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양 거연정(咸陽 居然亭)은 경남유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정자(亭子)로 함양군 육십령로 2590(서하면 봉전리 881-5)에 위치한다. 좌표는 35°37'35"N 127°44'15"E이고, 고도는 299m이다.
입구 안내판에는 『고려 말 전오륜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1872년 화림재 7대손인 진사 전재학(全在學)·전계진 등이 세웠으며, 1901년에 고쳤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건물로 내부에는 벽체를 판재로 구성한 방을 1칸 두고 있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를 올림 겹치마 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파(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식이다. 거연정은 하천의 암반 위에 세워져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기록한다.
거연정(居然亭)은 함양군 안의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전주방향으로 9㎞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는 봉전마을 앞 하천내에 있는데, 이곳은 옛 안의 3동의 하나인 화림동 계곡으로서 농월정, 거연정, 용유담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거연정은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천의 암반위에 단동으로 건립되어 있다.



居然亭記
花林齋者 桃源全公萬軸之所 而目而爲記者也 間嘗爲其先祖採薇先生 西山祠講堂 曁祠輟堂亦不免 後孫在澤在學在甲等作亭數間 於舊址西一喚地水石奇絕處中為外為堂室揭舊額 堂則取原記中 居然泉石之語名 以居然將落也 書來四百里請記 蓋嶺之勝三洞 爲最三洞之勝花林 爲取花林之勝 此勝此亭 爲取亦勝者最難 人傳亦里也 彼平泉別野 不過採天下珎木怪石 以備園池之翫者 亦有鬻平泉者非吾子孫 以一樹一石 與人非佳子弟之語而猶 爲有力者所取去 惟斯洞固天作也 是何等靈區 而爲全氏物傳之十數世無癈至 於此亭而尤擅 其勝寔垂裕 於後昆諒無隕 於前搆者也 較諸李文饒 其難易得失何如哉 是不可以無記記於何辭惜乎吾老矣 無以作山中客
崇禎五 甲戊 孟夏日
西河 任憲晦 書
거연정기
화림재(花林齋)는 도원(桃源) 전공(全公)의 만축(萬軸)이 있는 곳으로서 눈으로 보고 기록하게 되었음이라. 간상(間嘗)히 그 선조 채미헌(採薇軒)선생의 서산사(西山祠) 강당에서의 일을 철당(輟堂)에서 또한 내칠 수 없음이니라.
후손인 재택(在澤)·재학(在學)·재갑(在甲) 등은 옛터에 몇 칸의 정자를 짓기로 합의하고 가까운 곳, 물과 바위가 기이하고 빼어난 곳에 몇 칸의 정자를 지어 안이나 밖이나 당실(堂室)에 구액(舊額)을 걸고 당의 측면에 원 기록 중에서 취한 거연천석(居然泉石)의 말로 이름 정하기를 장차 거연(居然)이라 할 것이니라. 기문을 써 달라 청하므로 글을 쓰려고 내려오기를 사백리(四百里)라 대개 영남의 빼어난 경치는 삼동(三洞)이 최고가 되고 삼동의 경승은 화림(花林)이 최고가 되나니 화림동의 경승은 이 아름다운 곳에 세운 이 정자를 최고라 할 것인바 또한 빼어난 곳이 되기에는 가장 어려운 일이니라. 사람들이 전하는 것은 또한 마을이라. 저 평천별야(平泉別野)를 지나지 못함에 천하의 참된 목괴석(木怪石)을 채취해서 정원의 못에 갖추는 사람은 또한 평천에서 죽을 먹는 사람이 있으리니, 우리 자손으로서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를 사람들과 같이 아름답다 아니하고 자제의 말로 오히려 힘이 있는 사람이 살게 된다면 오직 이 화림동은 참으로 하늘의 작품이다.
이곳이 어떻든 신령한 곳으로 전씨(全氏)의 소유물로서 수십 세대를 전해오면서 폐함이 없으니, 이정자에 이르고 더욱 그 빼어난 경치를 발휘하여 후손들에게 넉넉하게 남겨주고 생각해 주면 앞서 만든 사람에게 곤란함이 없을 것이니라. 교제이문(較諸李文) 컨대 넉넉함으로 그 어렵거나 쉬운 일, 얻고 잃음이 같지 않을 것이다. 이는 가히 나로서 쓸 것이 없으니 어떤 말로 기록하겠는가.
아쉽구나! 내 늙은 이로서 산골의 객이 되지 말아야지.
숭정 5년 갑술(甲戊;1874) 한 여름에
임헌회(任憲晦) 씀

