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합천 옥전서원(陜川 玉田書院)

천부인권 2025. 11. 10. 14:01

2025.11.7.합천 옥전서원(陜川 玉田書院)

 

합천군 황강옥전로 1510-60에 위치한 옥전서원(玉田書院)은 초계 정씨의 시조인 정배걸(鄭倍傑;?-1051)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철종 12(1861)1981년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른다. 앞면 4·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로 구성하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두었다. 19931227일 지정된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직전에 동래부사가 자신이 찬한 정간공(정문의 시호) 신도비문을 목형으로 세우고 비각으로 둔갑시켜 훼철을 모면하였다고 전한다.

서원은 정배걸의 묘소 앞에 있으며 정배걸과 아들 정문(鄭文;?-1106)을 향사하는 용도로 사용하며, 매년 음력 31일과 101일에 춘추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2025.11.7.합천 옥전서원(陜川 玉田書院)

 

玉田書院記

夫賢人之有令德 爲人所誦慕者必有報祀之禮焉 古所謂鄕先生歿 而可祭於社者此也 然而其或未遑 於前而追舉於後旣撤於舊 而後繼於今者蓋亦有幸不幸之數於其間而愈久愈張者亦可見 其德之所積者厚 而風之所及者遠也 草溪之東黃江之濱 玉田山有高麗光儒侯鄭先生 衣履之藏 而其子貞簡公之墓 又在東數里之月 蘿洞盖此父子兩賢者俱發跡於是 而爲草溪氏肇基之祖也 其德業文學世趾厥美者稱 於當時而昭載 於史乘者班班可考盖光儒侯七歲能通詩書 而早登科第卒陞宰輔忠謇不群才猷出類 以儒術輔主嘗與崔文憲公沖設九齋 以敎後進大與文風 於干戈之餘民 以永賴貞簡公才猷詞輸克繼父跡民 爲君天之賦 感動主聽歷践清要并著懿蹟奉 使如宋專對盡載 扈駕西京請立箕子廟 以擧闕典以興治化 此爲兩賢之著蹟 而厥後子姓繁衍碩奕忠孝名行 磊落相望亦可見德厚流光之驗也 宜有後人之報祀 而數百年來祭祀之禮闕 而未舉丘壟之間 只得薦子孫之芬苾 豈非事之欠 而數之不幸者耶至 昔正祖己未鄕章甫始齊議建祠 於玉田之墓下奉 以俎豆之禮 純祖戊辰 又以貞簡公躋享 是爲玉山祠者也 事雖在晩 而公議之不泯於久亦可驗也 至高宗辛未 見撤於邦禁 則又一不幸之數 而至今經百有年士論復發 以邦禁之解已久盍復 其舊乃建祠於舊址而名曰 光德以玉田之舊齋更名 以書院盖欲益恢以張之也 後孫玉善都永 以僉章甫之意來屬余記 余忝在外裔之列 不敢自外乃略述兩賢之蹟 而且敍前後祠亭興廢之由 以見遺風之遠 必因積德之厚 而是祠之不廢於久遠亦推此可卜也 雖然崇奉之貌 在外慕效之實在內必也 先務其在內之實 然後可保其在外之貌也 此又後人之所當思 以益溯求其風韻者也 故復以是諗之

歲辛酉 菊秋 外裔 花山 權龍鉉 謹記

 

2025.11.7.합천 옥전서원(陜川 玉田書院)

 

옥전서원기(玉田書院記)

현인이 아름다운 덕이 있어 남의 칭송과 사모를 받는 사람은 반드시 보답하는 제사의 예를 받음이 있으니, 옛적에 이른바 鄕先生(향선생)이 돌아가심에 고을 사당에 제사를 드리는 예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혹 전에는 겨를이 없다가 뒤에 거행하기도 하고 옛날에 이미 훼철되었다가 지금에 이어지는 것은 대개 또한 그 가운데 행 불행의 운수가 있으나 더욱 오랠수록 더욱 펼쳐지는 것에서 또한 그 덕을 쌓은 것이 후하고 풍성이 미친 것이 먼 것을 볼 수 있다.

