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가산리 석장승과 방갈새미의 전설을 만나(경상남도 민속자료 제3호)

천부인권 2010. 8. 19. 07:23

 

 

<고속도로 교각 아래에 있는 마을 입구 석장승 좌측>

 

창원에서 네비에 주소를 입력하고 출발하니 고속도로를 따라가다가 축동IC로 나가라고 안내를 한다. 축동IC를 빠져나가니 1002지방도로를 우회전하여 가라고 한다. 우회전하여 320m여를 가니 1002지방도는 고속도로 밑으로 지나지만 네비는 좌회전을 하라고 하여 지방도를 벋어나 가산마을로 진입하니 마을회관 앞에서 정지를 한다.

 

가산리 석장승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아 마침 회관 앞 정자에 계시는 분에게 “석장승을 보러 왔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고 하니 선 듯 “어제 풀을 깎아서 그래도 볼만 합니다.”라며 앞장서서 안내를 해주었다. 마을에서 내려가는 방향으로 고속도로 교각 아래에 작은 길을 마주보고 우측은 문인석 모양이, 좌측은 총각 모양을 한 화강암으로 만든 석장승이 각각 쌍을 이루어 몸에는 왼쪽으로 꼰 새끼를 몸에 두르고 가슴 쪽에는 한지를 달고서 서 있다.


 

 

<고속도로 교각 아래에 있는 마을 입구 석장승 우측>

 

이 두 쌍의 석장승은 옛 것이 아니라 새로 복원한 것임을 조그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알 수 있다. 안내를 해주신 마을 주민분에게 다른 석장승은 어디에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하니 안내를 할 테니 차를 타고 가자고 한다. 차를 타고 마을길을 따라가니 고속도로 밑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또 들어간다. 가산 마을은 고속도로로 인해 마을자체가 분리되는 엉망이 된 마을이었다. 한때는 조창으로 인해 많은 세곡이 집결되는 관문이었지만 지금은 고속도로가 마을의 모든 맥을 끊어 놓은 모습이다.


 

 

<당산나무 아래에 있는 석장승>


 

마을 입구 석장승이 있는 곳에서 500m 정도 오면 가산오광대 전수관으로 가는 길이 나오고 여기서 200m여를 더 내려가면 길 위쪽에 있는 옛길 옆 당산나무 아래에 한 쌍의 석장승이 있고 맞은편 산 쪽으로 또 한 쌍의 석장승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서 있는 석장승은 옛 모습 그대로 표정과 모습을 하고 있어 진짜 민속자료 제3호 임을 알게 된다. 이곳의 석장승은 6.25사변 때 인민군이 장난삼아 쏜 총탄의 흔적이 있어 안타까움이 더한다.


 

 

<길 윗쪽의 석장승 모습>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가산리 석장승(駕山里石長丞)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3호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626-1

 

장승에는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다. 장승의 기원은 고대의 성기숭배(性器崇拜)에서 나왔다거나, 사찰토지(寺田)의 표시로 나왔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장승이 지방에 따라 벅수, 벅시, 법수, 수살목, 당산할배 등으로 불렸다. 이곳 가산에는 가산창(駕山倉)이라는 조선시대 조창(漕倉)이 있어, 이웃한 7개 군현의 세곡(稅穀)을 모아 바닷길을 이용해 서울로 올려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현감은 세곡을 실은 배의 무사운행을 늘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뱃길 보호와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며 이곳에 돌장승을 세워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남장승 두 쌍과 총각장승 두 쌍 등 모두 네 쌍의 돌장승이 서있다. 남장승과 총각장승은 각 한 쌍씩 짝이 되어 마을 입구와 그 곳으로부터 650m 떨어진 당산나무 아래에서 마주보고 서 있다. 남장승은 사모(紗帽)를 쓰고 관복을 입은 문인석(文人石)의 모습이며, 총각장승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관복을 입고 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총각 장승은 원래의 것이 분실되어 1980년 12월 5일에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이들 장승은 조창이 폐쇄된 이후 조창을 보호한다는 원래의 역할 대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마을을 안녕을 비는 장승제가 거행 되었다. 그리고 장승제가 끝나고 나면 흥겨운 ‘가산오광대’가 공연 되었다고 한다. 요즘도 정원 대보름에 ‘천룡제’를 지낸다.

 

 

<윗쪽에서 길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길에서 옛길 방향으로 찍은 사진>

 

 

<방갈새미에서 물을 떠주는 주민 한휘영씨>

 

농아인도 3년만 마시면 말문이 트인다는 “방갈새미”

 

이곳에서 들판을 넘어 마주하는 곳에 ‘농아인도 3년만 이 물을 마시면 말문이 트인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방갈새미’가 있다.

 

 

 

<물이 시원하고 깔끔했다.>

 

이곳에는 ‘방갈새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명칭 : 방갈새미
분류 : 가산마을 문화재/우물
소재지 :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708-1
시대 : 조선시대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막아주는 우물이라는 의미의 방갈새미는 예부터 가산마을의 식수원으로 쓰이던 우물로서 1760년(영조 36) 가산창이 설치되면서 300여 세대의 마을 주민과 1,000여명의 조운인력들이 함께 사용했던 요긴한 우물이었다.
가산마을 천용제(동제)에 쓰이던 정화수를 공급하던 우물로서 천용제 전날 금줄을 치고 덕석을 덮어 신성시 하였다.
상수도 공급으로 방치되었다가 2009년 6월 정화사업을 통해 복원되었다.

 


이곳까지 안내를 맡아준 가산마을 주민 한휘영(50)씨 덕분에 마을의 소소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또한 이 방갈새미의 물은 차갑고 시원하여 일반적인 약수터의 물보다 훨씬 맛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속도로 터널을 지나 들어가면 가산 오광대 전수관의 공터가 있고 위에 전수관이 있다.>

 

 

<가산 오광대 전수관 담 벽면에 서있는 석장승>

 

 나오는 길에 가산오광대 전수관으로 가보니 매월 둘째 일요일 오후 2시에 무형문화재 무료 강습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수관 안으로 들어가니 담벽에 목이 뿌러져 때운 흔적이 있는 총각장승 하나가 서 있었다. 이것에 대해 가산마을 주민 한휘영씨는 옛날에 작업을 하다가 목이 뿌러지는 바람에 이곳에 옮겨두었다고 하는데 얼굴의 표정이 지금까지 본 것과 달라 이 것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왼쪽은 문화재청 사진이고 오른쪽 2기는 현재 복구된 석장승이다.>

 

문화재청에서 찍어둔 사진과 1980년 마을입구에 복구하여 세워둔 석장승의 얼굴 표정과 복식이 달라 복구의 의미가 반감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