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금암리 상촌 연안차씨 둔암재 遯巖齋

천부인권 2020. 4. 25. 20:16



2020.4.9. 진전면 금암리 상촌마을 연안차씨 둔암재遯巖齋 전경


진전면 금암리 419-2(금암길 285-24)에는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입향조 둔암처사遯巖處士 한민漢敏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1964년에 그 후손 인훈씨仁薰氏와 홍훈씨弘薰氏 등 일가들이 지은 재실齋室이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116m를 표시하고 「위도 35°08'17"N 경도 128°23'22"E」라 알려 준다.
둔암재遯巖齋의 대문에는 사도문斯道門이라 편액 했고, 마당의 좌우에는 2기의 비석이 있으며, 본실本室의 방앞에는 화취헌花醉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재실의 기둥과 방의 기둥에는 주련들이 있으며 마루에는 둔암재상량문遯巖齋上樑文 둔암재기遯巖齋記 및 추모기追慕記와 둔암재원운遯巖齋原韻 둔암재차운遯巖齋次韻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2020.4.9 둔암재遯巖齋 대문에 편액 한 사도문斯道門



2020.4.9. 진전면 금암리 상촌마을 연안차씨 둔암재遯巖齋



2020.4.9. 둔암처사표비와 둔암재遯巖齋 전경



2020.4.9. 진전면 금암리 상촌마을 연안차씨 둔암재遯巖齋 편액



2020.4.9. 진전면 금암리 상촌마을 연안차씨 둔암재遯巖齋 내부 주련



화취헌花醉軒 편액




遯巖齋記
遯巖處士車公 自嶺之八溪轉徙于 咸州之金巖咸吾先子文穆公 遺愛之鄕也 仁政禮俗之美 感物懷惠之澤 時猶去古未遠 故彬彬多尙德 右文之士 公遂樂與徵遂經史 以講質之道義 以磨礱之才豪學邃 聲望籍莞 何嘗有殊鄕之羈懷也 耶然公卽大勳勞剛烈公之孫也 其心常以爲 以祖烈之如是卓卓 而貤有朝家殊恩 則涓挨圖報 姓裔之所當竭蹶 故嘗追憤滿州翟虜事感呤一絶曰 當年南漢事堪驚槿域從玆左袵成 噫彼滿朝諸宰輔虛將淸議欲饕名美矣哉 遯巖翁之所以爲志也 假使翁而在當日 言責之地 鄭桐溪金淸陰諸賢恐不得專美於 割腹焚身之節 而國朝五百年感恩秉執之義幾乎 無愧爲木天黃麻之編矣 然而命與時戾淪落江湖七十年 與之始終者不外乎 殘篇敗稿之役 而身後數百祀遺文 又至盪佚無傳只 以鄕邑口口之證 想狀其典刑而己 則豈天之生 才之理耶 后孫不忍棄 其始卜之地 尙十數家環堵者相 與諏曰凡吾咸州之族 孰非遯祖之后也 報本追遠人人彝性所 天盍亦齋之 而寓慕焉遂乃合衆力 而經始十棟九架 翼然突兀仁薰弘薰二斯文 以其門長老之命 問其記於不佞曰 九世而齋始落願疏 其楣余應之曰 能辦大役於板蕩之世果 永言之思也 然曾聞齋者所以齊也 凡百做措莫不致 其齊況遯翁歲一之事 入此齋而供出賓朋過從之樂 入此齋而應酬宗有事 則會議於 此齋敎子孫 則課讀於 此齋無一事 放忽於心 然後猶可謂齊 入此齋者不可 以不敬也 二斯文曰 惟遂爲之記
西紀一九四六年 己丑 寒露節 西原 鄭宗鎬 記


