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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초등학교 설립자 주기효 선생 공적 비갈

천부인권 2016. 12. 14. 05:49



<2016.12.05. 주기효 선생 공적 비갈>

 

웅천사립개통학교설립자 朱基孝先生(주기효 선생)1867106일에 태어나 194128(74)까지 사셨다. 자는 우원, 호는 석천으로 서당에서 수학하였으며 1902년에 웅천군의 판임주사로 서임되었다.

웅천사립개통학교는 웅천국민학교로 사용되다가 國民(국민)이라는 용어가 일제강점기에 사용했던 皇國臣民(황국신민)’의 줄임말임을 알고 199631일 웅천초등학교로 개칭했다.

국민학교란 명칭은 대한민국 광복 50주년을 맞아 1941년 일제강점기 때 일왕칙령 제148국민학교령에 의해 사용했던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1995811초등학교로 변경했다. 이처럼 명칭을 변경 한 것은 백년대계라는 나라의 교육이 일제의 식민교육으로부터 깊게 박혀있는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로서 54년간의 굴욕하나는 제거했지만 정작 헌법에는 아직도 國民(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한 왜왕의 소유물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웅천초등학교의 연혁을 보면 주기효 선생의 고민 일부를 엿보게 한다.

1906. 3. 10 ; 사립개통학교로 개교 후 교장재임

1907. ; 淑明義塾(숙명의숙) 개교

1917. 4. 14 ; 1907년에 설립된 사립숙명의숙과 합교하여 웅천보통학교 개교

1937. 4. 10 ; 웅천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0. 4. 1 ; 웅천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45. ; 웅천국민학교로 재 개교

1996. 3. 1 ; 웅천초등학교로 개칭




 

주기효 선생은 학교와 의숙을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졸업생 중 40명의 인재를 사비로 유학 시켰으며, 웅천 도서원을 개설하여 사람들에게 무료로 책을 대여하여 교양과 지식 보급에도 열성을 다했다. 또한 실업 조합, 흥업 조합을 발기하고 국채 보상 단연 동맹을 조직하여 민족 실업 진흥 운동을 전개했다.


 



 

주기효 선생 공적 비갈194191일 웅천의 국도변에 세웠지만 지금은 웅천 초등학교 정문에 옮겼다. 비갈의 정면은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으며 뒷면이 밖을 향하고 있다. 비갈의 높이는 186cm, 70cm, 두께 21cm이며, 비좌 상단은 높이 25cm, 140cm, 두께 70cm이다.

 

비갈의 전면 우측에 熊川私立開通學校設立者(웅천사립개통학교 설립자)라 적고 중앙에 石泉先生朱基孝功績碑(석천 선생 주기효 공적비)라 음각으로 새겼다. 비갈의 우측면에는 前熊川私立開通學校學友一同(전 웅천사립개통학교 학우일동)을 새기고, 좌측면에는 昭和拾六年九月 日建立(소화 십육년 구월 일 건립)이라 적어 19419월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주기효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비갈 후면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光武隆熙年間嶠南一帶初代維新敎育家中第一人也(광무 융희 연간 교남일대 초대 유신 교육가중 제일 인야)

광무 융희 연간(1897~1910)에 교남일대의 초대 신식 교육가 중 제일인자이시라.

實績 不知有私 但知有校 閱歲十餘 育英千數(실적 부지유사 단지유교 열세십여 육영천수)

실적 사사로움을 알지 못하시고 학교만을 아시더니 개교 10년만에 천여명의 인재를 길러 내셨다.

槪讚 憂時先覺 臨機達觀 明暗同道 窮通一貫(개찬 우시선각 임기달관 명암동도 궁통일관)

개찬 어지러운 때에 미리 깨치시어 출세 영달의 기회가 있어도 달관하셨고,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한 길이시니,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관하셨다.



 

<붉은 색이 있는 것은 오기인 듯하다>

 

그 옆에는 이 비갈의 해석을 한 안내판을 세웠는데 오류가 많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또한 비갈에 새긴 昭和拾六年(소화십육년)”이라는 것도 昭和十六年의 오기인듯하다.

 

출처 및 참조

진해의 비문(1996)

디지털창원문화대전

경상남도교육청기록관-경남교육 인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