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귀동에 전하는 『김해김씨부자포효비(金海金氏父子褒孝碑)』에 관하여 예전에 글을 썼지만 당시에는 한문을 이해하지 못해 한글로 전하는 자료를 모아 이야기했다. 이제야 겨우 글을 알게 돼 이전의 비가 있는 명지노인당 앞의 비를 다시 찾게 되었다.
위치는 의창구 명서로123번길 9(명서1동 174-9), 명지경로당 앞에 옛 비가 있고, 좌표는 위도 35°14'45"N 경도 128°38'54"E이며 고도는 9m이다. 새로 세운 비는 의창구 봉곡동 4에 위치하며 좌표는 위도 35°14'55"N 경도 128°39'19"E이고 고도는 31m이다.
김해김씨부자포효비의 원문과 번역 내용은 아래와 같다,

金海金氏父子褒孝碑
金海金氏父子褒孝碑將竪 金君聖斗 與其三從孫魏坤靈坤請余 爲銘謹按 其遺事狀牒櫽括 以敍次之父公諱禹振字聖謙 節孝先生克一其顕祖也 曰雲善 曰聲憲 曰致永 其曾大父大父父也 金寧金光鳳 東萊鄭進寬 其外祖若妻父也 正廟乙卯 純廟乙未 其生卒年也 昌原府南知歸里獨山甲原其宅兆也 自幼孝誠出天下十餘歲父使之就學 不樂曰 家甚貧於父母凍餓何遂業耕樵 以供旨甘母歿廬墓 父固止之雖歸奉凡筵 然日拜于墓 墓下成路至 有神人持炬 前導家狗隨浚防護之異人 皆謂孝感所致 子公諱昌瑢字乃彦 純廟壬午 憲廟乙巳其生卒年也 通政大夫 其壽識也 慶山全景洪 其妻父也 知歸里三幕谷壬原 其營域也 八歲遭母艱執禮如成人十四父 以喉痛苦劇醫云 蛇卵最好然時値冬月四求淂遂仰天號哭忽 有烏隨卵 而去用之見 神效鄕里亦服其孝 高宗壬寅郡士金思百安琦錫金鎬源金柄璘諸氏 以父子之孝 陳狀營邑得嘉尙之題 而旌褒則未也至于 庚戌而國社屋 又至庚寅兵火大侄矣 諸浚承憲美蹟之永 至沈湮欲伐石 以表其里門亦出 於孝思之無窮也 銘曰
祖以是傳之後裔 父以是傳之厭子 勝他世人之以金 玉相傳天何獨厚 於金氏我庸作銘 以書后使行過者 式於是感於是
光州 盧根容 撰
宗人 金鍾河 書
戊戌三月日
禹振五世孫魏坤
昌瑢 玄孫靈坤

김해 김씨 부자 포효비 (金海金氏父子褒孝碑)
김해 김씨 부자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고자 한다. 김군(金君) 성두(聖斗)가 그의 삼종손(三從孫)인 위곤(魏坤), 영곤(靈坤)과 더불어 나에게 비명(銘)을 지어달라 청하기에, 삼가 그분들의 행적을 기록한 문서를(遺事狀牒)을 살펴 요약하고 차례대로 서술한다.
아버지인 공(公)의 휘(諱)는 우진(禹振)이요 자(字)는 성겸(聖謙)이다. 절효(節孝) 선생 극일(克一)이 그의 현조(顯祖)이다. 운선(雲善), 성헌(聲憲), 치영(致永)은 그의 증조부, 조부, 부친이다. 김녕 김씨 김광봉(金光鳳)과 동래 정씨 정진관(鄭進寬)은 그의 외조부와 장인이다. 정조(正廟) 을묘년(1795년)에 태어나 순조(純廟) 을미년(1835년)에 돌아가셨다. 창원부(昌原府) 남면(南面) 지귀리(知歸里) 독산(獨山) 갑원(甲原)에 그의 집과 묘가 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천하에 소문이 났다. 10여 세에 부친이 학문을 배우게 하였으나, 즐거워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집이 몹시 가난하여 부모님께서 굶주리고 추위에 떠시는데, 어찌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농사짓고 나무하며(耕樵)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 옆에 여막(廬墓)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굳이 말리셨다. 비록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봉양하며 일상적인 식사를 올렸으나, 날마다 묘에 가서 절을 하니 묘 아래에 길이 날 정도였다. 심지어 신인(神人)이 횃불을 들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집에서 기르던 개가 뒤를 따르며 보호하는 기이한 일까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효심에 감응하여 일어난 일이라 말하였다.
아들인 공(公)의 휘는 창용(昌瑢)이요 자(字)는 내언(乃彦)이다. 순조(純廟) 임오년(1822년)에 태어나 헌종(憲廟) 을사년(1845년)에 돌아가셨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그의 덕행을 기려 내린 벼슬(壽識)이다. 경산 전씨 전경홍(全景洪)이 그의 장인이다. 지귀리(知歸里) 삼막곡(三幕谷) 임원(壬原)에 그의 묘역(營域)이 있다.
여덟 살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으나 어른처럼 상례(喪禮)를 치렀다. 열네 살에 아버지가 목구멍의 통증(喉痛)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하셨다. 의원이 말하기를 "뱀의 알(蛇卵)이 가장 좋다." 하였으나, 때는 마침 겨울이었다. 사방으로 구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四求淂遂), 마침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까마귀 한 마리가 알을 떨어뜨리고 가거늘, 그것을 쓰니 신기한 효험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 또한 그의 효심에 감복하였다.
고종(高宗) 임인년(1862년)에 고을의 선비(郡士) 김사백(金思百), 안기석(安琦錫), 김호원(金鎬源), 김병린(金柄璘) 등 여러 선비들이 이들 부자의 효행을 군영(營)과 관아(邑)에 글로 올려 보고하였다. 이에 '가상히 여긴다(嘉尙)'는 공문(題)을 받았으나, 정려(旌褒)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경술년(1910년, 한일병합)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였고, 또 경인년(1950년, 6.25 전쟁)에 이르러서는 큰 병란(兵火)이 일어났다. 여러 후손이 이 아름다운 행적이 영원히 사라져버릴까(沈湮) 염려하여, 돌을 깎아 마을 입구에 비석을 세워(表其里門) 알리고자 하니, 이 또한 다함없는 효심(孝思)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새긴다.
조상께서 이 효(孝)를 후손에게 전하셨고, 아비께서 이 효(孝)를 그 아들에게 전하셨네. 세상 사람들이 금과 옥을 서로 전함보다 나으니, 하늘은 어찌 유독 김씨에게만 이토록 후하셨는가? 내 이제 이 명(銘)을 지어 비석에 새기어, 지나가는 이들로 하여금 이를 본받고(式於是) 이에 감동하게(感於是) 하노라.
광주(光州) 노근용(盧根容) 지음.
종인(宗人) 김종하(金鍾河) 씀.
무술년(戊戌年, 1958년) 3월 일
우진(禹振)의 5세손 위곤(魏坤)
창용(昌瑢)의 현손 영곤(靈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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