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일암리 초계변씨 성구사 誠久祠 영역

천부인권 2020. 6. 8. 11:18

2020.7.7. 초계변씨 성구사 전경

2015.5.6. 일암리 초계변씨 성구사誠久祠 영역의 건물들


진전면 일암리 394-2(일암1길 151)는 4·3삼진의거 발상지로 성구사誠久祠 영역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245호』로 지정이 된 초계변씨草溪卞氏 3현賢을 모신 사당祠堂인 성구사誠久祠를 비롯하여 유학을 가르쳤던 도산서당道山書堂과 동재東齋인 일신재日新齋, 서재西齋인 존양재存養齋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구글 지도가 「위도 35°07'15.5"N 경도 128°22'42.4"E」를 가리킨다. 
문도산問道山 기슭 아래에 위치한 일암리日岩里 성구사誠久祠 영역은 우리지역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곳으로 초계변씨草溪卞氏 문중門中의 3현三賢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성구사誠久祠는 고려말에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낸 변빈卞贇과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순국한 병조판서兵曹判書 변연수卞延壽, 변립卞岦 부자父子 등 세분의 충렬忠烈을 모신 곳이다. 
변빈卞贇은 이태조李太祖가 조선을 건국하자 불사이군不仕二君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가운데 한 분이다. 또한 변연수卞延壽 장군은 임진왜란 때 향리에서 의병을 모아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 당항포唐項浦에서 전사했으며, 변연수의 아들인 변립卞岦 역시 당항포 전투에서 순국한 분이다. 
특히 1919년 4월 3일 옛 진해현鎭海縣 일원에서 일어났던 항일운동(4·3삼진의거) 때 성구사誠久祠를 중심으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를 모의한 곳으로서 4·3삼진의거 발상지로 전해진다.
성구사誠久祠 영역으로 들어가는 첫 솟을문에는 정로문正路門이라 편액 했고 문의 좌측에는 고직사가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마주하고 동재東齋인 일신재日新齋, 서재西齋인 존양재存養齋가 있고 정로문正路門과 마주하는 내문內門에는 화실문華實門이라 편액 했고 화실문華實門 뒤쪽에는 도산서당道山書堂이 있다. 여기 까지는 향교와 마찬가지로 강학의 공간이고 도산서당道山書堂 뒤쪽에 초계변씨草溪卞氏 3현賢을 모신 성구사誠久祠가 위치한다.

 

성구사 일신재 존양재의 출입문인 정로문正路門

 

정로문正路門 편액

 

2015.5.6. 일신재日新齋 모습

日新齋記
汾陽之東峙 然疊翠者問道山也 其下有一書舍瀟灑可喜者 卞氏家塾也 塾之刱久矣 幾十年之間 自淡阮而移仙坪 自仙而重移于日村 其間架制度視舊 稍增聚徒肄業庶無不能容之歎 卞君相華過余而請名 乃以日新類 其楣是歲秋 又以其大人之命 來謂余曰 子旣錫扁盍演 其義而識之 自顧衰墉澁於亭楮而講磨 相長之言 庸可己乎 夫人之所 以爲人而參天地 替化育者 以其有明德也 德之本明猶身之本 潔物欲蔽之 則本明者 昏塵垢染之 則本潔者 汚明之之 瑞潔之之 功其致一也 若有所怠而忽忘焉 則所謂參贊者惡在是 以古之聖賢 兢兢業業固無一時 而不戒謹恐懼必於 當用之器因 其事而刻銘 以致警焉湯之盤銘是也 其曰苟日新者 爲學入頭處也曰 日新又日新者 要常常無間斷也 蓋爲學之道 必從存養省察上做去存養省察之功 卽所以去其心之昏蔽 而如疏瀹澡雪 以去身之鹿垢也 然旣新矣 而所以新之之功 不繼則利欲之交復 有如前日之昏猶身 旣潔矣 而所以潔之之功 不繼則塵垢之集復 如舊染之汚也 必因其已新而日 日新之又日新之無所間斷 則心之明德 常明而不復 爲利欲之昏吁 湯聖人也 不邇聲色不殖貨利居 上克明宜無事於 自警而其用功 猶如是況初學之士乎 學以不以聖人爲標準 則其志因循昏惰只做 邯鄲舊步 而已可不戒哉 且況世級日 降俗趨日皁滔滔者利也 汨汨者欲也 能勇猛奮躍邐迤向上去者 今幾希惟下代 以忠孝世家藏經史子集于 塾收族黨子弟 而敎之互修相勉見 善從之聞義 則服韙哉 其述先趾美之規 敎睦正誼之風足 以勵俗而勸後也 然則几居是塾者 苟顧名思義 日從事於聖賢之學 進進木已無日 而不新可無幾焉 而仁里之美 眞相符于名 豈偶然哉 書此而復之 爲日新齋記
著雍閹茂 恩津 宋秉珣 撰

