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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무안 어변당(魚變堂)-덕연서원(德淵書院)-편액

천부인권 2025. 11. 29. 23:52

2025.11.28.밀양 무안 어변당

 

덕연서원(德淵書院)은 밀양시 무안면 연상리 421-2(연상129)에 위치하며, 밀양시 무안면 연상리 394에 있는 어변당(魚變堂)의 부속건물로 어변당은 박곤(朴坤, 1370~1454)의 후손들이 1994년 세웠고, 덕연서원(德淵書院)은 어변당 기념사업회(魚變堂 記念事業會)1998년 정부(政府)에 건의(建議)하여 국비보조(國費補助)로 건립한 서원이다. 이곳에는 어변당(魚變堂) 박곤(朴坤, 1370~1454)과 종향(從享)으로 임진공신(壬辰功臣) 모우당 박몽룡(慕優堂 朴夢龍), 죽림제 박세용(竹林齊 朴世墉;1685~1773)을 매년 추향(秋享)으로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박곤의 충효쌍전(忠孝雙全)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은 덕연서원(德淵書院)을 창건하면서 당호를 쌍전당(雙全堂)’이라고 붙였고, 덕연서원의 내부 벽면에는 1994년 지은 이원영(李源榮)쌍전당 상량문과 권오근(權五根)쌍전당기를 걸어 두었다.

 

2025.11.28.밀양 무안 어변당
2025.11.28.밀양 무안 어변당
2025.11.28.밀양 무안 어변당
2025.11.28.밀양 무안 어변당
2025.11.28.밀양 무안 덕연서원 솟을삼문-정리문(正履門)
2025.11.28.밀양 무안 덕연서원
2009.4.10.무안 덕연서원 현판
2025.11.29.무안 덕연서원_쌍전당 편액
2025.11.29.무안 덕연서원_쌍전당상량문(雙全堂上樑文)

 

雙全堂 上樑文

國家重忠孝之門起新楹於遺躅 土林慕賢哲之德翁衆誠於南州 無廢前光 有蔚斯域 鏡水東國殿庭武藝 恭惟判尹魚變堂朴先生 新羅古閥 昭代賢臣

雙池養魚奉両親俱甘旨 赤鱗報德有神助建大功 文武兼全闢六鎭於東國 殿庭試築得三傑於天朝 告二相而歸鄕揭魚變之扁額 祭龍靈而征亂討女眞之偉勳 慕憂朴公貞忠振義於火旺 竹林朴公學行高士之坊名 有是祖有是孫允宜同堂合餟 迺於文迺於武亦是十世嘉謨 惟兹一畒明宮 實是三賢院宇 國政賢節鄕儒請願而封章 世敎惇倫當局出資而始役 池塘明月無減當日天光 畫棟飛甍有餘勝地雲影 遂年計劃遽見樑宇之竣工 累代經營己行春秋之禮享 多士竭蹶執籩豆而周旋 俊乂陟降抱墳典而肆習 四山之雲林如畫載淸風於軒堂 一水之浮光若金住佳景於朝暮

仰祀宇而肅肅自有敬虔之誠 瞻宮墻而恢恢足容文學之士 優遊涵泳勿怠養性之方 講磨禮詩益勉孝悌之道 古家之事業若此 季世之儒風自如 敢陳俚歌 庸助偉唱

兒郎偉拋樑東 終南山上日瞳曨 天光長照詩書屋 魚變當時道不窮

兒郎偉拋樑西 火旺山深草路迷 緬憶壬訌平亂史 千秋義蹟不沉泥

兒郎偉拋樑南 洛流湜湜碧如藍 遊人不識東南勝 翠壁澄潭孰能諳

兒郎偉拋樑北 華嶽崔嵬高斗極 淑氣南來設各村 千門萬戶均相飭

兒郎偉拋樑上 玉宇昭昭星月亮 大道人間孝與忠 何其異說長磨盪

兒郎偉拋樑下 池塘清淨終無瀉 先賢蹟感人心 景仰風猷多客馬

伏願上樑之後 天神默佑 地祇效靈 一鄕之俊髦斯興惟以勉孝於親忠於國 百世之牲幣是俱庶可見山益高水益長 寔吾黨靡悔盡誠 俾後人嗣修永久 頌何多哉

歲己巳 流頭月 上澣 後學 眞城 李源榮 謹撰

 

쌍전당상량문

나라에서 충효의 가문을 중히 여겨 그 유적(遺躅) 위에 새 기둥을 세우고, 고을 사람들이 현철(賢哲)의 덕을 사모하여 남쪽 고을에 정성[]을 모았네. 이전의 빛을 잃지 않고 이 지역을 무성하게 하리니. 거울같이 맑은 물가에 동국(東國)의 전정무예(殿庭武藝)를 기리네.

