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보호수와 노거수

진해구 마천동 팽나무 노거수와 인천이씨 유적비

천부인권 2015. 3. 24. 08:18

 

 

 

<2015/3/23 마천동 팽나무 노거수>

 

친구는 논문 준비를 위해 창원시의 노거수를 찾아서 다니고, 필자는 창원시 보호수 답사 후 책을 한권 내어볼까 하고 생각하다 창원시의 보호수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노거수를 찾아보기로 했다. 둘의 목적은 다르지만 알려지지 않은 노거수를 찾아서 다니는 좋은 짝이 되었다.

 

 

 

 

< 仁川李公諱琳珀遺蹟碑>

 

 

 

이번에 찾은 곳은 웅동(熊洞) 일대였는데 처음의 목적지는 대장동 느티나무 보호수와 성흥사 보호수였다. 그러나 도로를 착각하여 용원방면을 둘러 웅동으로 되돌아오면서 친구의 옛 기억을 더듬어 웅동1동주민센터가 있는 마천동(馬川洞) 일대의 노거수를 찾아보기로 했다. 마천동(馬川洞)은 북쪽의 마봉산 서쪽 기슭으로 흐르는 말내’(馬川)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큰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산자락의 끝 부분에 위치한 이 팽나무가 있는 곳은 진해구 마천동 49-6번지로 나무 앞에는 仁川李公諱琳珀遺蹟碑(인천이공휘임박유적비)가 있다. 우리가 마천동 팽나무 노거수라 명명하는 위풍당당한 팽나무 노거수는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을 것이다. 이런 미답의 나무를 찾는 것이 노거수 답사의 소소한 재미이다.

 

 

 

 

이 나무의 나이는 220년 정도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490cm이며, 높이는 14m 정도이다. 나무 옆에는 이보다는 둘레가 작지만 노거수 보다 키가 훨씬 큰 나이가 80년 쯤 되어 보이는 팽나무가 함께 서있다.

 

 

 


