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생각하다

1000년 전 진경대사 득도한 동굴을 찾다.

천부인권 2011. 4. 26. 18:52

 

 

 

진경대사眞鏡大師(853~923)는 임나(任那)의 왕족으로 853년(문성왕 15년) 12월 10일에 출생한 김유신(흥무대왕)의 후손이다.  862년(경문왕  2년) 혜목산 원감대사 현욱(玄昱)에게 출가하여 872년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오랜 세월 동안 명산대찰의 순례를 마치고, 김해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을 찾던 중 김해 진례에서 머물 때 대사의 도(道)를 사모하는 진례성제군사 김율희(進禮城諸軍事 金律熙)을 만나 후원을 받아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이름을 “봉림(鳳林)”으로 고치고 선방을 중건했다. 923년(경명왕  7년) 4월 24일 입적하자 왕이 조문하고 시호(진경대사 : 眞鏡大師)와 탑호(보월능공지탑 : 寶月凌空之塔)를 내렸다.

 

 

 

 

 

퇴촌동 원주민인 선배가 옛날부터 정병산에는 진경대사가 머물며 득도를 한 동굴이 있는데, 자신이 어렸을 때 한번 가본 기억이 있지만 그 동굴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다고 하면서 동굴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를 하였다.
퇴촌동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런 동굴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그 동굴이 있던 곳은 소풀먹이러 다니던 곳으로 큰 바위아래에 돌을 다듬어 사람이 기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정병산 일대를 몇 번에 걸쳐 찾아보았지만 허탕이었다.


옛날 퇴촌동에 살았던 원주민 중에 이 동굴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을 우연히 만난 선배가 4월 24일에 동굴을 탐방하기로 약속을 하여 방문해보니 어릴 때 보고 상상하던 것보다는 초라했지만 동굴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월요일 오후에 동굴을 찾아서 선배와 함께 정병산을 올랐다.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의 비문에는 “이 절은 비록 지세가 산맥과 이어지고 문이 담장 뿌리에 의지하였으나, 대사는 수석이 기이하고 풍광이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대사(大士)의 정에 과연 마땅하며 신인의 □에 깊이 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바야흐로 가마를 멈추고, 이름을 봉림(鳳林)이라 고치고 선방을 중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동굴이 있는 곳으로 올라보니 전번에 한번 동굴을 찾아서 와봤던 곳이었다. 그때에도 바위의 모습을 보고 사진으로 남겨 두었는데 반신반의 하면서 하산을 했던 것은 동굴의 바닥이 장방형의 큰돌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선배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위 아래는 동굴이 있어 잠을 청할 수 있는 곳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에는 굵은 아카시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굴 입구에는 동굴을 막아 둘 수 있는 돌들이 흩어져 있고 누군가가 여기에서 오래전에 맥주를 먹고 버려둔 캔맥주 통이 있다.


 

 


 

동굴 안의 바닥은 돌을 편편하게 깔아둔 흔적이 있고 한사람이 누워서 잘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 이 동굴을 퇴촌마을 사람들은 도둑놈 굴로도 불렀으며 퇴촌마을에서 이곳까지 지하 동굴로 연결 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한다.


 

 


 

바위의 뒤쪽으로 가면 바위 위로 올라가기가 쉽게 되어 있어 바위에 올라 창원시 전경을 보니 서쪽으로는 삼신산으로 불리는 하늘을 떠 바치고 있다는 천주산이 보이고 그 앞에는 낙남정간을 이어가는 봉림산과 창원골프장이 눈 아래 들어오고, 그 우측으로 신풍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검산성과 구룡산성도 이곳에서는 보인다. 바위에 앉아 정면으로는 창원시와 안민고개, 봉암갯벌 등이 모두 보이는 확 트인 시야를 확보한 곳이라 군사적 전망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정병산을 올려보면 부엉이 굴이 있다는 곳과 일직선상으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어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는 보월능공탑비의 비문과도 일치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천주산의 모습은 “준마가 서쪽 봉우리에서 노닐고”라는 비문의 이야기와도 일치하는 곳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1000년의 세월을 꿈길처럼 넘나들며 상념에 빠져보니 “달마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가 마음을 전한 이래로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거늘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을 참알하였고 바야흐로 꽃다운 티끌을 접하였으니,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을 가지고 뗏목을  탈 뜻을 근심하리오??라 말한 진경대사의 법문이 바람이 되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