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산청 단성향교 현판과 기문

천부인권 2019. 7. 29. 14:15

 

 

 

2019.7.11산청 단성향교 홍살문의 풍경

 

 

 

2019.7.11산청 단성향교 외삼문 관선문(觀善門)

 

 

 

단성향교 관선문(觀善門) 편액

 

 

 

단성향교 명륜당 앞면 모습

 

산청 단성향교(山淸 丹城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8호
산청군 단성면 교동길 13-15
산청군에는 단성향교와 산청향교가 있다. 옛 현의 위치에 따라 지어진 단성향교(丹城鄕校)는 고려 인종(仁宗) 5년(1127)에 금잔방(金盞坊) 금강누리구인동(今江樓里九印洞)에 창건했다. 이후 현재의 위치인 교동에 이건하기까지 사실기록으로 운창 이시분(雲牕 李時馩)이 쓴 운창지(雲牕誌)에 의하면 “향교는 금잔방(金盞坊)에 있고 현청은 강루평(江樓坪)에 있다. 불미한 사건으로 인하여 현청은 내산하(來山下)로 향교는 서산록(西山麓)으로 이건 하였다.”고한 기록이 있다.
단성향교의 건물배치는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앞쪽에, 제례공간인 대성전을 뒤쪽에 두는 일반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단성향교의 명륜당은 경남의 27개 향교 중 유일한 양식의 공간배치를 하였는데 명륜당 앞 좌우에 있어야 할 동·서재(東·西齋)가 뒤쪽에 위치했다. 또한 외삼문 격인 관선문(觀善門)이 있음에도 명륜당 아래를 통해서 동·서재가 있는 마당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명륜당은 건물구조가 아주 독특하여 중앙 3칸을 2층의 누각으로 구성하고 양측에 돌을 쌓아 올려 그 위에 방을 만들었는데 형태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들다.
아래에는 단성향교 명륜당에 걸려있는 기문들의 원문과 해문을 기록한다.


 

 

 

단성향교 명륜당 마당에서 본 풍경

 

 

 

단성향교 명륜당 강당

 

 

 

동재 모습

 

 

 

서재 모습

 

 

 

명륜당에서 본 내삼문 모습

 

 

 

[原文]
聖廟重修記
恭惟我 朝右文爲治內自國都 外及州縣皆置學敎以奉 先聖而列聖尊敬越于前代 爲守牧者其敢少忽哉不侫於 當廟戊午來莅玆縣 縣之士 以聖廟修改之急謁 余躬卽奉審焉 殿宇傾圮 實有時日難支之
勢顧圮邑力 簫條事工浩大 前後守帝率莫敢生意興作 以致牽架矣遂乃慨然 從按使求以傳 聞于朝越二年庚申榴夏香冊自 京師至乃移案齋閣經始治工三月 而告訖以其年七月九日 還奉新廟 人士共慶相興之言曰 累十年因循之事承積弊湯殘之 餘修新其制度突兀乎眼前 可以升降周旋以行乎 三代之禮儀 而復古之漸矣 不侫敢以爲功實 惟士民幹理之力 是賴顧何事歸美爲也 然深有感於諸君之言反有所望於諸君 者尊其廟不若師 其道師其道不若 求其心由 其心而得其道 則觀法乎 鄒魯之門 墻斯亦不遠矣 豈但規規於棟宇之美 而已哉諸君已勉之 哉廟旣成諸生請余記之 噫 事有記識非欲誇於人也 將而徵於後也 玆邦荒僻文獻無徵 縣誌中 只載鄕校舊在九印坊 永樂間移建于此 宣祖己亥因倭亂合縣山陰 光海癸丑復邑云 而其間因革月日 邑帝名氏皆不能詳可慨也 今若辭巽不居終無一言 則某年某月某官之營建後人將何考信 而杞宋無文之歎安知不猶今之視昔也 是爲略記顚末 若李如玉權顫董治之 勞亦不可無稱玆列書于 下云爾
歲上章涒灘肅宗四年孟秋上澣
地主 坡平 尹烒題
成造 有司 李如玉
              權  顫

 