居然亭記
上之乙元年壬申 安陰之新坪居然亭成矣 余嘗聞之人 於先美不明不仁俱 是不可則憂懼之至 斯亭之役 烏可得已哉 嗚呼 惟我先祖花林齋府君通才學固可華國經世 而不幸值皇朝屋社之日 不勝憤慨 結情天山 自迎勝故居西來 五十里武夷上花林之洞 誅茅卜築 因遂晦跡鏟影之志 卽所謂新坪村是也 平日琴書嘯詠之地 舊嘗有齋 而中世盖重修焉 仍爲西山祠講堂矣 尙亦忍言哉 祠撤堂亦不免也 然則惟其扶義嘉遯之蹟 遯然無憑 故余於是乎 暢然興念與 族姪啓鎭博謀僉宗就其舊址 西水石之區 肯構斯亭扁之 以居然者竊取朱子詩 居然泉石之義 而又仍舊花林齋之額 於其室庶有補 於似述之道焉 若其泉石之窈窕雲林之瀟灑 登斯亭者 目擊焉 且夫登斯亭者 無次泉石雲林 只爲勝區遊覽之娛 不忘大界陸沉之禍 因於一部春秋之書講明究索 則庶可爲識得尊攘大義 而不失其秉彛之天矣 茲余由先美而肯構豈徒 爲子孫宗族之私乎哉 府君諱時叙字景三姓全氏 施善人官至同知中樞府事花林齋其自號也 少從相望鄭文簡公學雅志尊固實有所愛云
崇禎後五庚辰仲春上澣
七代孫在學謹記
거연정기(居然亭記)
상지원년(上之乙元年) 임신(壬申)에 안음(安陰) 신평(新坪) 마을에 거연정(居然亭)을 이루었도다. 내가 일찍 들으니 사람이 그 조선의 미덕을 잘 알지 못하고 경솔하여 함께 옳지 않다면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이 정자의 역사에 이를 것이니 어찌가히 스스로 얻으리요. 오호라! 오직 우리 선조 화림재부군(花林齋府君)은 능통한 재주와 깊은 학문이 진실로 중국을 다스릴만한데 불행이 황조옥사(皇朝屋社)의 날을 맞아 분개하여 맺힌 정을 이기지 못하여 천산(天山)이 스스로 영승(迎勝)하니, 그러므로 서쪽 50리 길을 가서 무이상(武夷上)의 화림동(花林洞)에 머무를 새 띠를 베어서 집을 짓고 그로 인하여 자취를 감추는 것이 종영(鏟影)의 뜻이니 신평(新坪)마을이 곧 그곳이니라. 평소에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고 하던 곳인데 옛날 일찍부터 재실이 있어서 중세(中世)에 다시 중수(重修)하게 하니 그곳이 서산사(西山祠)의 강당(講堂)이었다. 오히려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서산사를 철거할 때 이 강당 또한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즉 오직 그 옳음을 돕고 의를 지키고 뜻을 굽히지 않기 위해 숨어 산 흔적이 어렴풋이 의지하여 왔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창연(暢然)히 흥념(興念)하고 집안 조카인 계진(啓鎭)과 함께 널리 의논하고 꾀하여 온 문중이 모두 동의하니 그 옛터 서쪽 물 위의 반석에 나아가 정자를 짓고 편액을 써서 거연(居然)이라 한 것은 그윽히 취하기를 주자의 시(詩)에 거연천석(居然泉石)의 의(義)로써 또한 인하여 그 집에 옛날 화림재(花林齋)의 액자(額子)를 불이니 거의 사술(似述)의 도(道)에 도움이 있나니 그 천석의 아름다움과 운림의 화려함은 이 정자에 이르는 사람마다 보고 감상할 것이요. 또한 대개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은 기암괴석(奇巖怪石)이나 숲이 없이 다만 아름다운 곳의 유람이 잘못이라 할 것 같으면 넓은 대계(大界)의 화를 잊지 못하고 일부 춘추의 글에 강론(講論)하여 밝히고 연구를 모색한다면 거의 능히 왕조를 받들고 외적을 물리치는 큰 의리를 알고 얻을 것이며 그 떳떳하게 잡는 천륜(天倫)에 부실할 것이라. 이에 나는 선조의 미덕으로 말미암아 긍구함은 어찌 한갓 자손과 종족의 사사로운 일이겠는가. 부군(府君)의 휘(諱)는 시서(時叙)요. 자(字)는 경삼(景三)이며 성(姓)은 전씨(全氏)인바 화림재(花林齋)는 그 스스로의 호(號)이니라. 젊어서 서로 바라기를 정문간공(鄭文簡公)으로 하여 배움이 아당(雅當)하고 높은 뜻을 헤아려 진실로 사랑하는 바가 있었나니라.
숭정후(崇禎後) 오경진(五庚辰) 중춘상한(仲春上澣)에
7대손 재학(在學)은 삼가 기록하다.

