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평암리 미천 창녕조씨 서암정 棲巖亭

천부인권 2020. 5. 5. 08:25

 

2020.4.9. 진전면 평암리 미천마을 창녕조씨 서암정棲巖亭

 

진전면 평암리 1034(미천2길 3)에는 애국지사 서암棲巖 조선생曺先生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세운 서암정棲巖亭이 위치한다. 이곳을 구글지도는 「위도 35°09'14.4"N 경도 128°24'00.4"E」를 가리킨다.
창녕조씨昌寧曺氏인 조계승(曺啓承 1880.1.,14)선생은 호號가 서암棲巖이며 옛 함안군 여항면 평암리 미천마을에서 태어나셨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고 민족 해방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오후 2시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5시 마산에서 출동한 일본헌병 포병대대와 현지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1987년 애국지사 서암棲巖 조선생창의비曺先生昌義碑를 세우고 2004년 12월 10일 보훈처에서는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했다.

 

 

창녕조씨 서암정 대청문待淸門

 

대청문待淸門 편액

 

 

棲巖亭記
夫惟名人作亭棲乎 名區而主之是乃 爲名亭名棲 不然而無范文正 以主之雖有岳棲徒然 巴陵之勝狀 無六一翁 以主之雖有氵際亭只 是諸峰之林壑 古來然矣 今豈有異 以余國中所知者論之 若嶠之南咸安郡 義士曺公之棲巖亭 是己之人也 以淵齋宋文忠先生門人 有忠孝之節 成學問道義 可不謂名人乎之地也 艅航之山毓其靈 平巖之里作其地 前有長溪泉石 芳潔雲霞幽深 可不謂名區乎 名人名區相得益章 可不謂名亭乎 宜乎子孫門人 爲之卜策斯亭 而公之藏修乎斯也 聞公之風者 登臨觀賞 而公誦贊美 籍籍之若斯也 雖然人地 與亭有賓主之分仲尼固未聞 別業之居 晦翁雖有武夷精舍 然其爲大賢不在 此焉今玆之亭 固賓之賓也 二樂之觀 動靜之理 亦非其眞乃其實 有在焉吾意其子弟 門人之居斯亭 而紹述邦人 後生之登斯亭 而感想者 宜亦知所先後也 然此乃聖門師生直窮到低之論 則善觀者勿謂不重視斯亭也
玄黓執徐仲秋日 扶寧 金澤述 記

 

서암정기 棲巖亭記
대저 명인名人들이 정자亭子나 누각樓閣을 이름난 지구地區에 지어놓고 주인으로 있으면 이것이 바로 유명有名한 정자亭子나 유명有名한 누각樓閣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범문정공范文正(范希文)公¹⁾이란 주인이 없었더라면 비록 악양루岳陽樓가 있더라도 파릉巴陵의 아름다운 경치도 한갓 허사일 뿐이었을 것이며 육일옹六一翁(歐陽脩)이란 주인이 없었더라면 비록
氵際²⁾亭(醉翁亭)이 있더라도 단지 제봉諸峰들의 임학林壑³⁾만이 고래古來로부터 내려오는 그대로였으리니 지금껏 어찌 특이特異함이 있었으리오. 우리나라 중에서 알아주는 것으로서 논論하여 본다면 영남嶺南의 함안군咸安郡에 있는 의사조공義士曺公의 서암정棲巖亭 같은 것이 이와 같은 것과 그와 같은 사람이다. 연재淵齋이신 송문충선생宋文忠先生⁴⁾의 문인門人으로서 충효忠孝와 지절志節이 있으며 학문學問과 도의道義를 이룩하였으니 가히 명인名人이며 명지名地라고 하지 않을 소냐 여항艅航의 산이 그 영기靈氣르 모우고 평암리平巖里가 그 지역地域을 만들었으니 앞에는 장계長溪와 천석泉石의 방결芳潔⁵⁾함과 운하雲霞⁶⁾의 유심幽深함이 있으니 가可히 명인名人이며 명지名地라고 하지 않을 소냐 명인名人과 명구名區가 서로 만나서 더욱 빛이 나니 가可히 명정名亭이라고 하지 않을 소냐. 의당宜當 자손子孫들과 문인門人들이 그분을 이하여 이 정자亭子의 터를 골라서 짓고서 공公이 이곳에서 수양修養하면서 사셨으니 공公의 풍성風聲을 듣는 자들이 올라와 보고 관상觀賞하며 공公을 칭송稱頌하고 찬미贊美하기를 자자하게 함이 이와 같구려! 그러나 비록 사람이나 지역地域이나 또는 정자亭子에는 손님과 주인의 구분區分이 있나니 중니仲尼(孔子)는 진실로 별업別業의 거소居所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회옹晦翁(朱子)은 비록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기는 하나 그분들이 있지 아니하였다. 지금 이 정자亭子의 빈객賓客에는 이락二樂의 관경觀景이나 동정動靜의 이치理致가 역시 그 진짜가 아니고 이에 그 실상實象이 따로 있으니 내가 의도意圖하여 보건대 그분의 자제子弟이나 문인門人들이 이 정자亭子에 거居하며 소술紹述하고 방인邦人이나 후생後生들이 이 정자亭子에 올라서 감상感想하는 자들이 의당宜當 역시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알린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문聖門의 사생간師生間에 똑바로 끝까지 밑바닥에까지 닿는 논論리라면 잘 볼 줄 아는 자들은 이 정자亭子를 중시重視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임진壬辰 중추일仲秋日(8월 15일) 부녕扶寧 김택술金澤述 짓다.