[해문]
성묘중수기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조선(朝鮮)은 나라를 다스림에 문을 숭상하여 안으로 국도(國都)에서 밖으로 주현(州縣)에 미치기까지 모두 학교를 설치하였다. 이에 선성(先聖)을 받들고 열성(列聖)을 존경함이 전대보다 월등하니 수령(守令)이 된 이들이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금상(今上:肅宗) 무오년(戊午年,1678)에 이 현으로 부임하자 현의 선비들이 성묘의 수리가 시급하다고 나에게 알려왔다. 몸소 나가 살펴보니 전우(殿宇)가 무너져 참으로 며칠을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돌아보건대 고을의 물력(物力)이 빈약하고 공사다 거대한지라 전후 수령들이 감히 뜻을 내어 일을 시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더디어 개연히 관찰사를 통하여 조정에 알려 줄 것을 청했더니 2년 후 경신(庚申) 5월에 교지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이에 위패를 재각(齋閣)으로 이봉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3개월만에 완공하였으니 그해 7월 9일에 위패를 신묘(新廟)로 환봉하였다.
인사(人士)들이 함께 축하하면서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수십 년 동안 방치한 일을 폐단이 누적되어 거의 허물어진 가운데서 경영하더니 그 모습을 새롭게 수리하여 눈앞에 우뚝하게 세웠다. 이에 승상(昇降)하고 주선(周旋)하면서 3대의 예의를 행하여 옛 문물(文物)을 점점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못난 내가 이에 감히 공이 있다고 하겠는가. 실로 사민(士民)들의 주도하는 노력을 힘입은 것이니 무슨 일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러나 제군(諸君)의 말에 감동하면서도 도리어 제군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그 묘당(廟堂)을 받드는 것은 그 도(道)를 스승 삼는 것만 못하고 그 도를 스승 삼는 것은 그 마음을 구하는 것만 못하다. 그 마음을 말미암아 그 도를 얻는다면 공맹(孔孟)의 문정(門庭)에서 법도를 보는 것이 이에 또한 멀지 않을 것이니 어찌 단지 동우(棟宇)의 화려함에만 연연할 뿐이겠는가. 제군은 이에 힘쓸지어다.
묘당이 이미 완공됨에 제생(諸生)이 나에게 기문을 청했다.
아! 매사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남에게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후세에 증거 하기 위함이다. 이 고을은 외지고 황량하여 문헌을 징험할 수 없다. 현지(縣誌) 가운데 단지 「향교는 예전 구인(九印)마을에 있었는데 영락연간(永樂年間,1403~1424)에 이곳으로 이건했다. 선조(宣祖) 기해년(己亥年,1599)에 왜란(倭亂)으로 인하여 현(縣)을 산음(山陰)과 합쳤다가 광해(光海) 계축년(癸丑年,163)에 복읍(復邑)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그간에 연혁 월일과 수령(守令)들의 이름자는 모두 상세하지 못하니 개탄스럽다.
이제 만약 사양하고 피하여 끝내 일언(一言)이 없다면 모년모월모관이 영건(營建)한 것을 후인들이 장차 어디에서 고증할 것이며 문헌 없는 탄식이 금일에 전날을 보는 것과 같이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이에 대략 전말을 기록한다. 이여옥(李如玉)과 권전(權顫)이 이 공사를 다스린 노고(勞苦)는 또한 칭송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래에 열서(列書)한다.
세 상장군탄 숙종4년(1680) 맹추상한
지주 파평 윤식제(尹烒題)
성조 유사 이여옥(李如玉)
               권  전(權  顫)

 

 

 

 

 

[原文]
聖廟重修記
余再跡南邑素 知風土俗尙之美 而峨冠博帶揖讓 折旋之節 先賢之典刑攸存 院宇山林簠簋籩豆之設 後學之希慕可尙 丹之邑 亦一嶠南鄒魯之邦也 山川秀麗民物淳朴 十室殘邑忠信之士輩出 如斗小境絃誦之聲 相聞蔚然 爲一道之名縣 余莅此三載乘積弊至 殘之餘官局簫條經屢歲連凶之後 民力垂罄思㭪 罅漏襦如無功至 若官舍之頹圮倉庫之修葺迨 不能暇漫漶過了 歲辛丑早春者權大雅顥明甫來告余曰 聖廟營修粤在甲寅庚申之久 而荏苒至此殿瓦頹 圮風雨滲漏 棟宇朽敗 丹靑無文實難時日支過 而今此重修之擧 萬不獲已則不可 以官力之不逮民情之難 便因循而姑置也 余遒親番面稟營門畧加修 葺權從列邑已行之例 香祝禮物自官敬奉 而其餘橐襄之鳩財 木石之營工不日 而經始閏三月三日逎 告聖位移安東齋 刻期董役因舊瓦 而覆之更新榱 而架之滋月餘功告訖粤 五月六日還奉舊廟 三盈之宮丹雘重新 五聖之位床卓依舊於不休 哉此是士林根幹之力也 余何敢記載 而徵後乎 略書顚末 而明僉君子慕聖之誠 云爾
重光亦舊若(辛丑)榴月
知縣 蔡臣永 記
都檢 權采夏
成主有司 李在範 權宜樞