인천이공휘림·박유적비(仁川李公諱琳·珀遺蹟碑)
인천이씨는 소성백(邵城伯) 휘(諱)허겸(許謙)으로부터 기원(起源)하니 거금(距今) 970여년(餘年)전(前)으로 그 근원(根源)이 심원(深遠)하고 유구(悠久)하여 조선(祖先)들은 고려(高麗) 조선(朝鮮) 양조(兩朝)에 걸쳐 현관(顯官)거유(巨儒)가 대대(代代)로 속출(續出) 나라에 공헌(貢獻)하고 가성(家聲)도 크게 떨쳤거니와 13대손(十三代孫) 휘(諱)문화(文和)는 이조(李朝) 태종(太宗) 때의 명신(名臣)으로 큰 공(功)을 세워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공도공(恭度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고 나라에서는 산지(山地)를 하사(下賜) 공신(功臣)으로 예장(禮葬)하였으니 이토록 예우(禮遇) 받은 우리의 중시조(中始祖)이시다. 이로부터 공도공파(恭度公派)가 되었느니라. 공도공(恭度公)의 9대손(九代孫) 휘(諱)회근(晦根)은 소년기(少年期)에 임진난(壬辰亂)을 피(避)하였으며 아들 휘(諱) 임·박형제(琳·珀兄弟)는 315년(三百十五年)전(前) 1669년에 정(精)든 고향(故鄕)과 선영(先塋)을 뒤로 하고 대구(大邱)로부터 점차(漸次)남하(南下) 마침내 산숭수명(山崇水明)한 웅천(熊川)고을 마봉산하(馬峯山下) 이곳 마천(馬川)에 이주(移住)정착(定着)하니 두 어른이 입(入)웅천(熊川)조(祖)이시다. 형제(兄弟)는 우애가 깊고 화합(和合)하여 객리(客里)살이의 모든 고난(苦難)을 극복(克服)하여 근면성실(勤勉誠實)히 가업(家業)을 일으켜 형임(兄琳)께서는 동주(東柱) 동상(東相) 동익(東榏) 삼자(三子)를 두신 선비였고 제박(弟珀)께서는 동표(東杓) 동채(東采) 이자(二子)를 두신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 위 다섯분의 후손(後孫)이 흥성(興盛)하여 250여년(餘年)전(前) 이곳에 재실(齋室)을 세워 학당(學堂)을 겸(兼)하고 소성재(小成齋)라 이름하여 문중자제(門中子弟)는 물론(勿論) 타문중(他門中) 자제(子弟)도 포용(包容)수학(修學)케하여 많은 학도(學徒)를 배출(輩出) 그들이 성장(成長)하여 향사(鄕士) 또는 향재(鄕才)가되었으니 소성재(小成齋)야 말로 유서(由緖)깊은 전당(殿堂)으로 창립이래(創立以來) 연금장장(連錦長長) 200여년(二百餘年) 전통(傳統)을 자랑하며 그 명맥(命脈)을 찬연(燦然)히 유지(維持) 학당(學堂)으로서의 본분(本分)과 사명(使命)을 다하였으니 그 빛나는 사적(事蹟)기록(記錄)에 남을지며 입웅산조(入熊山祖)의 5대손(五代孫) 유(洧)는 출천지효자(出天之孝子)로 나라로부터 포창(褒彰)받고 6대손(六代孫) 기회(基諙)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이요 7대손(七代孫) 몽희(夢熺)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사우(士友)를 창도(唱導)하여 주자(朱子)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춘추회(春秋會)서 강문(講文)하였고 제(弟)석열(錫烈)은 행내부주사(行內部主事)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당시(當時)의 세사(世事)를 통열(痛烈)히 비판(批判) 나라에 상소(上疏)하고 광주(廣州)의 선영위토(仙塋位土)가 실권(失權)된 것을 법정(法廷)에 누정(累呈)하여 복권(復權)하였다. 이렇듯 후손(後孫)들의 영달(榮達)은 모두가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으로 감읍(感泣)하고 높은 긍지(矜持)를 가지는 바이다. 그러나 소성재(小成齋)가 퇴락소멸(頹落消滅)된 후(後)로는 그 다감(多感)하고 정서(情緖)어린 옛 모습을 잊지 못하여 지난날의 영화(榮華)를 회상(回想)하며 깊은 감회(感懷)에 젖어 매양(每樣) 애탄(哀嘆)하던 바 드디어 문중(門中)이 합의(合意)하여 1975년(一九七五年)에 제당(薺當)을 재축(再築)하니 실(實)로 다행(多幸)이로다.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강(江)물도 원천(原泉)이 있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조상(祖上)을 잊을손가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을 길이 추모(追慕)코자 여기에 비(碑)를 세우노니 모름지기 후손들은 세웅(世熊)가 불고(不古)하여 비록 산거(散居)할 지라도 세세연연(歲歲年年) 이곳에 회동(會同)하여 효우목족(孝友睦族)하고 지성(至誠)으로 향사(享祀)하고 재실(薺室)을 보존(保存)하여 자손된 도리(道理)를 다 할것이며 그 영화가 천추만대(千秋萬代) 영세무궁(永世無窮)할 지어다.
갑자(甲子)1984년(一九八四年) 만추(晩秋) 건립(建立)
九代孫 柄哲 撰 慶州人 李英煥 書


 

 

느릅나뭇과 팽나무속에 속한 팽나무는 낙엽 활엽 교목으로 학명은 Celtis sinensis Pers이다. 높이 20미터, 지름 1미터에 달하고, 나무껍질은 회색이며 가지에 잔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꼴 또는 달걀꼴 타원형이며 윗부분에 톱니가 있다. 꽃은 5월에 암꽃과 수꽃이 따로 따로 한 그루에 피며, 열매는 붉은 갈색으로 작고 둥글다. 재목(材木)은 건축재나 가구재 또는 숯의 원료가 된다. 함경북도 이외의 평지에서 자라며 중국과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출처 : 다음 국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