 

【주석】
범문정공范文正(范希文)公¹⁾ : 송나라 때의 인물 범중엄范仲淹
氵際²⁾ : 물가언덕 제
임학林壑³⁾ : 산림의 깊숙하고 으슥한 곳
연재淵齋이신 송문충선생宋文忠先生⁴⁾ :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대전시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대한제국기 『연재집』, 『근사속록』, 『패동연원록』 등을 저술한 학자. 순국지사.
방결芳潔⁵⁾ : 향기 나고 깨끗함
운하雲霞⁶⁾ : 구름과 노을

 

 

 

 

서암정棲巖亭 편액

 

 

棲巖亭記
艅航之南 峽曰咸之琵谷 谷邃而林密縁磵 路而出則巖洞 稍闢有巨石上平 可坐千人曰平巖 巖下一弓許有亭新起 臨于磵上者 乃義士曺君益仲之隱居也 頃年義士之弟敬承長子秉大 相繼見訪於月港假寓曰 吾父兄平生專事學問 不以事物經心遠近知 舊與及門諸生相議捐佽 亭之所由起者然也 願子之名之亭而記之 余辭以非其人 粤歲年而義士 忽賁然過問見其威儀 眞儼然嗜德君子也 歸終月矣 而赴車至 若人不淑云爲之嗟 惜 而久之往哭其寢門 秉大旣朖闋 而又訪余 俾遂前噣余 去國多年 與義士未獲夙昔相覯 然竊聞諸士友間 義士早從 曺迃堂 朴良巖 曺深齋 諸名碩 逰質其疑難納覱于淵齋宋文忠公函下 亟被獎詡其博學無方 如是也 値島夷入據之日 誓死復國聲明大義 以儒衣儒冠 倡率義徒 制我弱梃橽彼堅利 至囚三年之倭窖 而百死不屈 旣事竟無奈 則沫血飮泣 杜門吟病 諸人之所以構斯亭 而欲義士之休 養消受者 而義士則殷憂在心 雖處斯亭不欲扁額 以侈其楣 詩文以道其志 則其立節自靖如是也 夫士之志於道 不可須臾有間者學問也 名節持其學問中一事也 自此學之不講 世之號學問者 未必勵其名節 名節者未必深於學問 然則與其失於名節而有其學問 寧淺於學問而保其名節之爲貴也 然徒以名節之立 而謂斯人之能事己畢則實愧 受中之責已 噫以是求全於斯世如義士者有幾哉 義士雅無標號堂喜居別墅 後學子稱別墅翁 斯亭之素無扁額 亦君之意有在也 亭不可以無名 亭在平巖之下 而義士一生 棲息焉者 著其楣曰棲巖之亭 庶不失義士之遺意歟 因悉次顚末 而爲之記
己丑 端午日 凝川 朴正善 記

 

