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재문집(近齋文集)』은 동래정씨 정지순(鄭之純)의 문집으로 1998년 칠곡군 지천면에 사는 손자 정문흥(鄭文興)이 발행한 전통 책을 엮는 방식인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으로 엮었고, 노루지 겹장에 순 한문으로 기록된 책이다. 책은 석판본이고 3책(天·地·人)이 완질이며, 권두에 이노주(李魯柱)의 서문이 있고, 3권 말미에 문백(文栢)의 발문을 붙였다. 인쇄는 대보사가 했다.
책의 크기는 가로 19.8cm, 세로 29cm이고, 목차 44p를 빼고, 604p이다.
이 책은 2025년 10월 주문한 책 대신으로 합동북에서 보내온 것으로 가격은 공짜 비슷했지만 판매가격은 30,000원으로 보인다.

序
晚求李先生講道于西洛書堂也 四方文學之士執贄請教者甚多 而近齋先生鄭公亦其一也 公以清明粹美之資 生累世文獻之家 其所觀感而薰梁者固己有異於人而及登師門耳目益以開廣造詣益以精深是以先生亟加補許 而同門諸子亦皆推重以爲不可及然公則欿焉不以自足方且亹亹進不休也 其於書無所不讀 而必本於經傳於行無所不備 而尤篤於倫理 其施於家庭日用之間 者無不合於矩規 而處於鄉黨宗族者 亦皆秩如也 顧一生爲窮鬼所困遷徙流離不寧 其居中寓玄風之蘆耳洞 則家益貧甚往往朝脯不繼然未嘗以一毫非義枉于於人嗚乎 士窮見郎義若公者豈非其人耶晚年返于 故里構一屋子處於其中日以敎授生徒應酬文字爲樂儼然有一方師表之望矣 所交者皆一時之賢 而尤與曺深齋李茶谷文壽峰諸公 親善講磨談討殆無虛月可見其至樂也 公於著述非其所屑然天分甚高臨紙抽毫頃刻 而寫出所欲言自能合 於古作者軌範 而無世俗雕篆塗澤之習 其可傳於後無疑也 歿後有遺集四冊藏于 巾衍者有年至是公之孫 文興與其再從叔孟杓議將印行之 以其族霞山所 爲狀求余序文 余於公聞風久矣 而第未遂覿德之願 常窃爲恨今以文字託名卷端 以償其生平慕用之私 亦足爲幸遂不辭 而爲之叙如此云
丁丑七月處暑節 星山李魯柱 序
서문(序)
늦은 나이에 이(李) 선생을 찾아가 서락서당(西洛書堂)에서 도(道)를 배웠는데, 사방의 문학하는 선비들이 예물을 갖추고 가르침을 청하는 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근재(近齋) 선생 정공(鄭公) 역시 그중 한 분이었습니다. 공은 맑고 순수한 아름다운 자질을 지녔고 여러 세대에 걸쳐 문헌을 쌓아온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그 보고 느끼며 영향을 받은 바가 진실로 이미 남들과는 다름이 있었습니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견문이 더욱 넓어지고 학문의 경지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도 그를 크게 칭찬하고 인정하셨으며, 동문들 또한 모두 그를 존경하며 미치지 못할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공은 겸손하여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도리어 부지런히 나아가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책에 있어서는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반드시 경전(經傳)에 근본을 두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갖추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특히 윤리(倫理)에 독실했습니다. 가정에서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모습은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며, 마을과 일가친척 사이에서 처신하는 것 또한 모두 질서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며 떠돌아다녀 거처가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현풍(玄風)의 노이동(蘆耳洞)에 잠시 머물 때에는 집안이 더욱 가난해져 아침저녁 끼니를 잇지 못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터럭이라도 의롭지 않은 것으로 자신을 굽혀 남에게 구하는 일이 없었으니, 아! "선비는 궁할 때 그 절의(節義)가 드러난다"고 하였는데, 공과 같은 분이야말로 그런 분이 아니겠습니까?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집 한 채를 짓고 그곳에 머물며, 날마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문자로써 사람들에게 응대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셨습니다. 엄연히 한 지방의 사표(師表)로서 존경받는 모습이었습니다. 교유한 이들은 모두 당대의 현인들이었고, 특히 조심재(曺深齋), 이다곡(李茶谷), 문회봉(文晦峰) 같은 분들과 친선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토론하기를 거의 한 달도 거르지 않으셨으니, 그의 지극한 즐거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공은 저술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었으나 천분이 매우 높아, 종이를 앞에 두고 붓을 들면 순식간에 하고자 하는 말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 글은 저절로 옛 대가들의 법도에 부합하였고, 세속의 기교를 부리고 겉만 꾸미는 습성이 없었습니다. 그의 글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공이 돌아가신 후 남기신 문집 네 책이 수건에 싸여 보관된 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이에 공의 손자인 문흥(文興)이 그의 재종숙(再從叔)인 맹표(孟杓)와 함께 문집을 간행하고자 논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친족인 보산(寶山)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저에게 서문을 부탁했습니다.
