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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진전면 오서리 호산마을 권재정 유적비

천부인권 2019. 9. 15. 06:00



2015.11.6. 오서리 호산마을 노거수 아래에 위치한 권재정(權載正) 유적비


창원시의 노거수를 조사할 때 진전면 오서리 호산마을을 지나다 「망운당처사안동권공유적비(望雲堂處士安東權公遺蹟碑)」를 만났다. 호산마을 입구 길가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 창원시 진전면 오서리 17번지에 세워진 이 비문을 보니 망운당 처사의 이름은 권재정(權載正)이고 노거수도 망운당이 심은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한문을 잘 몰라 사진만 찍어 두었는데 4년이 지난 지금에 이처럼 한문을 읽게 되고 옮길 수 있어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된다. 아직은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어 즐겁다. 학창시절 때 공부가 지겨웠는데 늙어서 배우는 공부가 재미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논어의 첫 구절에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구절이 그냥 있는 게 아님을 지금에라도 알게 되어 짐승은 면한 것 같다. 아래에는 망운당(望雲堂) 권재정유적비(權載正遺蹟碑) 비문(碑文)을 옮겨 둔다.




[原文]
望雲堂處士安東權公遺蹟碑


舊鎭海治西竹谷之里 爲權氏世庄 而其近二里許有曰虎山 望雲堂權公嘗卜居於此直 其前植松 爲壇卽其杖爐盤桓處也 至是公之諸孫將伐石 樹于其傍 以表公遺蹟 曾孫宇龍抱家傳 求辭于余 余惟遺蹟之有碑於古無據然詩曰 維桑與梓亦恭敬止 夫祖先所居之里 封植之樹木無不可 以恭敬況 其潛德懿行 爲子孫柯則者刻而著之以爲出入瞻式 是固爲孝思之不容已者 而奚問有無於古哉 余以同根之誼不辭而爲之銘曰 公諱載正 字曰伯汝 安東之氏得姓于麗 太師諱辛是爲鼻祖 蟬聯厥緖世襲 簪組文坦漢功忠憲仲達 文章勳業 顯麗中末 監正執德始遷嘉樹 繁衍柯葉根盤南土至 副尉龜胥宇于鎭世 篤儒業家聲復振 大父曰堈芝泉其號 父曰錫度 千氏惟母 哲宗癸亥 公生之歲豊軀頎幹 其稟洵美 早歲食貧 耕樵養親 竭力共職 董生之倫 丙戌之疹 闔家遘癘 二親反兄 相繼俱逝 茫芒家緖 苦海無舶 公能自奮不至隕穫 殯葬克謹 哀慕殫誠 勤儉之積 家賴而成 奉先惇宗 至性勤摯 幹任門事 不啻在己 歲祭之薦 丙合之修必以躬檢 至老不休 始終一心 非誠曷致 鄕里攸推 宗黨攸倚 痛深風樹日瞻親塋取秋公意 望雲扁堂 孺慕孝思 存沒何異 晩節之託 植松自擬 跡公始終 惟實是履 肫肫其心 可範衰世 八十四齡 可驗仁壽 二男六孫餘慶在後 井閭秩秩 有樹鬱鬱 遺風在玆 雖久不沫 不有胎謨 後嗣曷則 刻之貞珉 以詔無極