居然而亭重修記
己亥春余遊嶺表過安陰之三洞 登所謂居然亭者 水㶁㶁環外鳴散 爲灘洑洄爲滙池 纈若織文響若操 琴巖石嵌瓏嶔然相累 而下者如牛馬之飲 于溪衡然角烈 而上者如態之登于 山扶其穴則鼻口相呀搜其根 則歸服交峙突然 而凸窪然而凹窈郎渟滀若造物者 始判淸濁効 奇於兹地非人力也 於是守胸神灑落茫于 與灝氣俱而不見其涯主人曰 全氏率子弟及縣之多 士要余講論盖勝會也 至今營營之聲 與耳謀累累之收 與目謀悅如置身於 其間豈獨專 爲山水美而己于哉 始全氏之先 有號花林齋諱時叙天資粹美宝心高朗行己端劣表裏一致官至 中樞府事自丙子 以後遂隱林樊卜築 於斯琴書自娛每意會輒朗誦武夷欋歌 及黃石城誌未嘗出小外一步地 鳴呼 若公者其可謂遯世無悶者 歟然則是亭也 豈獨草木土石水泉之適 歟山原林麓之觀 歟全氏之子孫幸勿 以亭之重新足曰 肯構而今乾坤澒洞大界陸沉之禍浮 於城下之恥 於斯乎請春秋之書守 其先祖所守之義 而曰肯構 豈非可呼公後孫道植講 以侈織之文義不敢辭略書 所感俾後之過 者如斯亭之所 以爲斯亭不專在於山水之清奇 而在守花林公之行義焉
峕重光赤奮若大壯之下澣
恩津 宋秉璿 記
거연정중수기(居然亭重修記)
기해(己亥)년 봄에 나는 영남을 유람할 때에 안음(安陰)의 삼동(三洞)을 지나면서 소위 거연정(居然亭)에 올랐다. 물은 획획(㶁㶁)하여 정자 밖을 둘러싸고 흐르며 소리를 내는데, 흩어지면 여울(灘)이 되고 감돌아 흐르면 소(洑)와 웅덩이(滙池)가 된다. 그 무늬는 마치 비단 무늬(織文)를 짠 듯하고, 그 소리는 거문고를 타는 듯하다. 바위와 돌은 움푹 패고 우뚝 솟아(嵌瓏嶔然) 서로 쌓여 있는데, 아래로 향한 바위는 마치 소와 말이 시냇물에 엎드려 물을 마시는 것 같고, 쟁쟁하게 솟아난 뿔과 같다.
위로 향한 바위는 마치 기이한 짐승이 산에 오르는 것 같아서 그 구멍을 살펴보면 코와 입이 서로 벌어져 있는 듯하다. 그 근원을 더듬어보면, 돌아와 엎드리고(歸服) 서로 깎아지른 듯이 맞서면서(交峙) 우뚝 솟아 있다.
(바위는) 튀어나오면 깊게 패인 듯하고, 오목하면 널찍하게 물이 고여 있는 듯하니, 마치 조물주가 비로소 맑고 흐린 것을 판별하여 이 땅에 기이함이 드러나게 한 것 같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이에 가슴속의 기분이 상쾌하고 시원함에 아득한 호기(灝氣)와 더불어 함께 그 끝을 볼 수 없으니, 주인이 이르기를 전씨(全氏)는 자제를 거느리고 고을의 많은 선비들과 요컨대 나에게 강론하니 대개 좋은 모임이니라. 지금까지도 (그때 강론하며 들었던)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맴돌고, (정자 주변 바위들의) 겹겹이 쌓인 모습이 눈을 즐겁게 하니, 마치 그때 그 사이에 몸을 두었던 것만 같다. 어찌 다만 산수의 아름다움만을 홀로 전유(專有)한 것이겠는가!
애초에 전씨(全氏)의 선조 중에 화림재(花林齋)라는 호를 가진 이가 있었는데, 휘(諱)는 시서(時叙)이다. 타고난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마음가짐이 고상하고 밝았고, 행실은 단정하고 굳세어 겉과 속이 한결같았다. 벼슬은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가 병자년(丙子年) 이후 마침내 숲과 울타리 속에 은거하였으며, 여기에 집을 짓고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 즐거워했다.
매번 뜻이 통할 때마다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와 황석성지(黃石城誌)를 낭송하였으며, 작은 문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아! 이와 같은 공(公)이야말로 세상을 피해 숨었으나 근심이 없었던(遯世無悶) 분이라고 이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한즉 이 정자는 어찌 다만 초목, 흙, 돌, 물의 맑음과 알맞음(適)이거나 산등성이와 숲 속의 경관(觀)일 뿐이겠는가!
전씨의 자손들은 다행히도 정자를 새로 지은 것만 가지고 "선조의 뜻을 이었다(肯構)"고 만족하지 말기를 바란다. 지금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乾坤澒洞)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大界陸沉) 듯한 큰 화(禍)가 (나라에) 떠돌고 성 밑의 치욕이 있으니, 이 정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청컨대 춘추(春秋)의 의리(義)를 지켜 그 선조가 지켰던 바의 의(義)를 지키고서 "선조의 뜻을 이었다(肯構)"고 말하라!
어찌 공(花林齋)의 후손인 도식(道植)에게 강론을 요청하여 문장의 의리를 함부로 꾸미고 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내가) 느낀 바를 간략히 기록하여, 뒷날 이 정자를 지나는 이들로 하여금 이 정자가 다만 산수의 맑고 기이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림공(花林公)의 행실과 의로움을 지키는 데에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한다.
신축(辛丑;1901)년 8월 하한에
은진(恩津) 송병선(宋秉璿;1836∼1905) 기록하다.


