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제일여고는 술의 신 ‘송미신사’ 터이다.

천부인권 2012. 10. 3. 06:00

 

 

<1011/08/27 제일여고 정문>


일제가 우리민족을 힘으로 제압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도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민족의 정신을 왜곡하고자 만든 것이 신사(神社)였다. 당시에는 일제가 지배하던 도시에 대부분 신사를 세웠는데 술의 신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는 마산 제일여고 자리이다. 지금은 제일여고 뒤에 큰 도로가 나 있지만 신사의 뒤쪽은 산이었다. 바다에서 보면 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급하게 상승하는 길의 끝이다. 길 양옆에는 벚나무가 즐비했고 길바닥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으며 신사의 신주문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조선인이 거주했던 구마산 지역 산제당 가는 길의 꾸불꾸불하고 아기자기한 산길과는 몹시 대조적인 길이다.

 

 

<제일여고 정문에서 바다를 바라본 풍경 돌계단과 일직선상의 도로가 의미하는바가 많다>

 

신주문 앞의 왼켠 마당에는 큰 대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대포도 신사와 함께 동향으로 서서 마산합포구를 내려다보았다. 창원 마산합포구의 지붕에 일본의 식민정책을 상징하는 두 가지상징물이 나란히 있었던 셈이다.

대포는 고 김형윤씨의 글에 의하면 일본 조병창에서 건조된 것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창원 마산만 중포병 대대 입구의 산정에 두었다가 대대장이 1935년 마산부에 기증했고, 마산부는 이것을 신사 앞에 거치시킨 것이다. 광복 후에는 대포는 공터에 그대로 있었는데, 어느 날 ‘친일철공소’라는 고철공장이 당시 마산시의 허가를 받아 망치로 두들겨 분해해서 뜯어 갔다고 한다. 일제침략을 증명하는 역사적 유물이 안타깝게도 고철로 처분되어 버린 것이다.

 

 

<제일여고 내 연못>

 

당시 우리나라 청주 6할 생산 ‘주호신(酒護神)’ 모셔

 

신사 주변과 신사로 올라가는 길가에 즐비했던 수많은 벚나무들은 6·25 전쟁을 전후해서 주민들에 의해 모조리 베어져 땔감이 되었다. 배일감정도 있었지만 광복 후의 심각했던 물자난이 큰 몫을 했다. 건축자재를 구한다는 것도 몹시 어려워서 집을 새로 짓기보다는 일본인들이 쓰던 건물을 가급적 그대로 고쳐 썼다. 마산합포구 신사건물은 ‘신마산교회’에 의해 잠시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가, 1947년 제일여고의 전신인 마산 가정여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교사(校舍)로 썼다. 가정여학교는 신사의 본전건물을 교무실과 교장실로 썼고 부속건물을 교실로 사용했다. 부속건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아서 몇 년 전 허물 당시까지 학교 민속관으로 사용해 왔다.

 

 

 

학교와 학교주변에 아직도 신사의 흔적이 몇몇 남아있다. 학교 안과 바깥에 있는 길고 넓은 돌계단이 옛 신사계단이다. 돌계단은 일제하에서 마산부민의 근로봉사 작업이라는 명목의 강제노역에 의해 조성된 것이었다. 근로봉사작업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지금도 제일여고에 가면 입구의 돌기둥을 받쳤던 주춧돌이 교정의 정원석으로 남아있고 담벼락에는 축조발기인이라고 밝힌 일본인의 이름을 음각한 돌도 박혀있다.

그리고 제일여고의 정문이 신사의 신주문을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물론 의도적으로 신주문을 모방하지는 않았겠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럴싸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마 계단 아래에서 바라본 육중한 문이 보는 사람을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과 옛 신사에 대한 기분 나쁜 기억이 엉키어서 불러낸 느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설립자 이형규씨에 의하면 이 문은 전주체육관의 정문을 보고 와서 그대로 설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신토는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없이 취락별 민간신앙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도시마다 그들이 받드는 주제신(主祭神)도 다양했다. 주제신은 천황가의 조상신이라고 생각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가장 많고, 역대의 천황, 유명한 귀족들, 무사나 문신, 각 씨족의 조상신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사에 모셔놓고 있다.

 

 

 

제일여고 옛 신사 흔적 남아

 

이와 같은 공식화된 신사 이외에 일본에는 별별 희한한 귀신들을 모시는 곳이 많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는가 하면, 개를 모시는 신사, 술신을 모신 신사, 된장신을 받드는 신사, 김치를 받드는 신사, 만두를 섬기는 신사, 부뚜막을 받드는 신사, 젓가락을 받드는 신사, 냄비를 받드는 신사, 굴뚝신을 받드는 신사, 쌀을 받드는 신사, 물을 받드는 신사, 곳에 따라서 남근(男根)이나 여음(女陰)을 제신으로 하는 신사도 있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도하신사(稻荷神社)라고 하는데, 광복 이전의 한반도에도 마산을 포함해서, 서울 남산, 인천, 목포, 부산, 진해, 진남포, 신의주, 용천, 성진 등지에 있었다.
마산신사의 본전에는 천조대신을 봉안했지만, 경내 오른쪽에 여우를 모신 도하신사(稻荷神社)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병설했다.

마산합포구에 송미신사를 특별히 세운 것은 기후와 수질이 양조에 적합하고 일제 당시에 우리나라 청주의 6할을 생산하다보니 술의 고장이라 불렀다. 일본인 양조업자들은 일년에 한차례씩 송미신사 앞에서 성대한 제를 올렸다한다.

일본인은 원시신앙에 머물러 있던 신토를 일본 천황의 가계에 맞추어 조직화하고 제도화하면서 그들의 세속적 지배에 유리하게 변질시켜 왔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일본황실의 조상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천조대신의 직계종손인 역대의 천황은 만세를 일계로 이어나가는 현인신이다. 천조대신은 그의 직계손인 천황이 통치하는 일본국을 항상 보살펴 주고 보호해 준다는 것이고, 일본은 신국이고 황국이며 유신의 대도가 존귀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신사라는 이야기이다.
[출처 : 이현도(창원대학교 독문학과 강사)]

 

 

 

병조판서 변공신도비명(兵曹判書 卞公神道碑銘)


제일여고 정문을 들어서서 우측 생활관으로 가면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막료 장군으로서 옥포해전에서 3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해전마다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변연수(卞延壽)장군 부자(父子)와 자부(子婦) 안동김씨를 기리기 위하여 창원시 진전면 양촌리 마을입구에 건립하였던 비석을 이유는 모르지만 이곳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왜란이 끝난 후 선무이등(宣武二等)에 등록되고, 병판(兵判)을 추증하였으며 정려를 명하였다. 성구사(誠久祠)에 제향되니, 문충공 연제 송병선(文忠公 淵齋 宋秉璿)이 신도비명을 찬(撰)하였다.

 

 

 


신도비 옆에는 공적비도 있고 특히 일본식의 작은 2기의 마애불상도 눈에 띄고 문인석도 서 있는데 누구의 것인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