同宗 權龍鉉 撰
外孫 全州 李邰楑 謹書
丙午正月 日 孫 景碩 立




[해문]
망운당처사안동권공유적비


옛 진해현(鎭海縣)의 서쪽에 있는 죽곡리(竹谷里)는 권씨(權氏)들이 대대로 살던 집터가 되었다. 그 가까운 2리쯤에 호산(虎山)이 있는데 망운당(望雲堂) 권공(權公)이 이곳에 집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그 앞에 소나무를 심고 단(壇)을 만들어 지팡이 짚고 반환(盤桓)하던 곳이다. 공의 후손들이 석물을 갖추고 그 옆에 나무를 심어 공의 유적을 표시(表示)코자 증손 우용(宇龍)이 가전(家傳)을 안고 와서 나에게 글을 요구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유적비(遺蹟碑)를 세우는 근거(根據)가 없었지만 시경(試經)에서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또한 공경(恭敬)하거늘」¹⁾이라고 하였으니 하물며 조선(祖先)이 살던 마을에 경계(境界)를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공경하지 않음이 없는데 그 감추어진 덕과 아름다운 행실(行實)은 자손들이 지켜야할 법칙(法則)이 되었으니 돌에 새겨 나타내어 출입하면서 처다 보고 공경(恭敬)하여 효사(孝思)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어찌 옛날의 유무를 상관(相關)하리요!
내가 같은 종인의 의(誼)로 사양(辭讓)하지 않고 명(銘)에 가로되 공의 휘는 재정(載正)이요 자는 백여(伯汝)이다. 안동권씨는 고려조(高麗朝)에 득성(得姓)하였으니 태사(太師) 휘 신(辛)이 시조(始祖)로다. 서업(緖業)은 이어지고 벼슬도 대대로 이어 받았구나. 문탄공(文坦公) 한공(漢功)과 충헌공(忠憲公) 중달(仲達)은 문장과 훈업(勳業)이 고려(高麗) 중말(中末)에 나타났도다.
감정공(監正公) 집덕(執德)이 비로소 가수(嘉樹)로 이사(移徙)하여 그 자손이 번연(繁衍)하여 남쪽에 뿌리가 내렸도다.
부위공(副尉공) 휘 구(龜)가 진해(鎭海)에 터를 잡았으니 조(祖)의 휘는 강(堈)이요. 호는 지천(芝泉)이요. 부(父)의 휘는 석도(錫度)요. 편(騙)은 천씨(千氏)이다. 철종(哲宗) 계해(癸, 1863)년에 태어나니 체구(體軀)는 크고 품위(品位)가 있으며 성품(性稟)은 진실하였도다. 어려서는 집이 가난하여 밭 갈고, 나무하여 부모를 받들고 힘써 직무를 다함이 동생(董生)²⁾의 효(孝)와 같았다.
병술(丙戌, 1886)년에 온 식구가 전염병(傳染病)에 걸려 양친(兩親)과 형이 일찍 돌아가셨으니 집안의 사업은 아득하여 바다에는 정박(停舶)할 곳이 없었다. 공이 스스로 구발(舊發)하여 궁(窮)하여도 뜻을 잃지 않고 초상(初喪) 장례(葬禮)에 삼감을 다하고 애모(哀慕)에 정성을 다하였도다.
근검절약(勤儉節約)하여 집안을 일으켜 선조를 받들고 가족에게는 정이 두텁고 성품은 부지런하고 지극(至極)하였다. 문중의 사업을 주간(主幹)하면서 자기의 일신은 돌보지 않았구나. 제사를 받드는 것과 재실(齋室)를 보수함에는 반드시 몸소 모범이 되고 늙어서도 쉬지 않았도다. 시종(始終) 한결 같은 마음은 정성이 아니면 어찌 이루었겠는가. 향리에서 추중(推重)되고 종중에서 믿고 의지(依持)하였도다.
불효(不孝)를 깊이 애통(哀痛)하여 날마다 봉분(封墳)을 쳐다보며 공의(公意)를 모아 집에 망운당(望雲堂)이라 편액 하니 깊이 사모(思慕)하는 효사(孝思)는 생사에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년에 절개(節槪)를 의탁(依託)한 것은 소나무를 심어 스스로 견주었구나. 공의 자취는 시종 실상(實相)만 행하였다.
그 마음은 정성스러워 말세(末世)에 모범이 될 만하고 84세로 돌아가셨으니 인자(仁者)는 수(壽)함을 징험(徵驗)하겠구나. 두 아들에 손자가 여섯이니 여경(餘慶)³⁾은 후손에 미쳤도다. 마을이 반듯하여 질서가 정연하고 나무는 무성하며 끼친 풍도(風度)가 남아 있어 오래 되어도 그치지 않고 물려 준 법도(法度)가 없었더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본받겠는가. 옥석(玉石)에 글을 새겨 끝없이 가르치리라.

같은 종씨 권용현(權龍鉉)⁴⁾이 찬하고
외손 전주 이태규(李邰楑)가 삼가 쓰다.
병오(1966)년 12월 일, 손자 경석(景碩)이 세웠다.


【주석】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또한 공경(恭敬)하거늘」¹⁾ : 시경의 소아(小雅) 소변(小弁)에「維桑與梓亦恭敬止」를 말한다.
동생(董生)²⁾ : 이름은 소남(召南)이다. 당나라 때 이름난 효자로 당나라의 문호 한유(韓愈)가 그를 두고 지은 동생행(董生行)이 있다.
여경(餘慶)³⁾ : 남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한 보답으로 뒷날 자손이 누리게 되는 경사
권용현(權龍鉉)⁴⁾ :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1899~1988)선생은 안동권씨 복야공파 후손으로 휘는 용현(龍鉉,) 자는 문현(文見)이고, 자호(自號)가 추연(秋淵)이다. 추연은 『주역(周易)』에서 잠룡(潛龍)의 뜻을 취한 것이다. 부친이 태몽(胎夢)에서 용을 보았으므로 이름을 용현으로 지으니 끝의 현(鉉)은 항렬자이다.
추연의 학맥(學脈)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산맥 중 율곡 이이(李珥)와 우암 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는 '기호(畿湖)'에 속한다. 그 학통은 우암의 9대손으로 구한말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자진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이자 족형(族兄)인 각재(覺齋) 권삼현(權參鉉)에게서 이었다.
추연의 만세(晩歲)후 편간된 『추연문집(秋淵文集)』은 15책 45권으로 방대하다. 주로 성리학에 관한 저술과 5천여 편의 묘비문 및 문집 서문(序文) 등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초계분지 서쪽에 있는 태암산(泰巖山)의 동쪽이라는 뜻의 태동서사(泰東書舍)가 있는데 2012년 후학들이 뜻을 모아 태동서원(泰東書院)을 준공하여 선생을 향사(享祀)하게 되었다. 태동서원은 경남 합천군(陜川郡) 초계면(草溪面)유하리(柳下里)에 위치하고 있다. 태동서원은 전통 서원건축 양식에 따라 교육장소인 강당(講堂)과 기숙사인 서재(書齋)를 갖추고 있다. 위패(位牌)를 모신 사우(祠宇)를 제외하곤 단청이 없다.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
양천허씨고성참의공종중-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 선생과 태동서원(泰東書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