서암정기(棲巖亭記)
여항산 남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함안의 비곡(琵谷)이다.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하며 냇물이 맑은데 길을 따라 나오면 바위로 된 골이 있는데 점차 펼쳐져 큰 너럭바위로 위가 평평하여 거의 천여명이 앉을 수 있으므로 평암(平巖)이라고 한다. 평암 아래 몇 발짝 즈음에 새로운 선 정자가 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의사(義士) 조익중(趙益仲) 군이 은거하던 곳이다. 지난해 의사의 아우인 경승과(敬承)과 장자인 병대(秉大)가 월항(月港)의 집으로 연이어 나를 찾아와 말하였다. ‘우리 부형(父兄)이 평생 전념한 학문은 사물에 마음을 맡겨 그 마음이 멀고 가까움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문하의 여러 선비들이 서로 기금을 내어 도우기로 의논하였는데 정자가 서게 된 이유가 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대에게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원하노라.’하였다. 나는 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다. 지난 그 해에 의사가 홀연히 의거하니 그 위엄과 의리에 대한 소문이 높았으니 참으로 엄연한 덕을 좋아하는 군자였다. 세상을 떠나던 달에 상여를 실을 수레가 오니 사람이라면 누군든 그를 위하여 울며 탄식하지 않았겠는가. 그의 빈소에 가서 곡하였다. 병대(벼대)가 이미 삼년상을 마치고 또 나를 방문하여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라를 잃은지 몇 해나 되었는데 의사도 아침저녁으로 뵈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들으니 여러 선비와 벗들에게 들으니 의사는 일찍이 조우당(曺迂堂) 박양암(朴良巖) 조심재(曺深齋) 등 여러 이름난 학자들을 따라 그 의문난 것을 질문하여 교유하였는데 연재(淵齋) 송문충공(宋文忠公)의 자리 아래에 어렵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고 칭찬을 받았는데 그 학문의 넓음이 닿는데가 없음이 이와 같았다. 왜적이 침략해 올 때 죽음으로 나라의 명성을 회복한다는 대의로 맹서를 하고 유교의 의관을 한 채로 의병을 일으켜 나의 약한 회초리를 잘 제어하여 상대의 예리한 곳을 쳤다. 인하여 왜적의 굴에 삼년동안 갇혀 지내면서도 백번을 죽어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어쩔 수 없으니 피눈물을 마시며 문을 닫고 병을 앓았다. 사람들이 이 정자를 지어 의사의 아름다운 소양을 드러내려고 한 까닭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도 의사이지만 마음에 큰 근심이 있다. 비록 이 정자에 있어도 편액으로 그 문지방을 꾸미려고 하지 않았는데 시와 문장에 그 뜻을 말한 것으로 절의를 세워 스스로를 바르게 한 것이 이와 같았다. 무릇 선비가 도에 뜻을 두면 잠시라도 틈이 있을 수 없는 것이 학문이다. 명예와 절의는 그 학문을 지탱하여 한가지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로부터 배움이 강론되지 않고 세상에 학문한다고 이르는 사람들이 그 명예와 절의에 힘쓰지 않는다. 명예와 절의가 반드시 학문보다 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예와 절의를 잃고 학문을 가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학문이 낮더라도 명예와 절의를 지키는 것이 귀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명절(名節)을 세우는 것으로 이 사람이 그 일을 다 했다고 한다면 실로 자신이 받은 책무에 부끄러울 뿐이다. 아아! 이러한 까닭에 의사와 같은 사람을 온전히 구한다면 몇이나 되겠는가. 의사는 아무런 이름도 없는 별서에서 기쁜 마음으로 살았기에 따르는 학자들이 별서옹(別墅翁)이라 불렀다. 이 정자에 본디 편액이 없었던 것은 또한 의사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에 이름이 없을 수 없다. 정자가 평암 아래에 있고 의사가 평생을 살았던 곳이므로 그 문설주에 서암정(棲巖亭)이라 걸었으니 아마 의사의 남긴 듯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인하여 그 전말을 차례로 기록하여 기문으로 삼는다.
기축(己丑) 단오일 응천(凝川) 박정선(朴正善) 쓰다.

 

 

서암정상량문棲巖亭上樑文

 

서암정 棲巖亭 내부의 비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