일신재기 日新齋記 
분양汾陽의 동쪽에 우뚝 솟은 푸름이 첩첩으로 쌓인 것이 문도산問道山이다. 그 아래 서당書堂이 있는데 말고 깨끗하여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이 변씨가문卞氏家門의 서당書堂이다. 서당書堂이을 지은지가 오래되어 수십년數十年 사이에 담완淡阮으로부터 선평仙坪으로 옮겼다가 선평仙坪으로부터 다시 일암촌日岩村으로 옮겨 왔다. 그 규모規模와 제도制度가 예전과 비교比較하여 보면 조금 커졌다. 생도生徒를 모아 학업學業을 익히는데 집이 좁아 수용收容할 수 없는 탄식歎息이 있었다. 변군卞君 상화相華가 나를 찾아와서 당堂의 이름을 청하여 일신재日新齋라고 현판懸板을 하고 그해 가을에 그 아버지의 명命으로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편액扁額을 지어 주었으니 어찌 그 뜻을 풀이하여 기문記文을 지어주지 않을 수 있습니까」하였다. 내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이미 쇠약衰弱하고 문필文筆에 우둔愚鈍하지만 서로 갈고 닦아 진보進步하는 말을 어찌 그치겠는가. 대저 사람이 사람 된 까닭은 천지天地에 참여參與하게 되어 만물萬物의 화육化育을 도우는 것은 명덕明德이 있기 때문이다.
덕德이 본래本來 밝은 것은 몸이 본래本來 깨끗한 것과 같은데 물욕物欲이 가려 본래本來 밝은 것이 어두워지고 세속世俗의 먼지와 때가 물들여 지므로 본래 깨끗한 것이 더러워진다. 밝히는 단서端緖와 깨끗하게 하는 공功은 그 이름은 한가지 이다. 만고萬苦에 태만怠慢하여 홀연忽然히 잊어버리면 이르는바 천지天地에 참여參與하고 만물萬物을 화육化育하는 도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날의 성인聖人이 삼가고 두려워함이 진실로 때로 경계警戒하고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두려워함은 반드시 항상恒常쓰는 기본基本인데 그로 인因하여 명銘을 새겨 경계警戒함을 이루게 된다. 탕왕湯王이 [목욕沐浴하는] 그릇에 새긴 것이 이것이다. 그 반명盤銘¹⁾에 가로대 「진실로 날로 새롭게 하라」라고 한 것은 학문學問에 들어가는 첫 걸음이 되는 것이다.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라는 것은 항상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을 구求하는 것이다. 대개 학문하는 도는 반드시 존양성찰存養省察²⁾을 쫒아서 위로는 존양성찰存養省察의 공功까지 이르러 그 몸의 어둡고 가려진 것을 제거除去하는 것은 추醜한 것에 빠진 것을 깨끗이 씻어내어 그 몸의 먼지와 때를 제거除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미 새로워져도 새롭게 하는 공功이 이어지지 않으면 이욕利慾의 교류交流가 다시 전일前日의 혼폐昏蔽³⁾와 같게 될 것이며 또 이미 몸이 깨끗하여져도 깨끗하게 하는 공功이 이어지지 않으면 먼지와 때가 다시 옛날에 더러운데 물들여진 것과 같다. 반드시 자기 몸이 새로워지므로 인因하여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여 간단間斷함이 없으면 마음의 명덕明德이 항상 밝고 다시 이욕利慾의 어둡고 더러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탕왕湯王은 성인聖人이다. 음악音樂과 여색女色을 가까이 하지 않고 재화財貨의 이식利息을 불리지 않고 윗자리에 있으면서 덕德을 밝히면 스스로 경계警戒하는데 아무 일이 없을 것이고 그 공功을 쓰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은 것인데 하물며 처음으로 학문學問을 하는 사람에 있었으랴. 배우면서 성인聖人을 표준標準으로 하지 않으면 그 뜻이 어둡고 태만怠慢으로 말미암아 다만 자기의 본분本分을 잊게 되어감단구보邯鄲舊步⁴⁾할 따름이니 경계警戒하지 않을 손가. 또 하물며 세상이 날로 쇠衰하고 풍속風俗이 날로 비하卑下하여 세상의 풍조風潮를 따라가는 것은 이利이고 동요動搖하여 불안 해 하는 것은 욕欲이다. 능能히 용맹勇猛하고 일어나서 차차 위로 향하여 가는 사람은 지금은 거의 드물다. 오직 변씨卞氏들은 충효忠孝의 세가世家로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로 자집子集을 서당書堂에 간직하고 족당族堂의 자제子弟들을 모아 서로 닦고 면려勉勵하기를 가르치고 선善을 보면 따르고 의義를 들으면 감복感服하니 훌륭하도다. 그 선대의 아름다운 법도法度를 전술傳述하고 종족끼리 화목和睦하여 올바른 풍속은 세속世俗을 교화敎化하고 후진後進을 근면勤勉하는데 충분할 것이다. 그런즉 이 서당書堂에 거처居處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일신재日新齋의 현판懸板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며 날마다 선현聖賢의 학문學問에 종사從事하여 진취進取을 거치지 않으면 날마다 새롭지 않음이 없어서 거의 일신日新으로 될 것이며 마을에 인후仁厚한 인심人心의 아름다움과 서당書堂의 이름이 서로 부합符合되는 것이 참으로 우연偶然한 일이겠는가. 이로서 다시 일신재日新齋의 기문으로 삼는다.
무술戊戌(1958)년 8월 하순에 은진 송병순宋秉珣 지음.