 

[해문]
성묘중수기
나는 남쪽 고을에 두 번 내려 왔으니 풍토와 습속의 아름다움을 익히 알고 있다. 아관박대(峨冠博帶)에 읍양(揖讓)하는 예절은 선현(先賢)들의 법도가 남아 있고 원우(院宇)와 산림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후학들의 추모가 가상하다. 단성 고을은 또 하나의 영남에 있는 추로(鄒魯)의 마을이다. 산천이 수려하고 주민이 순박하며 열 집이 거주하는 작은 고을에 충신(忠信)의 선비가 배출되고 한마지기 정도의 좁은 경내에도 배우고 익히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니 울연(蔚然)이 일도(一道)에서 이름난 고을이다.
내가 부임 이래 3년 동안 적폐의 잔여(殘餘)로 인하여 관청이 쇠퇴하고 수년 동안 흉년이 해마다 든 다음이라 힘이 다 빠진 민력이니 이를 보완하려 해도 결함이 많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에 허물어진 관사와 창고의 수리가 급하나 여가가 없어 부질없이 세월만 보냈다. 물이 스며들어 모호하여 분별이 되지 않는다고 헌종(憲宗) 7년(1841) 신축(辛丑) 초봄에 권대아(權大雅) 호명보(顥明甫)가 와서 나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성묘(聖廟)의 수리는 오래 전 갑인(甲寅) 경신(庚申)년의 일로써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에 전우(殿宇)의 기와가 허물어져 비바람이 스며들고 동우(棟宇)가 썩어 못쓰게 되었으며 단청(丹靑)의 무늬도 없어져 참으로 한시도 지탱하기 어렵다. 이번에는 중수(重修) 공사를 어떤 일이 있어도 그만 둘 수 없으니 관력이 미치지 못하고 민정이 어려운 형편이라 하여 그대로 꾸물거리고만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내가 친히 살펴보고 감영에 직접 아뢰어 약간의 수리를 더하였다. 이에 여러 고을에서 행한 예(例)를 따라 향축예물(香祝禮物)은 관(官)에서 경건히 마련하고 그 나머지 경비의 모금과 목석(木石)의 공사를 지체 없이 시작하였다. 윤 3월 3일에 고(告)하여 성위(聖位)를 동재(東齋)에 이안(移安)하고 기한을 정하여 공사를 감독 예전 기와를 그대로 덮고 서까래를 새것으로 교체하여 한 달 남짓 넘어 공사를 마치고 5월 6일 구묘(舊廟)에 환봉(還奉)하였다.
삼영(三盈)의 교궁(校宮)은 단청(丹靑)이 다시 새로워졌고 오성(五聖)의 신위(神位)는 상탁(床卓)이 옛 모양과 변함없으니 아!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는 사림이 주관한 힘이니 내 어찌 감히 기재(記載)하여 후일에 증명하리. 전말(顚末)을 약서(略敍)하여 군자들이 성인을 추모한 정성을 밝혀 둔다.
중광역구약 신축년(1841) 5월
지현(知縣) 채신영(蔡臣永) 기록하고
도검(都檢) 권채하(權采夏)
성주유사(成主有司) 이재범(李在範) 권의추(權宜樞)

 

 

 

 

 

