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한 많은 땅 가덕도에 나그네가 되어보면

천부인권 2010. 8. 1. 12:20

 

 

 

<천가초등학교 가는 길에서 바다 풍경>

 

큰 덕을 더 보탠다는 섬 가덕도는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아 왔지만 섬이 작아 그런지 항상 외부의 힘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덕도는 동해와 남해가 연결되는 바닷길에 자리 잡은 탓에 오래전부터 왜구의 끝임 없는 침입을 겪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대륙침략 전진기지가 들어서기도 하는 등 우리나라가 겪은 통한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 사령부가 주둔하였던 외양포에는 일본군 포대시설과 방공호 등 당시 시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민초들의 고난의 역사가 그대로 보인다.

 

가덕도가 속한 주소의 변천사를 보면 1895년 현대식 군제개편에 따라 가덕진 천성진을 패진하고 웅천군 천가면이 되었다가, 1906년에는 웅천군 가덕면 천가면으로 분리가 된다. 그리고 1908년 창원부 천가면으로 합면이 되었다가, 1910년 마산부 천가면으로 또 다시 바뀌었다. 1911년에는 창원군 천가면 으로 편입되고, 창원시의 신설로 1980년에는 의창군 천가면으로 변경되었다. 현재에는 부산시의 확장 야욕으로 1989년 모든 근본을 버리고 부산시 강서구 천가동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렇게 수 없이 주소가 바뀌지만 단 한번도 원주민들이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웃지역의 이기에 따라 주소가 이렇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경상남도에 속해 있던 섬이 어느날 부산으로 편입되어 주소가 부산시 강서구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뭔지 모르겠지만 어색해 보인다. 이름만 부산시이고 실질적 혜택은 전혀 없다. 부산시라면 그에 걸맞게 도로도 확장하고 기간시설부터 해야 할 터인데 그러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거가대교 만든다고 가덕도를 쪼개어 먼지와 오염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가덕도에 당도하여 선창마을에서 좌측방향으로 얼마가지 않아 독립유공자 김근도상이 나온다.

 

김근도(1900~1983)는 경남 창원 사람으로1918년 일본 오오사까로 건너가 법랑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일제의 한국통치와 재일 한인에 대한 민족차별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민족의 번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조국의 독립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심하였다. 1936년 4월 동향인 이수용, 이수강,김성규 등을 규합하여 재대판가덕인친목회를 조직한 그는 이후 약 두 달간에 걸쳐 회합을 갖고 일제의 민족차별정책과 한국 강점에 대해 비판하는 한편, 한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는 우리가 일치단결로 봉기하여 우리의 국토를 일본으로부터 탈환하고 독립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을 역설하여 회원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후 동 단체가 일제 당국의 압력으로 해산되자, 1939년 2월 초순경 오오사까 주재 가덕인 청년을 결집하여 새로이 가덕인청년부회를 결성하고 일제의 한민족 차별정책 등을 비판하는 한편, 1940년 11월까지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하도록 격려하다가 체포되었다.
1942년 9월 30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22일부터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8일 형 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가덕도 내 현충시설 탐방 - 애국지사 김근도 상

 

 

 

지금은 성북동이라 불리는 천가동주민센터와 파출소 천가초등학교가 있는 곳에는 조그만 공터가 나온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자동차한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곳이라 일방통행을 하게 되어 있다.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천가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가덕도 척화비가 서있다.
비의 크기는 1.28m×1.45m×0.16m인데 비문에 새겨진 글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我戒萬年子孫’(‘서양 오랑케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이라 적혀있어 당시의 급박한 세상사를 엿보게 한다.

 

가덕도 척화비(加德島斥和碑)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성북동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외양포 방향으로 가다보면 신항만 매립공사가 한창이다. 바다를 매립하여 부두를 만든 것이 지금 당장은 이로울 수 있으나 바다의 자생력을 파괴 하는 것이 먼 미래에도 과연 옳은 일일지 모를 일이다. 선창에서 100m여를 가다보면 가덕도 안내 비가 세워져 있다.


 

 

길을 따라 곧장 가면 신항만 매립으로 바다를 잃은 율리가 나온다, 계속 가다보면 장항마을이 나온다. 가덕도에서 제법 큰 마을 이었으나 이곳은 바다가 매립되어 섬속에 바다가 없는 마을로 변했다. 장항에서 두문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른 산 능성을 지나게 된다. 오르다 보면 전망대라 할만한 곳이 나타난다. 이곳은 신항만과 거제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산을 넘어 다시 바닷길을 가다보면 조그만 두문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지석묘가 있다고 하였지만 그냥 스쳐 지났다. 다음으로 만나는 마을이 가덕도에서 가장 큰마을 천성마을이다. 천성마을에는 왜구의 가덕도 상륙을 막기 위해 만든 천성진성이 아직도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 임진왜란 당시 우리 수군이 안골포에 정박해 있는 왜군 함대를 공격할 때 우리 수군의 후방을 지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한다. 외양포를 가기위해 천성마을에서 대항마을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사진 한 장 남겼다. 천성마을 위쪽으로 가덕대교가 지난다. 그리고 곶부리에 휴게소를 만드느라 산을 온통 파헤쳐 두었다.


 

 

 <가덕대교의 휴게실을 만들고 있는 곳>

 

 

대항마을로 들어가는 언덕에서 대항마을 풍경을 남겨 두었다. 대항은 가덕도 섬에서 가장 잘록한 지형으로 언덕하나 넘으면 대항 세바지마을이 나온다. 여기서는 부산시가 보이고 저멀리 잃어버린 우리 땅 대마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외양포 마을은 “가덕도 외양포엔 뼈아픈 역사가 남긴 일본마을이 있다.”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외양포 마을로 가는 언덕에서 바라본 대항>

 

 

<대항세바지에서 만난 염소 떼가 사람을 슬며시 피한다.>

 

 

<세바지 언덕에서 바라온 바다 풍경>

 

 

 <세바지 마을 풍경 연대봉의 외톨괴 바위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