【주석】
반명盤銘¹⁾ : 탕지반명湯之盤銘이란 말로 은대殷代의 탕왕湯王이 ‘盘’(목욕통)에 조각한 명銘
존양성찰存養省察²⁾ : 본심本心을 보존保存하고 본성本性을 기르며 자기의 언행言行을 반성反省함
혼폐昏蔽³⁾ : 어둡고 가려진 것
감단구보邯鄲舊步⁴⁾ : 연燕나라의 소년少年이 조趙나라의 서울 감단邯鄲에 가서 서울 사람들의 한아閒雅한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아직 익숙益熟하기 전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서울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그 전前의 걸음걸이도 잊었다는 고사古事이다. 즉 자기의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를 내서는 안 된다는 비유

 

 

存養齋記
汾江之東日岩里有祠曰 誠久卞氏三忠妥侑之所也 堂曰道山堂堂之下 有齋曰日新曰 存養日新則心石先師發揮 其實而存養 則記事尙闕焉 掌議宋鍾喆李家鎬 囑余爲記辭不獲强筆 而言曰夫存養之義 其志大矣 孟子不云乎 存其心養 其性盖心統性情者也 若不操在涵養 則瞬息之頃出入 無時莫知所嚮 豈不可愼哉 是以惟湯之盛德 其常恐懼刻共盤 而銘之曰 苟日新又日新盖操存而不捨也 省察而做工也 以若聖人之睿智 其戰兢之工 猶尙如此況其下者 而若無養存之功 道之浩浩於何所從而下手也 然則新齋之命名 其偶爾哉 噫學之之道在乎 存養之如何 苟不究諸於二字之義 而徒以記誦詞章之習 爲能事則鳥可謂學問爲哉 凡吾黨之入 是齋而學焉者 顧名思義從事於斯 而孜孜無怠慥慥以進 則爲聖爲賢亦不外乎 此而又能奉承 而不違於天之所 以與我之大德直養得 仁義之性 軆先生立命之至意也 盍相勉旃哉
孔子誕降後二千四百八十二年 辛未榴夏下澣 河東 鄭煥喆記