삼가 생각하옵건대, 판윤(判尹)이셨던 어변당(魚變堂) () 선생께서는 신라의 오랜 문벌(古閥)이요, 밝은 시대의 현신(賢臣)이셨네. 쌍지(雙池)에 고기를 길러 양친께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고, 붉은 비늘의 보답이 신의 도움으로 큰 공(大功)을 세우게 하였네. 문무(文武)를 겸전하여 동국에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전정(殿庭)에서 시험을 치러 천조(天朝, 명나라)에서 삼걸(三傑)을 얻었네.

두 재상에게 고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변(魚變)의 편액을 걸었으며, 용의 신령께 제사하고 난()을 평정하여 여진(女眞)을 토벌한 위대한 공훈을 세우셨네.

화왕산에서 곧은 충정으로 의로움을 떨치신 모우 박공(慕憂 朴公)의 학문과 행실이 고상하여 그 정려(旌閭) 이름이 된 죽림 박공(竹林 朴公)을 사모하네.

이러한 할아버지가 계시고 이러한 손자들이 있으니, 마땅히 한 집에 함께 제사를 모심이 옳고, 이분이 문()이 되셨든 무()가 되셨든 또한 십세(十世)를 이어온 아름다운 기틀이네. 오직 이 한 이랑의 밝은 사당은 실로 세 현인(三賢)을 모시는 원우(院宇)로다.

나라의 정사가 현명하게 다스려지던 시절, 향촌의 유생들이 청원하여 봉장(封章)을 올렸고, 세교(世敎)와 인륜을 돈독히 하고자 당국에서 자금을 내어 비로소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네. 못에 밝은 달이 뜨니 당일의 천광(天光)이 줄지 않고, 단청한 기둥과 날아갈 듯한 추녀는 승지(勝地)의 구름 그림자보다 더 아름답네.

여러 해 동안 계획했던 대들보와 집의 준공을 문득 보게 되고, 여러 대에 걸쳐 경영하던 봄·가을의 제사를 이미 행하게 되었네. 많은 선비들이 힘써 제기(籩豆)를 잡고 주선하고, 준재(俊才)들이 오르내리며 경전(墳典)을 마음껏 익히네.

사방의 산에 구름과 숲은 그림과 같아 맑은 바람을 헌당(軒堂)에 실어오고, 한 물줄기의 물결은 금빛과 같아 아름다운 경치가 아침저녁으로 머무네. 사당을 우러러보니 엄숙하여 스스로 경건한 정성이 생기고, 궁장(宮墻)을 굽어보니 넓고 커서 문학하는 선비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족하네.

유유자적하며 심성을 기르는 방법을 게을리하지 말고, ()와 시()를 강론하고 연마하여 효제(孝悌)의 도를 더욱 힘쓸지어다. 옛 가문의 사업이 이와 같고, 말세에도 유학의 기풍이 스스로 보전되니, 감히 속된 노래를 지어 위대한 창가를 돕노라.

어랑위!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종남산 위로 해가 붉게 떠오르네. 하늘의 빛이 길이 시서(詩書)의 집에 비추니, 어변당 박 선생의 도()는 끝이 없네.

어랑위!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화왕산 깊은 곳에 풀길이 아득하네. 임진왜란 때 난리를 평정하던 역사를 생각하니, 천추의 의로운 공적은 진흙 속에 침몰하지 않으리.

어랑위!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낙동강 물줄기가 맑고 맑아 푸른 쪽빛 같네. 나들이 온 사람들이 동남쪽의 아름다운 경치를 알지 못하니, 푸른 절벽과 맑은 못을 누가 능히 알리오.

어랑위! 대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화악산이 높이 솟아 북두칠성에 닿을 듯하네. 상서로운 기운이 남쪽으로 내려와 여러 마을에 베풀어지니, 천문만호(千門萬戶, 모든 집)가 모두 스스로 단속하네.