[原文]
明倫堂上樑文
屈於時而屈於力幾 歎闕典之未行有是校 則有是堂聿 覩新構之載 煥儒林動色自 夫聖廟之肇開行路改觀 卽有講堂之 隨闢明倫扁額 三綱五常之攸原 賢士所關夏禮冬詩之斯講 是以列郡處處 無非廈屋擧 顧玆十室雷封獨欠數椽黌舍 生徒無講隷之所 絃誦寥寥士林 絶依歸之所 方風敎貿貿謀 始設刱豈無意於從前功鉅力微尙未遑於 今日有識之咨嘆盖久多士之慨恨無窮自先輩所未就者 在後生孰不慨 然辛今賢侯之荏邦聚靑衿於 北海志銳作成慕 古令宰之興學下緇於 帷西河首先勸課纔下車 而拜聖歎有廟 而無堂招諸生 諄諄爰諮爰訪召匠手 而屹屹乃紀乃營不可一日而無何論豊瘠 出捐數月之俸 亟加措施開基於四會之躔 菫役於三農之隙 神輸鬼運木石 具於斯須日吉辰良 棟梁儼而高屹三門四表 遵舊制於周庠 複壁重欄倣美規於魯泮苟合矣 不侈不華美輪焉美 奐焉如翬如跂 居然作新風采孰 不聳動觀膽 惟嶺南七十州何所 不有自我東三百載 今賀新成周旋 後前雖緣章甫之糾合 鼓動感發實由 太守之作興 翠壁丹厓環擁左右 蒼松綠竹羅列 庭除聳尼丘之重 巒怳疑鄒魯之境 睠新安之一帶遙接濂洛之源
兒郞偉抛梁東 新安美號揭無窮
澄江活潑淵源遠 萬祇朝宗向聖宮
兒郞偉抛梁西 尼岫重看彩鳳樓
屹屹千秋千半立 喚醒箇裡幾人迷
兒郞偉抛梁南 郁郁文明聖化覃
培養棟梁材可用 堂前峯色映台三
兒郞偉抛梁北 斯文一柱齊天極
更將誠敬爲入門 濟濟衣冠躋禮俗
兒郞偉抛梁上 生徒隷業宵懸帳
滿堂衿佩玉摪摪 俎豆春風回氣像
兒郞偉抛梁下 一邦自此弘儒化
嗟哉吾黨二三人 大庇萬間之廣廈
伏願上梁之後 文風益振儒道復興 書同文行同倫共躋 禮義之域朝而絃夜 而訟一變鄒魯之風
雍正三年乙巳二月十九丁亥日丙午時 檀紀四0五八年(英祖元年)
牧使 尹基慶

 

