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사지 7

날개띠좀잠자리-암컷

창원 봉림사지 입구 작은개천에서 좌측의 골프장 방향으로 오르는데 작은 잠자리가 날아가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서 앉는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날아가다 다시 그곳에 날아왔다. 날개의 색상과 위치를 보니 지금까지 사진으로 기록한 종이 아니라 돌아서서 사진으로 남겼다. 절지동물문(Arthropoda), 곤충강(Insecta), 잠자리목(Odonata), 잠자리과(Libellulidae), 좀잠자리속(Sympetrum), 날개띠좀잠자리의 학명은 Sympetrum pedemontanum elatum (Selys, 1872)이다.

봉림동의 대봉림유허비

『대봉림유허비大鳳林遺墟碑』가 건설된 곳은 의창구 사림동 85-1번지 느티어린이공원의 한 모퉁이에 있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29m를 기록하고 위도 35°14'46"N 경도 128°40'43"E에 위치한다. 이 유허비는 소봉림동유허비와 거의 동일한 형식을 취했고 자연석인 비신에 『유지불망비遺址不忘碑』라 새긴것만 다르다. 봉림리鳳林里에 대한 『창원 삼원지역의 지명과 옛 모습』에는 봉림리의 ‘봉림鳳林’은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봉림사鳳林寺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봉림사는 봉림산鳳林山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봉림사는 봉림산에 있다. “鳳林寺在鳳林山”이라는 기록은 전통 지리서에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봉림리는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지리서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조선 후기에는 남면..

도굴로 엉망인 창원 봉림동 고분군

창원시 봉림동 산122, 산125~127번지 일대에 분포된 가야시대, 조선시대 고분군은 창원분지의 북쪽 외곽부에 위치해 있다. 창원대학교박물관(1995)의 조사에 의하면 유적은 지도상으로 정병산(566.7m)의 서쪽 봉림산(298.3m)에서 남으로 쭉 뻗어 내려온 구릉 말단부에 해당되며 봉림소하천에까지 이어진다. 현재까지 봉림동고분군에 대해서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적은 없다. 다만 지표조사를 통해서 볼 때 인근지역의 고분유적과 같이 목곽묘, 석곽묘 등이 혼재되어 있으며 특히 주 구릉을 따라 정점부에는 다수의 봉토분 흔적이 있다. 1986년 지표조사에서는 훼손되어 방치되어 있는 소형석곽묘에서 항아리 2점, 굽다리 접시 1점이 채집되어 있으며, 인근 마을의 주민들도 이곳에서 출토된 그릇받침을 소유하고 있다고..

1000년 전 진경대사 득도한 동굴을 찾다.

진경대사眞鏡大師(853~923)는 임나(任那)의 왕족으로 853년(문성왕 15년) 12월 10일에 출생한 김유신(흥무대왕)의 후손이다. 862년(경문왕 2년) 혜목산 원감대사 현욱(玄昱)에게 출가하여 872년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오랜 세월 동안 명산대찰의 순례를 마치고, 김해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을 찾던 중 김해 진례에서 머물 때 대사의 도(道)를 사모하는 진례성제군사 김율희(進禮城諸軍事 金律熙)을 만나 후원을 받아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이름을 “봉림(鳳林)”으로 고치고 선방을 중건했다. 923년(경명왕 7년) 4월 24일 입적하자 왕이 조문하고 시호(진경대사 : 眞鏡大師)와 탑호(보월능공지탑 : 寶月凌空之塔)를 내렸다. 퇴촌동 원주민인 선배가 옛날부터 정병산에는 진경대사..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옥개석 발견

"봉림동 재잘단 우리마을 탐험기" 최종 회의를 하던 중 박태성선생님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옥개석 하나가 창원CC입구 개울에서 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있다며 가보자고 했습니다. 봉림사지에서 직선으로 700m 정도 떨어진 창원 봉림동의 하우스 농장 옆 개울에 거꾸로 놓여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