존양재기 存養齋記
분강汾江의 동쪽 일암리日岩里에 「성구사誠久祠」라는 사우祠宇¹⁾가 있는데 여기에는 변씨卞氏 삼충三忠의 신주神主를 편히 모신 곳이다. 강당은 도산당道山堂이고 당의 아래에는 일신재日新齋와 존양재存養齋가 있는데 일신재는 심석선사心石先師가 그 사실을 나타내었고 존양재는 아직 기문記文이 없다. 장의掌議²⁾ 송종철宋鍾喆과 이가호李家鎬가 나에게 기문記文을 촉탁囑託하여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억지로 붓을 잡으면서 말하기를 대저 본심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존양存養의 의리義理는 그 뜻이 크다 맹자孟子가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 본심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기르는 것은 대개 마음이 성정性情을 통솔하기 때문입니다. 만고에 조재操在³⁾하고 함양涵養하지 않으면 눈깜짝할 사이에 출입이 때가 없어 향할 바를 알지 못하니 어찌 삼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탕왕이 성덕盛德을 항상 두려워하여 목욕하는 그릇에 새기기를 「진실로 하루가 새롭거든 또 날로 새롭게 하라」한 것은 마음을 잡고 놓지 않는 것이며 자기의 언행을 반성하고 공부工夫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인의 예지睿智로도 두려워하며 조심하는 공부가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그 아래된 사람들이 본심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공이 없을 것 같으면 도道의 넓음을 어느 곳에 따라 손을 쓰겠는가? 그런즉 새 재실齋室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아아! 배우는 도道는 존양의 여하如何에 있으니 진실로 이 존양 두 자의 뜻을 연구하지 않고 한갓 기송記誦⁴⁾과 사장詞章⁵⁾의 익힘을 능사能事로 삼으면 어찌 학문을 한다고 하겠는가. 무릇 우리 유생들이 이 재사齋舍에 들어와서 배우는 사람들은 재사의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며 이 존양재에 종사하며 부지런하고 태만怠慢하지 않고 독실하게 나아가면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것도 이 밖에 있지 않다. 또 받들어 이어나가면은 하늘이 나에게 준 대덕大德에 어긋나지 않아 바로 인의仁義의 성품性稟을 기르게 되고 선생이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천명天命을 따르는 지극至極한 뜻을 본받게 될 것이다.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공자탄강 후 2482년 신미辛未(1931) 5월 하순에 하동 정환철鄭煥喆이 짓다.

【주석】
사우祠宇¹⁾ :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
장의掌議²⁾ : 조선시대 성균관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齋會)의 임원
조재操在³⁾ : 항상 훈련하다.
기송記誦⁴⁾ : 기억하여 욈. 외우고 읽기만 하고 이해하려고 힘쓰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학문.
사장詞章⁵⁾ : 시가와 문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일신재日新齋 편액
2015.5.6. 성구사 내문 화실문華實門
화실문華實門 편액

 

도산서원과 화실문華實門

 

