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시락리 광산김씨 영모정 永慕亭

천부인권 2020. 4. 23. 20:49



2020.4.14. 진전면 시락리 광산김씨 영모정永慕亭 전경


진전면 시락리 450(시락본동길 142-14)에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세사歲事를 드리는 재실齋室이 위치하는데 후손들이 1915년에 건립한 것이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15m를 표시하고 「위도 35°04'35"N 경도 128°26'02"E」라 알려 준다.
재실齋室의 이름은 영모정永慕亭이고 대문에는 수화문修華門이라 편액 했고 마루 위에는 영모정기永慕亭記 영모정상량문永慕亭上樑文 원운原韻 등의 편액이 걸려 있으나 밖에서는 볼 수가 없어 겨우 기문과 상량문만 촬영했다.




2020.4.14. 진전면 시락리 광산김씨 영모정永慕亭  솟을 대문 수화문修華門




2017.1.14 시락리 광산김씨 솟을 대문 수화문修華門 편액



2020.4.14. 진전면 시락리 광산김씨 영모정永慕亭 



2020.4.14. 진전면 시락리 광산김씨 영모정永慕亭  편액



광산김씨 영모정永慕亭  주련




永慕亭記
永慕亭在 舊牛山治之西 時樂山下 吾金氏奉歲事之室也 書曰奉先思孝 曾子曰愼終追遠民德歸厚矣 惟思孝而能追遠然後 庶幾不忘其所由先也 噫祖宗雖代遠 有寓慕之地 則陟降如在也 子孫雖派敦也 此吾亭之所以作也 洪惟我祖王子公之居 光山以來 赫世之大勳 嵬忠翰閣文章載在國史 播傳東雅至 今耀人耳目於乎休哉 逮夫中葉郞將公 値前朝之終運 征討有勞 而竟守自靖遯于 陜郡係 以輔國公之出天孝友 光菴公之徵士學行 積德累仁 此有陞科建旄 殉忠褒孝之趾美 則其根深而柯榮者理 固然矣乃至于 掌樂正公參議公之時 是長陵丙丁後也 有炳幾避時之志 遂南遷于 此土之新安里世 以儒行人物著 而至若安養齋松軒叔姪之卓 行懿德已 有前輩之所贊述 則後人當恪守訓 夙夜匪懈者也 乃有累代 封塋在於 樂村之後山 而東西盤抱有似乎 祖峯魁踞 而孫峯羅侍之像 仰有數存乎哉 念昔之齋所 逼窄積費憂慮矣 幸於甲寅三月宗論歸一 孱孫之誠力幾乎殫矣 庶可以小償夙願也 乃題曰永慕 凡我數郡 蕃衍之雲族 其約可講乎 每霜露時節 惕焉愴焉奉祀有誠者 永慕之一也 孝悌相飭忠信必持 以貽令名 無忝所生者 永慕之二也 扶護宗物 堅久勤勉 自立遠規者 永慕之三也 詩曰孝子不匱 永錫爾類 吾所以告 吾宗者只 此而不可 以不文辭其實也 後之覽者必知 今日眷眷之意矣
檀君紀元四千二百四十八年 乙卯三月上浣
後孫成均館博士 驥鍾謹識


영모정기 永慕亭記
영모정永慕亭은 옛 우산현牛山縣 서쪽 시락산時樂山 기슭에 있다. 우리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세사歲事¹⁾를 받드는 집이다. 서경書經(태갑중太甲中 제칠장第七章)애서는 「선조를 받들 때는 효성을 생각하라」라고 하였고 증자曾子께서는 「상레喪禮에는 예禮를 다하고 제사祭祀에는 정성을 다하면은 백성의 덕德이 후厚한데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직 효성을 생각하고 제례祭禮에 정성精誠을 다한 연후然後에야 거의 그 선조를 잊지 않게 될 것이다.
아아! 조종祖宗은 비록 대代가 멀어도 추모하는 정情을 붙일 곳이 있으면 영혼이 오르내리심은 살아계실 때와 같은 것이며 자손은 비록 파派가 나뉘어져도 재실이 있으면 친목이 두터워질 것이니 우리 정자를 지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위대하신 우리 선조先朝 왕자공王子公이 광산光山에 자리 잡은 이후로 세상을 빛낸 큰 공로와 높은 충성과 한림원에서 뛰어난 문장文章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고 전국에 전파傳播되어 지금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니 아아! 아름답도다.
중엽中葉에 이르러 낭장공郞將公이 고려高麗가 국운이 다 되었을 때 정벌征伐의 공로가 있었으나 끝내 자청自請하여 합천군陜川郡에 은둔하였다. 이어서 보국공輔國公의 출천효우出天孝友²⁾와 광암공光菴公을 학행學行으로 벼슬로 부른 것과 덕德과 인仁을 쌓아 과거에 급제하고 장군으로 전쟁에 나가 충忠에 순절殉節하고 효孝를 포상褒賞한 아름다운 자취는 뿌리가 깊으면 자손이 영달한 것은 이치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장락정공掌樂正公과 참의공參議公의 시대는 장릉長陵³⁾ 때 병자호란의 난을 겪은 후였다. 그 조짐을 보고 시대時代를 피할 뜻이 있어서 드디어 남쪽 이곳 신안리로 옮겨서 대대로 유학으로 인물이 드러났으며 안양재安養齋 송헌松軒 숙질叔姪의 뛰어난 행의行誼와 아름다운 덕德은 이미 선배들의 칭송하는 글 속에 있으니 후인이 마땅히 교훈을 지키고 밤낮으로 게을리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여러 대의 선영이 시락마을 뒷산에 있으니 동서로 에워싸고 있는 것이 마치 조봉祖峯이 우두머리로 걸터앉아 있고 손봉孫峯이 모시고 나열羅列해 있는 형상과 흡사하니 이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생각 컨대 옛날의 재실이 협소한 것을 우려하여 재산을 증식하였는데 다행히 갑인甲寅(1914)년 3월에 종중의 의논이 모아져 잔약한 후손들의 정성과 힘을 다하니 옛날의 숙원을 조금이라도 보상받게 되었다.
편액을 영모永慕라 하니 여러 군에 흩어져 있는 많은 종족宗族이 춘추春秋 시향時享의 날짜를 정하였으니 매년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때에는 근심하고 정성을 들여 제사祭祀를 받드는 것이 영모永慕의 첫 번째 뜻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恭敬하면서 서로 훈계訓戒하고 충과 믿음을 반드시 행하여 아름다운 명성名聲을 후세에 물려주고 선조先祖에 욕됨이 없게 하는 것이 영모永慕의 두 번째의 뜻이다.
종물宗物을 오래 보호하며 근면勤勉하여 자립하고 멀리 바라보고 법규를 세우는 것이 영모永慕의 세 번째 뜻이다.
시경詩經에서 「효자가 끊어지지 아니하여 길이 효자가 태어나리라」라고 하였다. 내가 우리 종족에게 아뢰는 까닭은 다만 글을 못 한다고 실상을 사양할 수 없었다. 훗날에 이 기문記文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오늘날 우리들이 조상을 사모하는 뜻을 알게 될 것이다.
단군기원 4248년 을묘乙卯(1915)년 3월 상순에
후손 전 성균관 박사 기종驥鍾이 삼가 짓다.


【주석】
세사歲事¹⁾ : 한 해 동안 일어나는 일. 또는 한 해 동안의 일.
출천효우出天孝友²⁾ : 타고난 품성이 효성孝誠스럽고 우애友愛가 특출함.
장릉長陵³⁾ : 인조대왕仁祖大王의 릉陵 이름




영모정상량문永慕亭上樑文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