초계의 동쪽 황강가의 옥전산에 고려 光儒侯(광유후) 鄭先生(정선생)의 묘가 있고 그 아들 貞簡公(정간공)의 묘가 또 그 동쪽 몇리의 월라동에 있으니, 대개 이 부자 양현이 모두 여기에서 자취를 발하고 초계 정 씨 터전을 연 조상이다. 그 덕업과 문학이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어서 당시에 칭송을 받고 역사에 밝게 실린 것을 뚜렷하게 살필 수 있다.

대개 光儒侯(광유후)7세에 능히 시서를 통하여 일찍 과거에 급제하고 마침내 재상에 올라 충직을 행하여 남과 무리짓지 않고 재능과 정사가 무리에서 뛰어나 유학으로 임금을 보필했다. 일찍이 文憲公 崔沖(문헌공 최충)九齋(구재)를 개설하여 후진을 가르쳐서 전생을 겪은 나머지에 문풍을 크게 일으키니 백성이 이로써 길이 힘입었다. 貞簡公(정간공)은 재능과 문학이 능히 부친의 자취를 이었는데 백성은 임금의 하늘이다라는 ()를 지어 임금을 감동시키고 청환 요직을 두루 지내 아름다운 자취가 드러났다. 송나라에 사신 가서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고 西京(서경)으로 임금의 행차를 호종하여 箕子(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갖추지 못했던 典禮(전례)를 거행하여 治化(치화)를 흥기시킬 것을 청했다.

이상은 양현의 드러난 사적인데, 후에 자손이 번성하고 혁혁하게 忠孝名行(충효명행)이 성하게 줄을 이었으니 또한 음덕이 두터워 자손이 빛난 결과임을 볼 수 있다. 후인이 보답하는 제사가 있음이 마땅한데 수백년 이래 고을 사당에 제사를 받드는 예가 빠진채 거행되지 못하고 무덤 사이에 다만 자손들의 제사만 드렸으니 어찌 欠事(흠사)이고 불행한 운수가 아니겠는가.

옛적 정조 기미년에 고을의 선비들이 비로소 옥전 묘소 아래 사당을 건립하기를 함께 의논하여 향사를 받들었는데, 순조 무진년에 또 貞簡公(정간공)을 제향하니 이것이 玉山祠(옥산사)인 것이다. 일이 비록 늦었으나 공의가 오래도록 민멸하지 않음을 또한 볼 수 있다.

고종 신미년에 이르러 나라의 금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니, 또 한번 불행한 운수가 닥쳤다. 지금 백년의 세월이 지나 선비들의 의논이 다시 발하여, “나라의 금령이 풀린 지 이미 오래인데 어찌 복원하지 않을 것인가하였다. 이에 옛터에 사당을 건립하여 光德祠(광덕사)라 명명하고 玉田(옥전)의 옛 재사를 다시 서원으로 이름을 바꾸니, 대개 더욱 회복하여 넓게 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후손 玉善·都永(옥선·도영)이 여러 선비들의 뜻으로 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했다. 나는 외람되게 외손의 처지에 있기에 감히 스스로 물러날 수 없어 대략 양현의 사적을 기술하고 또 전 후로 사당의 제향이 흥하고 폐한 유래를 서술하여 遺風(유풍)이 멀리 전함은 반드시 덕을 쌓음이 후함으로 말미암고 이 사당이 구원토록 폐하지 않을 것을 또한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음을 보인다. 비록 그러나 받드는 모습은 밖에 있고 사모하는 실상은 안에 있으니, 반드시 먼저 안에 있는 실상에 힘 쓴 뒤 밖에 있는 모습을 보존할 수 있다. 이것은 또 후인이 마땅히 생각하여 더욱 그 유풍여운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이로써 고한다.

신유년 국추 외손 花山 權龍鉉(화산 권용현)은 삼가 기문을 짓다.

 

2025.11.7.합천 옥전서원(陜川 玉田書院)

 

출처와 참조
『합천누정록』(합천군·합천문화원, 2002)
국가유산청(http://www.khs.go.kr)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옥전서원(玉田書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