제가 공에 대해서는 명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으나, 다만 직접 그분의 덕을 뵙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늘 남몰래 한스럽게 여겨왔습니다. 이제 이 글로써 문집의 첫머리에 이름을 올리어, 평생토록 흠모해 온 저의 사사로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게 되니 또한 다행이라 여깁니다. 이에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서문을 씁니다.
정축년(丁丑年) 7월 처서절(處暑節)에 성산(星山) 이노주(李魯柱)가 씁니다.





跋
近齋先生鄭公旣歿之年丁丑, 嗣孫文興蒐葺其遺詩文, 將鋟梓而壽傳, 請余一言于編末。余以不文辭之, 固而終不獲。盖公生長古家, 能發憤志學, 早登晚求李先生之門, 得聞其旨訣而心悅之, 爲畢生須用之資。天賦坦夷, 眞衷藹然, 無一毫機械想。內而持身御家, 外而應事接人, 一以誠信, 無一僞飾。恩愛洽於宗族, 行義孚於鄉黨。如公者, 儘無負乎師門傳授之旨, 而古所稱躬行君子者非耶? 讀書務通大義, 不求强解, 窮年矻矻, 不容少懈。是以其發爲文辭也, 不勞鉤索, 意到即寫, 有典雅沖淡之味, 而無新奇雕鎪之態。自世之工於剽窃, 習於纂組者觀之, 宜若不厭於心。然苟有尚德君子者, 豈不貴於此哉? 若夫公之學問淵源之正, 孝友勤儉之行 與夫述先尊賢之誠 則狀誌之述 已備玆不復贅焉
光復後丁丑四月小滿節
南平 文栢 識
발문(跋文)
근재(近齋) 선생 정공(鄭公)께서 돌아가신 정축(丁丑)년에, 대를 잇는 손자 문흥(文興)이 그분이 남기신 시와 글을 수집하고 편찬하여 장차 목판에 새겨 길이 전하고자, 저에게 책 끝에 한마디 말을 써주기를 청했습니다. 저는 글재주가 없다며 굳이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대개 공(公)께서는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분발하여 학문에 뜻을 두셨고, 일찍이 만구(晚求) 이선생(李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그 가르침의 요체를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평생토록 사용해야 할 자산으로 삼으셨습니다. 타고난 성품이 평탄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참된 마음이 넘쳐흘러 조금도 기계적인 계산이 없었습니다. 안으로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집안을 다스렸으며, 밖으로는 일에 대처하고 사람을 대할 때 한결같이 성실과 믿음으로 임하여 조금의 거짓된 꾸밈도 없었습니다.
은혜와 사랑은 친척들에게 두터웠고, 의로운 행동은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공과 같은 분이야말로 스승에게 전수받은 가르침의 뜻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셨으니, 옛사람들이 말하던 ‘몸소 실천하는 군자(躬行君子)’가 아니겠습니까?
책을 읽을 때는 큰 뜻을 통하는 데 힘썼고 억지로 해석하려 하지 않았으며, 평생을 부지런히 노력하여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분의 글은 애써 찾고 궁리하지 않아도 뜻이 이르면 바로 써 내려가 품위가 있고(典雅) 담백한(沖淡) 맛이 있었으며, 새롭고 기이하게 꾸미고 다듬은 모습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남의 것을 베끼는 데 능하고 짜깁기에 익숙한 자들이 본다면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덕(德)을 숭상하는 군자가 있다면 어찌 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무릇 공의 학문 연원이 올바르다는 점, 효도와 우애가 깊고 부지런하며 검소했던 행실, 그리고 선조의 업적을 기리고 현자를 존경하는 정성에 대해서는 행장(狀)과 묘지(誌)에 이미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광복 후 정축년(1997년) 4월 소만절(小滿節)에 남평(南平) 문백(文栢)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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