[해문]
명륜당상량문
시세가 어렵고 힘이 모자라 명륜당을 건립하지 못함을 몇 번인가 탄식했다. 이에 학교가 있고, 이에 당을 갖췄으니 새로 지은 건물의 찬란함을 보겠다. 유림이 반가워함은 성묘를 처음 세웠기 때문이요. 행인들이 처다 보는 것은 강당을 아울러 수리했기 때문이다. 명륜당 편액은 삼강과 오륜의 근본이고 현사(賢士)들의 소임은 동하(冬夏)로 시례(詩禮)를 강론함 일세 이런 까닭으로 여러 고을 곳곳에 큰 건물이 우뚝하지 않음이 없다네.
돌아보건대 이곳 10실(室)의 작은 고을에는 유독 서까래 몇 개의 학교마저 없었다. 생도들은 공부할 장소가 없어 현송(絃誦)소리 적막했고 사림은 의귀할 자리가 끊겨 풍교가 무너졌다. 명륜당 창건할 계획에 어찌 종전부터 뜻이 없었겠는가. 일은 크고 힘이 모자라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이에 유식한 이들의 탄식이 오래 되었고 많은 선비의 한스러움이 무궁하였다.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사업에 후생(後生)들 그 누가 안타까워 아니하랴.
다행이도 지금의 어진 원님이 부임하더니 한(漢)나라 북해상(北海相)인 공융(孔融)처럼 학생들을 모아 학문 성취에 뜻을 북돋았고, 옛날 훌륭한 수령의 흥학(興學)한 일을 흠모하더니 춘추시대 서하교수(西河敎授)를 지낸 자하(子夏)처럼 강석을 마련하여 제일 먼저 공부를 권장했다. 이에 수례에서 내리자마자 대성(大聖)을 배알하고 사당은 있으나 명륜당이 없음을 탄식했다. 재상들을 초청하여 순순히 자문하여 상의했고 장인들을 불러서 부지런히 설계하고 경영했다. 하루라도 없을 수가 없으니 어찌 넉넉하고 모자람을 따지겠는가. 수개월의 녹봉을 출연(出捐)하여 서둘러 조치하고 시행했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모이는 날에 터를 닦아서 세 철 농사의 여가로 공사를 다스렸다. 신출귀몰하게 운반하니 목석들이 순식간에 구비되었고 날이 좋고 때가 맞으니 동량(棟梁)이 우뚝 높이 솟았다. 삼문(三門)과 사표(四表)는 주(周)나라 학교처럼 옛 제도를 따랐고 복벽(複壁)과 중란(重欄)은 노(魯)나라 반궁(泮宮)처럼 좋은 규모를 모방했다. 규모를 알맞게 완비하니 사치(奢侈)스럽거나 화려(華麗)하지 아니하고 밝고 빛나게 꾸몄으니 날아갈 듯 산듯하다. 문득 풍채를 새롭게 들어내니 누구인들 기쁘게 쳐다보지 아니하랴.
영남 70고을에 어디인들 없겠는가마는 우리나라 300년 만에 이제야 신축함을 하례한다. 전후로 주선함은 비록 선비들의 규합에 의한 것이지만 감발(感發)하여 분기함은 실로 태수의 선도를 말미암았다.
취벽(翠壁)과 단애(丹厓)는 좌우를 에워쌌고 창송(蒼松)과 녹죽(綠竹)은 뜰 앞에 늘어섰다. 니구산(尼丘山) 뭇 봉우리 우뚝이 솟았으니 흡사 추로(鄒魯)의 고장 같고 신안강(新安江) 일대를 바라보니 저 멀리 염락(濂洛)의 근원에 접한 듯하다.
어영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신안(新安)의 좋은 이름 무궁하게 빛난다.
맑은 강 활발하여 길고 먼 연원이니 크고 많은 물줄기 성궁(聖宮)향해 흐르네.
어영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니구산(尼丘山) 다시 봄에 채봉이 깃들었다.
높고 큰 산 영원토록 중천에 우뚝하여 정신 차려 살펴보니 길 잃은 이 얼마인고.
어영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아름답고 성한 문명성화(聖化) 널리 뻗쳤다.
동량(棟梁)을 배양하여 인재들 쓸만 하니 명륜당 앞 봉우리에 삼태성(三台星) 비치네.
어영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사문(斯文)의 기둥 하나 하늘 높이 솟았다.
성경(誠敬)한 마음 지녀 대문을 들어서니 수많은 의관 선비 예속(禮俗)따라 당에 오르네.
어영차! 대들보를 위로 던지니 생도들 휘장 걸고 밤중까지 공부한다.
만당한 선비들 패옥소리 쟁쟁하니 향사자리 춘풍불어 기상(氣像)을 회복했네.
어영차! 대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한 고을 이제부터 유교 널리 교화하리.
아아! 오당(吾黨)의 여러분은 만간(萬間)의 넓은 집을 크게 비호하소.
삼가 바라노니 상량한 뒤로는 글을 숭상하는 기풍이 진작되고 유도가 부흥하리, 도학을 같이하고 윤리를 같이하여 예의의 자리에 함께 나아가고 아침에 공부하고 저녁에 복습하면서 추로(鄒魯)의 문풍을 일신하세.
영조 원년(1725) 을사 2월 19일
목사 윤기경(尹基慶)

 

 

 

 

 

[原文]
明倫堂記
唯我 國朝之興 實闡右文之化 內而國學 外而鄕校 俱有明倫堂 而惟丹獨闕焉 中間興發今不可徵 而齋聚失所藏修無地 則久爲邑子之所 羞而鄕之 耆儒輩居常慨然矣 景廟甲辰春不佞來荏于 玆至秋釋菜之丁 校中諸生合辭以請曰 今我聖后作其卽位 重以儒敎之 尙而興學校一事 又是守土者之首務也 今侯公務之緊急者擧皆整頓焉 則盖於學舍思所補葺之乎 不佞于是作而對曰 是誠己有志 而未遑者敢不樂應之哉 遂貶廩鳩材簡得邑之望士委 以是役越翌年春告落焉於 是諸生又詣而賀曰 吾邑之校宮自此規備 齋會已有所矣 藏脩又有地矣 大爲邑子之幸 而其力則惟侯之賴也 仍請余記其事之顚末 顧余韮拙不足 以塞之請而諸君子 終始經紀之功亦不可 而無傳故敢 爲之說夫堂之號 以明倫者所 以講明人倫申闡風化也 士之被縫掖之衣 居首善之地 者豈徒齊居之勤將祀之敏 而已哉盖 爲上而朝廷之敎化 下而閭巷之風俗俱源於學宮有欲 仰體作育之意 俯申陶城之方 敦孝悌之道 而爲閭里倡興禮讓之風 而爲觀感地 使之相觀 而善得以胥效而勤也 若夫群居焉眜於彛倫之講明相規焉蔑乎 義方之式隷 諧謔褻於朋儕誹謗及於官府 則不但恩義之地 歉然而已殊華 夫作是堂者本志 而大違㦲聖朝造士之至意此 又可戒而可警者也 噫本朝之學規與士風素 以嶺南爲稱首者 寔賴先賢崇學贊敎之致也 後之人曷不思所 而無替之哉 不佞亦嶺之人 而常揖馥于 前故於是堂之役 興有相焉倘於 後日人此鄕 而長幼知孝悌之道歷其里 而士民有禮讓之風 廳鄕樂而睹射儀之行 登黌筵而觀學規之修 則聖朝廣學之敎 今日作堂之意 筮不至於沒着地 豈不美哉是役也 校長權大益主其事 齊任柳應明金泳贊共義 而鳩其材者權壽岱金淳權必守李如琢也 董其役者李奎瑞柳仁年也 奉玆諸君子 以今日經紀之心 相與勉之哉
上之四年戊申季夏
旣望 商山 宋徵賢 謹記