거연정 근차(居然亭 謹次)
臨溪小閣倚岩局 물가의 정자 바위틈에 의탁하여
勝景佳奇不秘形 빼어난 경치와 아름답고 기이한 모습을 숨기지 않네.
石氣清凉通骨髓 바위의 기운은 맑고 시원하여 뼛속까지 스미고,
潭先瑩徹照心靈 깊은 못의 맑음은 밝게 비추어 마음까지 깨닫게 하네.
花林風物傾三洞 꽃이 만발한 숲의 풍경은 삼동(三洞)의 선경(仙境)보다 낫고,
薇老雲仍管一汀 (고사리 캐는) 백이숙제처럼 은둔한 노인이 이 물가를 관장하네.
此趣影鍾猶不換 이 즐거움은 (황제의) 구정(九鼎)을 주어도 바꾸지 못하리니,
肯教文士扛山銘 어찌 문사들에게 시켜 바위에 새길 글을 지으라 하겠는가.
戊寅(1878) 菊秋(음력 9월) 安東 金啓鎭(김계진;1823~1881)

거연정 근차(居然亭 謹次)
三洞中間關小扁 삼동(三洞) 중간에 작은 편액(扁額)이 걸려 있고,
堂前物色畫難形 마루 앞의 풍경은 그림으로도 형언하기 어렵네.
武夷精舍懷千載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정신을 천년토록 품게 하고,
君子高亭護百靈 군자의 높은 정자가 온갖 신령을 보호하는 듯하네.
龍托微雲藏古窟 용은 희미한 구름에 의탁하여 옛 굴에 숨어 있고,
鷺熱寒雨逗虛汀 해오라기는 차가운 비를 맞아 한가로운 물가에 머무네.
居然美號華扁場 진실로 아름다운 이름으로 편액이 빛나는 자리이니,
到此何人各幾名 이곳에 이른 사람마다 그 명성이 몇이나 될까?
果育齋 愼炳晋(과육재 신병진)