도산서원道山書院
도산서원道山書院 편액
성구사 내삼문
성구사誠久祠

誠久祠記
嶺之南晋之東道山之陽 有誠久祠其正堂曰 道山卞氏三忠妥享之所 而門下評理諱贇 贈兵曹判書諱延壽 贈左承旨諱岦是也 評理公見麗運將訖 與判書成萬庸 博士鄭夢周 提學洪載 大司成李穡 典書金成牧 典書趙悅 進士李午會公之堂把 酒哦詩傷時慨泣曰 殷有三仁比干死 微子去箕子爲奴 今吾輩各自隨意行之咸曰 諾公遂歸隱于 杜門罔僕自靖 判書公當穆陵龍蛇之亂 以訓鍊主簿率 其子岦 倡募義旅 從李忠武摩下累樹戰勳 丁酉再猘戰 父子俱殉岦妻金氏 亦從殉一門三綱何其壯哉 列聖朝加 贈是職特命旌閭 噫乎盛矣 後孫持憲應洙 與諸宗刱建 是祠詢于章甫皆 以爲三忠之賢 有合於勤事法施之典春秋兩丁 以奉享祀 評理卽判書之十世祖 承旨判書之子也 奉安之始 以評理胤子門下侍郞靜庵 謂爲麗罔僕之忠 並享腏食者 以其信野史 與家乘矣 及夫國朝實錄出而印佈 則其事蹟 有未合於祀典 故本孫及章甫相 與謀釐正曰 埋安旣享之位碑 雖甚未安安可 以一時之未安 而獨不念百世之公議乎 旣而使堂 任趙瀚奎本孫相憲訪余於五百里之遠 而咨諏 以善處之道 且請記文 以實之余方癃極垂死不能 與論此事然竊念忠孝 天理之在人 而人道之所以立也 凡有天性者孰不尊慕 而如有一毫未當 則亦安敢自隱於心 而掩其眞誠哉 卞氏今日之擧以人情 則容有所不忍 而以天理 則亦有所不忍不改矣  噫乎忠孝絶 而人道不立私僞作 而邦運未復邪說橫 而斯文不振 是皆有欠於至誠而然也 子思子曰 至誠無息不息 則久三忠之誠 以其不息 故能全節成仁 而五百三百年之久 而後褒典加旌俎豆有所 所謂久則徵徵則悠遠者 而此祠之所以名也 從事此祠者以三忠之誠 爲誠而以盡夫忠孝之道 無一毫私僞則人道立 而邦運復邦運復而斯文有光矣 豈不偉哉 豈不勉哉是爲記
乙未 臘月望日 完山 崔秉心 謹撰

성구사기 誠久祠記
영남의 남쪽에 위치한 진주에서 동쪽으로 가면 도산의 남쪽에 성구사誠久祠가 있다. 그 정당正堂을 도산서원이라 하며 변씨卞氏 삼충三忠의 향사를 받드는 곳이다. 고려조에 문하평리를 지내신 이름이 빈贇과 조선조 선조 때에 증 병조판서를 지내신 이름이 연수延壽와 그의 아들 증 좌승지를 받은 립岦 세분이시다. 
평리공評理公은 고려의 국운이 다 되었음을 예견하시고 판서 성만용成萬庸, 박사 정몽주鄭夢周, 제학 홍재洪載, 대사성 이색李穡, 전서 김성목金成牧, 전서 조열趙悅, 진사 이오李午 등과 함께 공의 집에 모여 술잔을 잡고 시를 읊으며 상심하여 시대를 개탄하면서 울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은나라에 세 충신이 있었는데 모함을 받아 비간比干은 죽고 미자微子는 떠나고 기자箕子는 노예가 되었다. 지금 우리들은 각자 의사에 따라 행동하자」라고 하니 모두 승낙하였다. 드디어 공은 두문동으로 들어가 은거하여 고려조에 대해 충절을 지켰다. 판서공判書公은 선조 때 훈련원주부로 임진왜란 때 그 아들 립岦과 함께 모집한 의병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충무공의 휘하로 들어가 여러번 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에 부자가 함께 순절하였다. 
변립卞岦의 처 김씨 또한 따라서 순절하여 한 문중에서 세 사람의 충신과 열녀가 나왔으니 어찌 그렇게도 장한가. 열성조列聖朝가 증직을 더하고 특별히 정려를 내렸다.
아아! 성대하도다. 후손 지헌持憲(관명) 응수應洙가 여러 종친과 함께 이 성구사를 창건하기로 계획하고 사림들의 자문을 받아 삼충의 어짐이 왕사에 부지런한 사람에 시행하는 법에 따라 봄·가을에 두 번의 정일丁日에 향사를 드림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평리공은 곧 파서공의 10세조이며 승지는 판서공의 아들이다. 봉안한 처음에는 평리공의 맏아들 문하시랑 정암공靜庵公을 함께 배향한 것은 고려를 위하여 절의를 지킨 충신이라는 야사와 가승家乘을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실록이 출간 배포되어 사적이 제사 지내는 법도에 미흡하여 본손과 유림이 서로 의논하여 바로잡고자 하면서 「이미 배향된 위패를 땅에 묻는 것은 비록 매우 미안한 일이지만 어찌 일시에 미안하다고 변씨 문중만 백세의 공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당을 맡아보고 있는 조한규趙瀚奎와 본손 상헌相憲이 오백리 먼 길에 나를 찾아와서 선처할 수 있는 방법을 묻고 또 사실의 기문을 청하기에 내가 바야흐로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지라 이 일을 함께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충효는 천리이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하물며 하늘이 내린 성품을 누가 높이 사모하지 않겠는가. 
털끝만큼이라도 합당하지 않는다면 어찌 스스로 마음을 숨겨서 진실된 정성을 가릴 수 있겠는가? 변씨들의 오늘에 취한 행동은 인정으로서는 용서하고 차마 할 일이 못되지만 천리로서는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충효가 끊어지고 사람의 도가 땅에 떨어지면 사사로이 거짓이 작용하여 국운이 회복되지 않고 바르지 않는 설이 횡행하여 유학이 부진한 것은 모두 지극한 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자사자子思子가 「지성至誠은 쉼이 없으니 쉬지 않으면 오래 간다」라고 하였으니 삼충三忠의 지성도 쉬지 않으므로 절의를 온전히 하고 인仁을 이루어 오백년 삼백년이 지난 후에도 나라에서 포상하는 은전을 내리고 정여를 더하여 사우祠宇가 있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오래되면 징험徵驗이 나타나고 징험이 나타나면 유원悠遠하다」라고 한 것이 이 사우祠宇의 이름이 된 까닭이다.
이 사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삼충三忠의 정성을 정성으로 하여 충효의 도를 다하고 털끝만큼의 사사로운 거짓이 없으면 인륜도덕이 바로 서고 국운이 회복되며, 국운이 회복되면 유학도 빛날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는가. 또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이로서 기문을 삼는다.
을미년 섣달 보름에 완산 최병심崔秉心이 삼가 짓다.