 

[해문]
명륜당기
오직 우리나라가 흥한 것은 실로 널리 문을 숭상하여 중앙에는 성균관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기 때문이다. 향교에는 명륜당이 있는데 오직 단성만 유독 비어 있었다. 중간에 흥하고 폐한 것은 지금 알 길이 없고 재실(齋室)에 모여서 마음을 집중하여 공부할 수 없는 것이 오래되니 읍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나이 많은 유림들이 항상 탄식해 마지않던 차 경종(景宗) 4년(1724) 갑진 봄에 불영(不侫)이 부임하니 마침 추계석채(秋季釋菜)를 올리는 정일이라 향교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합의 하여 청원하기를 “지금 우리 성군이 즉위(卽位)하자 시작하는 것은 유교를 중히 여기고 항상 융성하기를 바라고 향교의 일과 또 고을을 지키는 사람들이 일을 첫째로 여겼습니다. 지금 영감(令監)께서 긴급한 공무는 대부분 정돈하였으니 이제는 모두가 바라는 학사(學舍)를 새로 지어 줄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하기에 내가 이를 시인하고 바로 만나서 대답하기를 “이는 참으로 뜻있는 일이나 겨를이 없어서 감히 선뜻 응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창고 안에 있는 재목을 모아 신망 있는 선비를 선출하여 일을 맡겼더니 다음해 봄에 낙성(洛成)을 보아 고(告)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찾아와 축하해 말하기를 “우리 읍의 향교가 이제는 법규에 맞게 구비되어 재각(齋閣)에서 회의를 하고 장수(藏修) 외 다른 일도 하게 되었으니 읍 사람들의 큰 행복이고 그 힘은 오직 영감(令監)의 덕이다.”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청하기에 내가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였다. 내가 돌이켜 보니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그 요청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러나 여러 군자들이 시종 한 공론은 전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감히 이에 기록한다.
이 당의 호를 명륜이라 한 것은 인륜(人倫)을 강명(講明)하고 되풀이하여 교화(敎化)를 선양(宣揚)하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선비의 의관으로 그 풍모(風貌)와 위의(威儀)를 갖추어야 하고 거처하는 곳은 숭학(崇學)하고 정양(靜養)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야 모든 생도들이 재실에 거처하면서 근독(謹篤)할 것이다. 제사()를 힘써 받드는 것 등 이 모두가 위로는 조정의 교화를 받아서 이고 아래로 백성들의 풍속은 그 연원(淵源)이 학교에서 구현(俱現)한 것이다.
또한 하고자 하는 것은 주체(主體)인 명륜의 교화를 진작(振作)하는데 뜻이 있고 교화된 도읍이니 거듭 고개가 숙여지고 효제(孝悌)의 도(道)가 돈독(敦篤)하니 마을이 번영하고 예양(禮讓)의 좋은 풍속을 부흥시키고 또 백성들이 서로 보고 감화하는 자리로 만들어 이들로 하여금 서로 근면하게 하여 선행을 서로 본받아서 행해야 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여 깨닫지 못하고 이륜(彛倫)을 강론하면서 상규(相規)하는 일에 어둡고 또 의방(義方)으로서 서로서로 권하는 일이 없으며 동료들과 해학(諧謔)만 즐기고 관청의 일을 비방(誹謗)만 한다면 이것은 비단 은의(恩義)로운 자리에 겸연(慊然)할 뿐만 아니라 이 당(堂)을 지은 본뜻에도 어긋나고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교육하는 지극한 뜻에도 크게 어긋나니 마땅히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아아! 본조의 학규(學規)와 사풍(士風)은 원래부터 영남(嶺南)이 제일이라고 칭하는 것은 선현(先賢)들이 숭학(崇學)하고 교도하는데 힘입어서이다. 후인들이 어찌 이를 끊어짐이 없도록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나 도한 영남 사람으로 옛날과 같이 언제나 겸양하는 향기를 맡으며 이 당을 짓는 역사의 도리를 알고 그 마을 사민들이 예양(禮讓)의 풍속이 있고, 향락(鄕樂)을 듣고서는 사의(射儀)의 의식을 볼 수 있고 학당에 오르면 학규에 의해 수행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면 조정에서 배움을 넓히는 교육과 오늘 이 당을 건립한 뜻이 무익함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 역사(役事)에서 교장 권대익(權大益)이 그 일을 주관하고 재임(齋任) 유응명(柳應明) 김영찬(金泳贊)이 같이 의논하였으며 재목을 모으는 자는 권수대(權壽岱) 김순(金淳) 권필수(權必守) 이여탁(李如琢)이고 이 공사를 감독한 사람은 이규서(李奎瑞) 유인년(柳仁年)이다.
바라건대 제군자들은 이 당을 경영한 마음으로 이 당을 짓는 역사에 참여하였다. 서로 힘쓸지어다.
영조 4년(1728) 무신 6월 16일(旣望)
적산 송징현(宋徵賢) 삼가지음.