거연정운(居然亭韻)
居然亭立作巖局 거연정은 바위 사이에 당당히 서 있어
地秘天藏物以形 마치 땅이 숨기고 하늘이 간직한 절경을 드러내는 듯
自古仁賢留杖履 예로부터 어진 이와 현인이 지팡이와 신발 자취를 남겼으니,
至今山水流精靈 지금도 산과 물에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흐른다.
花開林茂深深洞 꽃 피고 숲이 우거져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魚羅龍飛淡淡汀 고기가 그물처럼 모이고 용이 나는 듯한 아득한 물가이다.
先祖遺謨因勿替 선조들이 남긴 뜻을 이어 감히 바꾸지 않으며,
詩能追遠敢言銘 그 깊은 마음 시로 이어받아 이 글을 새기고자 한다.
八世孫 瑀大 謹稿 8세손 우대 삼가 지음

거연정운(居然亭韻)
誅茅一日築新局 하루 만에 풀 베어내고 새 정자를 지으니
天護琴書地擅形 하늘은 금석과 서책을 보살피고, 땅은 그 지형을 스스로 갖추었다.
黃石至今留義磧 황석(黃石)은 지금까지도 의로움의 자취를 남기고,
武夷從古有仙灵 무이산처럼 예로부터 신령한 기운이 서려 있다.
洞中花史春秋筆 동중(洞中)속 풍경은 꽃의 역사처럼 사계절을 그려내고,
山下源泉畵夜汀 산 아래의 샘물은 밤의 물가를 그림처럼 그린다.
儘是當年言外意 이 모든 것이 당시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깊은 뜻이었으니,
楣端黙會小亭銘 들보 끝에서 조용히 그 뜻을 음미하며 이 정자명을 짓는다.
六代孫 潤壽 6대손 윤수

거연정(居然亭)
南城風雨日 남쪽 성(城) 비오는 날에
吾祖入山行 나의 조상께서 산행에 드셨으니.
丈履當年所 지팡이 신발은 그 시절에 있던 바요
烟霞此地亭 안개와 노을 어우러진 이곳 정자(亭子)였도다.
尊周秉大義 주(周)나라를 높이는 큰 대의(大義)잡으니
遯世呈眞情 세상에 숨어 참된 정(情)을 드리웠네
寤寐念修者 자나 깨나 수행을 생각하는 자
洗心白鷺汀 마음을 백로(白鷺) 떼 물가에 씻었나니라.
十代孫(십대손) 道植(도식)

神造名區鬼鑿局 신(神)이 마련한 명구(名區)에 귀신(鬼神)이 문지방을 파서
白茅掩棟理成形 흰 띠로 기둥을 두르니 형성(形成)함을 다루었네.
遯身浩氣猶然興 몸을 숨기는 호연(浩然)의 기운이 유연히 일어나고
觀水寥光望立汀 물을 보는 고요한 빛을 서서 물가를 바라보네.
萬古溪山同性善 만고(萬古)의 시내와 산은 성품이 착하고
四時風景盡心靈 사계절 풍경(風景)은 마음의 넋 다했도다.
長川來遊好斯所 긴 냇가 와서 놀기를 이같이 하니
祖述其先可有銘 할아비가 그 선조를 이야기하였기 가히 새김 있도다.
十代孫(십대손) 탁(柝)
轉入花林邃 떠돌다 화림동의 깊은 곳에 드니
玲瓏穿萬行 곱고 투명한 그림을 뚫고 가듯 하네.
一天慳勝景 한 하늘엔 좋은 경치를 버티었고
千載屬名亭 천 년의 이름난 정자를 거느리게 되었네.
認是山中樂 알지어다 이 산중의 즐거움이여
超然物外情 초연히 물외(物外)의 정이었나니
聊將武夷句 애오라지 무이(武夷)의 구절로서
朗泳立閒汀 한가한 물가에 서서 밝게 읊도다.
恩津 宋秉璿(송병선;1836~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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