誠久祠記
祠本卞靜菴門下侍郞曁其後孫判書承旨 三公妥享之所 而士議以爲靜菴之 考門下評理公已並享 於松京杜門諸賢之祠 則此固通國所共尊也 可無玆鄕子孫士林瞻慕之所乎於是 又虔奉於本祠三 公之右伻本孫禎燮徵記 於不佞不佞辭不獲則曰 靜菴判書承旨三公之事行磊落前記已盡無容復贅 惟評理公謹按 其事狀則自少 有匡君澤民之志 而時有不可難進 而易退及麗運將訖 與判書成萬 庸博士鄭夢周 提學洪載大司成李穡典書金成牧 典書趙悅進士李午丹丘金厚會于 公堂把酒吟詩 傷時慨惋灑涕而言曰 殷有三仁或死或去或爲奴 吾輩亦可隨意行之咸曰 諾公遂歸隱于 杜門洞以 終焉 嗚呼公堂當日諸公之言 皆出於孤忠精義而 卒之或殺身成仁或鞱晦自靖 其蹟雖殊 其心則一 也 蓋公之仕進也迍邅 而未得伸匡救之志處義也 隱晦而無聲氣之動人 故沉晦至 今褒典未及贊述 無傳 然惟其忠義之眞心實理 初不以迍邅隱晦 有所間焉 故其淸風遺烈不泯 於五百餘年之久 而使人能感發興起著顯 於士林之公議而躋享於俎豆之列 又其子姓蕃衍燀赫忠孝義烈俱萃一門 何其 盛哉 有實則終顯源深 則流大理固然也 惟僉章甫之從事乎 是祠者無 以今日之妥奉虔祀謂盡 吾事 而須求其忠義之眞心實理勉勉焉 體之於身期有 以自立於倫綱墜盡之日夫 然後其爲慕先慕賢者 有其實而不歸於徒然也哉
而堂先生文集 - 權載奎 記

 

성구사誠久祠 편액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