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생각하다

최윤덕 장상의 본가 터 위치가 맞을까?

천부인권 2011. 2. 12. 14:56

 

<사진출처 : 창원문화원 [최윤덕장상]-초상화의 상식이 없는 그림>

 

1962년 김종하씨가 펴낸 창원군의 연혁·산천·고적·인물 및 금석문을 기록한 향토지인「창원군지(昌原郡誌)」 p14쪽에는 최윤덕 장군이 정자를 세우면서 기록한 ‘호연정기(浩然亭記)’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호연정기(浩然亭記)
최윤덕(崔潤德)

여래자금계(余來自金鷄) 신모기축(神耗氣縮)
심가려득일명구(尋佳麗得一名區) 시내석각정야(是乃石角亭也)
전일지신모기축(前日之神耗氣縮) 자(者) 어언활래(於焉豁來)
고원취추부자선류지의(故遠取鄒夫子善類之意) 명지어정이자지의(名之於亭二字之義) 유한호천지지간이(惟寒乎天地之間耳)
이시명오정(以是名吾亭) 기무한안재(豈無汗顔哉)
후지인휴소언(後之人休笑焉)

내가 금계에서 오니 정신이 소모되고 기력이 감축되었다.
아름다움을 찾아 뛰어나게 경치가 좋은 곳을 얻으니, 이는 곧 석각정(石角亭)이다.
전일 정신이 소모하고 기력이 감축된 것이 활연해 지고, 상쾌하게 되었으므로, 멀리 추부자(맹자)의 호연지기(공명정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를 잘 기르는 뜻으로, 정자에 이름을 붙이니, 이 두 자의 뜻은 오직 천지간에 꽉 찼을 뿐이다.
이로써 내 정자 이름을 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후대 사람들이여 비웃기를 멈출지어다.

사진출처 : 창원문화원 [최윤덕장상]

 

1962년 김종하씨가 펴낸「창원군지(昌原郡誌)」의 p69쪽에는 “공(公)이 만연(晩年)에「호연정(浩然亭)」을 건축하여 가일(暇日)로서 유상(遊賞)하였다. 그의 거제부근(居第附近=현재의 인곡리)이였으리라 추측(推測)한다.”고 적어 두어 당시 김종하씨는 최윤덕 장군의 본가가 있던 창원시 북면 인곡리에 ‘호연정’을 세웠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현재 창원시가 최윤덕장상의 본가를 복원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본가의 위치가 정확한지에 대한 검증이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진다. 김종하씨가 펴낸「창원군지(昌原郡誌)」를 참고해 볼 때 오히려 호연정의 자리가 현재 창원시가 최윤덕장군의 본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이유는 옛날 집에는 뒤편에 대나무를 심어 농기구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지금 창원시가 주장하고 있는 곳에는 그러한 흔적이 없다. 그리고 본가 건물터였다고 하는 위치는 마을의 맨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의 마을과는 동떨어진 위치라 마을을 형성하는 중심적 역할을 했을 최윤덕장상가의 위상으로 볼 때 맞지 않다.

 

창원시가 본가 터였다고 주장하는 자리가 만약 최윤덕장상이 만연에 건축한 ‘호연정’이 자리한 곳이라 생각해보면 이곳은 마을을 굽어볼 수 있는 높은 위치에서 뒤쪽은 산으로 이어진 곳이라 정자를 지어 벗들과 호연지기를 논할 만한 곳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을과는 거리를 두고 있어 사색과 담소의 장소로서 더없이 좋은 곳이다.

 

 

 

 

 

1962년 김종하씨가 펴낸「창원군지(昌原郡誌)」p67쪽 최윤덕(崔潤德) 편을 보면 아래와 같이 적어 두었다.

“왕조실록(王朝實錄)’에는 윤덕(閏德)이라하였다. 자는 ‘여화(汝和)(일자 백수(一字 伯脩)) 호(號)는 호연정(浩然亭)이다. 양장공최운해(襄莊公崔雲海)의 자(子)이다. 고려우왕병진(高麗禑王丙辰)에 본군북면내곡리(本郡北面乃谷里) 무등촌(武嶝村) 이목평(梨木坪)[지금 무동리 입구에 윤덕의 출생한 고기(古基)가 있다.]에서 출생하였다 한다. 무릉산(武陵山) 풀이 삼년간 마른 후에 공(公)이 출생하였다 한다. 윤덕이 육세(六歲)되던 신유년(辛酉年)에 어머니 양씨(楊氏)가 별세하고 운해장군(雲海將軍)은 변진(邊鎭)의 임지(任地)로 떠나가지 않을 수 없으므로 부득기 양수척가(楊水尺家)에 윤덕을 탁양(托養)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수척(揚水尺) : 지방(地方) 관청(官廳)에서나 행군(行軍)할 때에 물을 길어 나르던 사람.
*양수척(楊水尺) : 고려와 조선시대 천인계층의 하나.
*양수척(楊水尺) : 청주양씨 이름이 수척인 사람.

 

 

 

 

창원시가 배포한 최윤덕 장상의 연보를 보면 ‘1376년(고려 우왕2년) 양장공 최운해장군과 정숙부인 창원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속칭 정승골에서 최윤덕장상이 출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가 되는 창원이씨의 근거로는 [증보문헌비고 - 제47권 - 제계고 8 - 부족씨족 2 - 이씨]편에 창원이씨가 나와 있다고 했지만 이 문헌에는 이씨 성을 가진 84가문의 본이 나와 있지만 창원이씨는 없었다.

 

창원이씨가 언제 시조를 이루며 탄생하는지는 몰라도 창원이씨의 근거로 제시한 문헌에 없는 것으로 볼 때 김종하씨가 펴낸「창원군지(昌原郡誌)」에서 주장한 “윤덕이 육세(六歲)되던 신유년(辛酉年)에 어머니 양씨(楊氏)가 별세하고 운해장군(雲海將軍)은 변진(邊鎭)의 임지(任地)로 떠나가지 않을 수 없으므로 부득기 양수척가(楊水尺家)에 윤덕을 탁양(托養)하였다.”는 고증이 맞은 것이 아닌지 의문이 간다.

 

 

 

 

창원문화원에서 저자 박동백이 1997년 발행한 「최윤덕장상」이라는 책에 보면 “장군의 묘소 뒤편에 두기의 민묘가 있는데, 이 민묘에서 발굴된 파비(破碑)에 「최운해처정부인이씨지묘(崔雲海妻貞夫人李氏)」라는 글귀가 있다.”고 한다.
최운해장군의 부인이라면 청주양씨처럼 누구의 딸인지 명확히 나타날 것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인 창원이씨와 혼인을 했다는 이야기는 신뢰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그리고 파비(破碑)에서 나온 글귀 하나가 역사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파비라는 것은 문제가 있어 스스로 파괴한 비석에 불과한데 무엇이 문제가 되어 파괴했는지 증명하기 어렵고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는 비문을 적어 두는데 비문이 발견되지 않는 파비가 과연 어떤 효력이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파비는 파괴된 비석일 뿐이지 역사의 사실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일전에 창원의 항일정신으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배중세지사의 비석에서처럼 다 만든 후에 잘못된 기록으로 인해 비석을 파괴하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창원시가 최윤덕장상의 본가를 복구함에 있어 신중을 기하여 이러한 의문들을 완전히 해소한 다음 복구하여도 늦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