 

 

 

 

명륜당 편액

 

 

 

수의관문(繡衣關文) 편액

 

[原文]
繡衣關文
先聖人制體之初 籩豆簠簋之實 各有定品寔是古今 不易之典 而挽近以祭禮 漸壤籩不爲籩 豆不爲豆 黍稷焉有代封之擧 脯醢焉有腐爛之歎 其所失體莫此之甚 而爲執事者因循蹈襲視 若有例鳥在其尊敬之義也 言念及此良可慨歎 玆以關飭從 玆以往祭需監封之際 黍黍稷稷必從 其品棗棗栗栗 切勿以代 各樣祀需依體陳設 務有尊先聖之實事 豈非斯文上道理乎 將此關辭板揭校壁俾 無違越之弊
戊辰七月十四日
繡衣使    李容直
修造有司 李道演
              李尙輔

[해문]
수의관문(어사또의 공문서)
선성인(先聖人)이 예를 제정한 처음에 변두와 보궤에 진설하는 제수는 각각 정해진 품목이 있으니 이것은 고금에 불변한 전례(典禮)이다. 그러나 근래에 제례(祭禮)가 점점 무너져 변(籩)은 변이 아니고 두(豆)는 두가 아니며, 기장과 피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있고 포와 육장은 부패한 것으로 쓰는 탄식이 있으니 그 예를 잃음이 이보다 심함이 없다.
그런데도 집사 된 이들이 그대로 답습하면서 이것이 관례인 냥 착각하니 어찌 그 선성을 존경하는 뜻이 있겠는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이에 관문(關門)을 내려 신칙하노니 지금 이후로 제수(祭需)를 감봉(監封)할 적에는 기장은 기장대로, 피는 피대로 반드시 그 품목을 갖추고, 대추에는 대추를, 밤에는 밤을 놓아 절대로 대체하지 말 것이며, 각종 제수를 예에 따라 진설하여 선성(先聖)을 받드는 실사에 힘쓰는 것이 어찌 사문(斯文)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장차 이 관문을 향교 밖에다 걸어 놓고 하여금 어기는 폐단이 없게 하라.
무진(1868)년 7월 14일
수의사(繡衣使)       이용직(李容直)
수조유사(修造有司) 이도연(李道演)
                             이상보(李尙輔)

 

 

 

 

 