둔암재기 遯巖齋記
둔암처사遯巖處士이신 차공車公께서 영남嶺南의 팔계八溪로부터 함안咸安의 금암金巖으로 移徙하셨으니 함안咸安은 우리 선조이신 문목공文穆公의 유애遺愛의 향리鄕里이다. 인정仁政과 예속禮俗의 아름다움과 감물感物과 회혜懷惠¹⁾의 혜택惠澤은 당시當時에도 오히려 옛 풍속風俗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빛나게 덕德을 숭상崇尙하고 문학文學을 으뜸으로 삼는 선비들이 많았다. 공公께서는 더디어 경사經史²⁾를 연구硏究하심으로 낙樂을 삼으시어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질정質正³⁾하고 수재秀才들을 연마硏磨시킴으로서 학문學問이 깊고 성망聲望⁴⁾이 적적籍籍하였으니 어찌 타향他鄕의 나그네 회포懷抱를 맛보았으랴. 그러나 공께서는 바로 대훈노大勳勞⁵⁾이신 강렬공剛烈公의 손자이시니 그분의 마음은 항상恒常 조상님의 공렬功烈⁶⁾이 이처럼 초월超越하심으로서 조정朝廷의 특수特殊한 은전恩典을 입었더라면 간신奸臣을 몰아내고 국가의 존립存立을 도모圖謀함은 백성百姓이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하여야 하기 때문에 일찍이 몽고군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침공侵攻하였던 일을 추분追憤⁷⁾하여 통감痛感하며 일절一絶의 시詩을 읊으셨으니 당시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사태事態는 경악驚愕을 견딜 수 있으랴! 무궁화동산이 이로 말미암아 좌임左袵⁸⁾을 이루었네. 아~ 저 조정에 가득 찬 여러 보필輔弼하는 재상宰相들이여! 공연히 장차將次 맑은 의론議論만 하면서 이름만 탐내고저 하구나 하셨다.
아름답구려 둔암공遯巖公의 뜻하시는 바이여! 가령 공公과 같은 분으로 하여금 그 당시當時 임금님께 간諫하는 직위職位에 계셨더라면 정동계鄭桐溪나 김청음金淸陰 같은 여러 어진 분들도 아마 할복割腹하고 분신焚身하신 충절忠節의 아름다움을 독점獨占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며, 국조國朝 오백년五百年동안에 성은聖恩에 감격感激하여 떳떳함을 잡은 의義가 아마 목천木天⁹⁾이나 황마黃麻¹⁰⁾가 엮었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運命이 시대時代와 어긋나 강호江湖에서 윤락淪落¹¹⁾하며 칠십년七十年을 시종일관始終一貫 함께 한 자者는 잔편殘篇과 패고敗稿¹²⁾의 역役을 벗어나지 않으셨는데 돌아가 신지 수백년數百年에 유문遺文이 또한 몽땅 없어져서 전傳하여 내려오지 않고 다만 향리鄕里의 입으로 전傳해 내려오는 것으로서 증빙證憑하여 그분의 전형典刑을 상장想狀할 뿐이라면 어찌 하늘이 재사才士를 낳은 이치理致일소냐 후손들이 차마 그분께서 처음으로 터를 잡은 지역地域을 버리지 못하여 아직껏 십수가十數家가 오순도순 담장을 맞대고 사는 자者들이 서로 더불어 상의相議하며 말하기를 「무릇 우리 함안咸安의 일가들이 누군들 둔암선조遯巖先祖의 후손이 아닐 소냐 근본根本에 보답報答하고 먼 조상祖上님을 추모追慕함은 사람마다 아름다운 성품性品이 하늘처럼 여기는 바이거늘 어찌하여 또한 함께 우모寓慕하지 않을 소냐」하고는 그제야 중력衆力을 합合하여 십동구간十棟九間짜리를 경시經始하여 날아갈 듯이 우뚝하게 짓고는 인훈씨仁薰氏와 홍훈씨弘薰氏의 두 분 선비님이 그들 문중門中의 장노長老들의 명命에 의依하여 그 기문記文을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물으며 말하기를 「구세九世만에 재실을 비로소 낙성洛成하였으니 원願건데 그 문간門間의 기문記文을 지어달라」하였다. 내가 응대應對하여 말하기를 「능能히 대역大役을 능能히 몽땅 헝크러진 세상世上에 조판助辦¹³⁾하였으니 과연果然 영언永言의 생각이다. 그러나 일찍이 듣건대 재실齋室이라는 것은 제계齊戒를 올리는 곳이니 범백凡百¹⁴⁾의 조치措置들이 그 제계齊戒를 이루는 것만 같음이 없나니 하물며 둔옹遯翁님을 해마다 한번 제사祭祀드리는 일을 이 재실齋室에 들어와서 공양供養하고 빈붕賓朋¹⁵⁾을 맞아 지나고 따르는 즐거움을 이 재실에 들어와서 응수應酬하며 종중宗中에 일이 있으면 이 재실齋室에서 회의하고 자손들을 교육敎育하려면 이 재실齋室에서 과목課目을 읽으면서 한가지 일이라도 마음에 방심放心하고 소홀疏忽함이 없게 한 뒤에라야 오히려 가지런히 이 재실齋室에 들어 온 자者들이 가可히 공경恭敬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지 않으리」하였더니 두 분 선비님이 말하기를 「옳습니다」하였다. 드디어 그것으로 기문記文을 삼노라.
기축己丑 1946년 9월 8일경 서원西原 정종호鄭宗鎬 짓다.


【주석】
회혜懷惠¹⁾ : 은혜恩惠를 잊지 않음
경사經史²⁾ :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질정質正³⁾ : 바로 잡음
성망聲望⁴⁾ : ①명성名聲과 인망人望 ②좋은 평판評判 
대훈노大勳勞⁵⁾ : ①매우 큰 공로, ②뛰어난 공훈
공렬功烈⁶⁾ : 뛰어난 공적功績
추분追憤⁷⁾ : 원통怨痛함을 회상回想함
좌임左袵⁸⁾ : 오랑캐의 옷. 청나라 옷
목천木天⁹⁾ : 학사學士의 거소居所
황마黃麻¹⁰⁾ : 당나라 때 조서詔書를 쓰는데 내사內事에는 백마지白麻紙를 쓰고 외사外事에는 황마지黃麻紙를 썼음
윤락淪落¹¹⁾ : ①영락零落하여 타향他鄕으로 떠돌아 다님 ②여자女子가 타락墮落하여 몸을 망치게 되는 상태狀態에 빠짐
패고敗稿¹²⁾ : 헐어서 못쓰게 된 원고原稿
조판助辦¹³⁾ : 도와서 판별하다.
범백凡百¹⁴⁾ : 갖가지의 모든 사물
빈붕賓朋¹⁵⁾ : 손님으로 대접하는 친구




둔암재상량문遯巖齋上樑文



추모기追慕記



둔암재원운遯巖齋原韻



둔암재차운遯巖齋次韻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