 뒷발가락을 4개로 하여 신분을 나타낸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재 거북은 앞. 뒤 발가락이 5개 이지만 악어는 앞발가락은 5개이고, 뒷발가락은 4개이다.

 

 

이탑은 조각수법으로 보아 1,100여년전 통일신라시대 때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으로 창원시 천선동 산 203번지 불모산 기슭에 도괴(倒壞)되어 흩어져 있던 것을 1973년 창원시에서 문화재 보호를 위해 발견하였으며, 원형으로 복원하여 1989년 1월 30일 이곳 용지공원에 세우게 되었다. 1.2층 옥개석과 1층 탑신, 지대석 및 상대 중석은 원래의 석재이다. 기단부와 2.3층 탑신 및 3층옥개석과 상륜부는 새로 만들었다. 고 기록하고 있으며, 복원 과정에서 풍경을 다는 곳을 만들지 않아 새로 만든 것은 쉽게 구별이 된다.


 

 

창원이라는 지명이 탄생하여 600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불망비’ 등 비석을 관직재임 시대 순으로 배치하여 둔 비석군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1975년 이후 창원 신도시 개발과정에 각각의 마을 앞 길가에 세워져 있던 비석들이 마을이 사라지면서 경남대학교에도 가고 용지공원에도 몇 기를 옮겨 두었는데, 이를 이곳에 모두 모아 26기를 세워 두었다.

 

창원시는 자랑스런 역사에 대한 자긍심 고취와 교육의 자료로 편하게 활용하기 위해 모아 두었다고 하지만 역사는 그 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렇게 모아두면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원래의 곳에 복구할 수 있는 비석들은 본래의 위치로 옮겨 놓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 비석 중 특이한 공덕을 칭송하는 것이 있어 옮겨 적어 본다.

 

부사 신후 명식 이교불망비(府使申侯命式移校不忘碑)


猗歟我侯 오! 훌륭하신 우리 원님이여!
爲政在要 고을 다스림에 갖출 자질 다 지니셨네.
毁撤佛事 절을 헐어 치워버리고
移建聖廟 향교를 옮기어 지으셨다.
功重士林 선비사회에 큰 공을 이루었고
悳及鄕黨 고장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었네.
故玆鐫石 이런 까닭에 이를 돌에 새겨두나니
永恩不忘. 영원히 그 은혜 잊지 않으리이다.

 

무자(1708)년 2월  일에 세우다.

 

부사 신명식이 절을 없애고 향교를 지었으니 선비들이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비석을 세웠다는 것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실천하는 것이 당대에는 미덕이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이곳에서 잠시 간식을 먹고 더위를 피하다가 ‘고향의 봄’ 비갈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봉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로 시작하는 동원 이원수의 노랫말이 적혀 있는 비갈은 돈만 들였지 왠지 조잡한 느낌을 주는 비갈이다.
이 땡볕에 서서 말하기가 어려워 아이들에게 “이렇게 우리가 우러러볼만한 업적을 지닌 사람이 친일을 하여 역적이 된 것은 그가 죽기 전에 잘못을 스스로 말하지 않았기에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실수를 하면 꼭 사과를 하시기 바랍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새영남포정사’ 아래로 들어가 그늘을 만나니 아이들은 신이 났다.
“1983년 7월1일 경상남도청이 창원시로 이전됨에 따라 이곳이 도정의 중심지임을 알리고 도민과 시민에게 새로운 긍지를 심어주는 상징적 건물로서 옛날 경상남도 관찰사의 관문으로 사용되었던 "영남포정사"와 같은 모형 그대로 이곳 용지공원에 새로 건립 하였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얼음과자 하나씩 입에 물고 최윤덕 장상의 신도비가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이 최윤덕 장상 신도비의 비희와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의 비희가 어떻게 다른지 물어보고 뒷다리의 개수가 왜 다른지 알아보라고 하면서 이분의 별명이 축성장군이라는 것과 대마도정벌에 참가했다는 것을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해병대 전적비가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예전에 해병대 대대가 이곳에 있어 진해에서 훈련을 받는 훈련병들은 안민고개를 넘어 이곳에 와서 훈련을 받았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기념탑을 세운 것과 이곳에 간간히 있는 차나무는 일제시대 때 이곳 인근에 일본인의 차밭이 있었는데 그 때의 차씨가 남아서 여기에 차나무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이야기를 하였다.
오랜 시간 더운 날씨에도 잘 따라준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처음 만났던 사림사회교육센터로 돌아와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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