[原文]
鄕校重修記
嗚呼 世級漸降士氣益渝 林下讀書之士自修 其身獨善其樂 不顧校勢之危急不憂 校宮之頹敗當此 滿庭秋草寂無人之際 寺門之朽敗 各舍之滲漏 東齋翼閣之顚覆 版籍之藏修 平日觸目傷心 然校財掃如民排 且難憂悶不已 今年春與同志李亮洙權燦容極力共憂思所 以修補之策矣 四月日特除直員之任 直守文廟從事校內庶務 尤不悚惶 以六月朔試役至 七月望屹工於是乎 校宮燦然重輝版籍不待深目而者新 噫雖値陽九之危 吾夫子日月之道德 豈不復明於中天乎此 宮之修去乙酉乙未不佞參焉 今己酉又專焉 可謂小伸慕聖之誠耶 亦可謂有數存焉 者歟玆 後典守之人與我同志 隨毁隨補庶校宮之無窮也哉
孔子誕降二千四百六十年己酉七月望
行直員 李尙瓚 記

 

[해문]
향교중수기
오호! 세태가 점점 저급해지고 사기(士氣)가 더욱 투박해지니 임하(林下)에서 독서하는 선비들이 그 일신만 자수하고 그 독선만 즐기면서 교세(校勢)의 위급함을 외면하고 교궁(校宮)의 퇴락(頹落)을 근심하지 않는다. 향교 마당에 추초(秋草)만 가득하고 사람 없는 적막한 때를 당하여 고궁의 문이 썩어 내려앉고 여러 집들이 눈비가 스며들고 동재(東齋)와 누각이 전복되고 장판이 허물어 졌으니 평소 눈길이 닿는 곳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향교의 재원이 바닥나고 주민들의 배려 또한 어려우니 근심과 번민이 끝이 없었다.
금년 봄에 동지인 이양수(李亮洙) 권용찬(權燦容)과 함께 더불어 걱정하고 힘을 합하여 이를 보수할 방책을 세웠다. 4월에 특별히 직원(直員) 소임을 제수 받아 문묘()를 지키고 향교 내의 서무를 맡아보니 더욱더 황송함을 이길 수 없었다. 6월 초하루에 일을 시작하여 7월 보름에 공사를 마치니 이에 교궁이 찬연이 다시 빛나고 판적은 손질하지 않아도 절로 새로워졌다.
아! 말세의 액운을 당했으나 우리 부자(夫子)의 일월 같은 도덕은 어찌 다시 중천에 빛나지 않겠는가. 지난 을유 을미년 중수 시에 내가 참여 했고 이번 기유년에 또 전담하여 수리하였으니 성인을 존모하는 정성을 조금 펼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운수의 소관이라고 하겠는가.
이후로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들이 나와 뜻을 같이하여 수시로 훼손된 부분을 보수한다면 이 교궁이 무궁할 것이다.
공자탄강 2460년 기유(1909) 7월 15일
행직원 이상찬(李尙瓚) 쓰다.

 

 

 

 

단성향교 대성전

 

 

 

동무 모습

 

 

 

서무 모습

 

 

 

 

산청 단성현 호적장부(山淸 丹城縣 戶籍帳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9호)
산청군 단성면 교동길 13-15
단성현 호적장부는 명륜당의 우측에 있는 장서각인 단성향교 향안실(鄕案室)에 보관되어 온 문서들이다.
이 호적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력과 부세를 해당 호구에 부과하고 징수하기 위한 공문서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조선에서는 3년에 한번씩 각 군현에서 호적을 작성하여 국가도 보관하고 개인에게도 주었다. 호적에 들어가는 내용은 가호(家戶)의 거주 인구와 소유 노비 등으로서 여러 통을 작성하여 관청, 중앙정부, 담당인 호조(戶曹), 개인에게 주었다.
1687(숙종4)년부터 1888(고종 5)년까지 작성된 단성현 관내 8개면의 호적이 현재 이곳 단성향교와 일본의 가큐슈인(學習院)대학 도서관에 남아 있다. 모두 32식년 38책이 남아있으나 이곳에는 1678년부터 1789(정조 13)년까지 13식년 13책만이 보관되어 있다. 모두 필사본이고 크기도 각기 다르지만 단성향교 소장본은 대체로 가로 70cm, 세로 60cm 내외이다. 현존하는 각 지방의 호적대장 중 책의 권수가 많은 것이 더러 있기는 하나 특정 지역의 대장이 일정 기간 동안 전체의 모습을 빠짐없이 갖춘 것은 드물다. 그런 측면에서 이 호적은 8개면 전체의 것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으며 이를 통해 17~8세기 조선의 향촌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980년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상하 두 책으로 영인 출간 했다.

 

출처 및 참조
단성향교지-단성향교(2008.9)/회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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