어랑위! 대들보를 위로 던지니, 옥 같은 집이 환히 밝아 별과 달이 빛나네. 인간 세상의 큰 도(大道)는 효()와 충()이니, 어찌 다른 이설(異說)로 오래도록 다투어 흔들리게 하리오.

어랑위! 대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못이 맑고 깨끗하여 끝내 물이 마르지 않으리. 선현들이 펼친 공적이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니, 그 풍모(風猷)를 사모하고 우러러보는 손님들의 말이 많도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량(上樑)을 올린 후에는 천신(天神)이 묵묵히 돕고 지기(地祇)가 효험을 나타내시어, 한 고을의 준수(俊秀)한 인재들이 이에 일어나 오직 어버이께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기에 힘쓰게 하옵시고, 백세토록 희생과 폐백을 갖추어 제사 지내게 되면, 산은 더욱 높아지고 물은 더욱 길어짐을 볼 수 있으리니, 실로 우리 무리가 후회 없이 정성을 다함이요, 뒷사람들로 하여금 영구히 계승하여 닦게 함이 되리라. 칭송이 어찌 많지 않으리오!

기사년(己巳年) 유두월(流頭月, 6) 상순(上澣, 초열흘 안),

후학(後學) 진성(眞城) 이원영(李源榮)이 삼가 지음.

 

[주석]

 

2025.11.29.무안 덕연서원_쌍정당기(雙全堂記)

 

雙全堂記

夫忠與孝者人道之大節而有一於此, 朝廷嘉之褒美而陞爵或命旌而表彰, 土林尊慕, 立祠而祭享且記實而壽傳, 粤昔, 魚變朴先生, 兼全兩者, 豈不韙哉, 先生於密城華閥,自少濡染者孝友, 而亦有根天之性, 家貧而不瞻滫瀡之養爲恨, 而堂前鑿池養魚以悅親之供鄉隣稱之以孝, 及其兩親俱沒也, 池中一魚化龍而昇天遺鱗二片色如金砂, 先生取而珍藏講究經史之暇, 習乘馬弓矢, 赴武科三魁, 時有女眞侵境承命討賊, 祭龍伯, 以赤鱗爲障泥, 乘馬直進, 走馬如飛, 賊丸不能貫穿障泥, 敵驚而逃亡以其戰功, 除三水府使, 爲政廉潔立學 規而教鄉土, 民俗丕變築城郭闢六鎭, 鞏固國基, 朝廷送朝天使之日以武臣從事官如京明皇帝曾聞, 先生之武藝, 殿前, 設射場試弓矢, 連發連中, 明皇擬以授爵, 先生固辭曰予以藩國微臣幸蒙寵恩陞爵無上光榮, 弊國頻頻有北胡南蠻之侵不可以安身在此, 俄而聞對馬島寇, 侵邊境掠奪, 上書丞相, 奏請還國, 得許而歸, 平討其賊, 除陞參判, 至漢城判尹, 賊歸舊廬, 偏額曰魚變堂, 以終餘年, 當時太史氏不采, 猶有地方之口碑不湮, 以至五百餘載, 而朴正熙大統之世, 以土林之請, 始許推進紀念事業, 至歲壬申, 以國費, 建祠宇于魚變齋境內, 而祭享, 以德淵書院扁額, 祠曰忠孝, 堂曰雙全, 以土林公議, 孫院長觀植氏來, 請余以記, 五根也, 有秉彛之性者, 不敢以不文辭, 遂書之如右

癸酉肇夏上澣

安東 權五根 謹記

 

쌍전당기

()과 효()라는 것은 인간의 도리에서 큰 절개(節操)인데,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조정은 이를 칭찬하고 포상하여 지위를 올려 주거나, 혹은 정문(旌門)을 명하여 그 행실을 드러내게 한다. 향중의 선비들은 그를 흠모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여 오래도록 전한다.

옛적에 어변박(魚變朴) 선생은 두 가지 덕을 모두 갖추었으니, 어찌 옳지 않다 하겠는가. 선생은 밀성(密城)의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우(孝友)의 가르침을 익혔고, 또한 타고난 바탕이 하늘에서 받은 것처럼 인성이 순수하였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부모를 잘 봉양하지 못함을 한으로 여겨, 집 앞에 연못을 파고 물고기를 길러 부모님의 기쁨을 삼았으니, 이 때문에 이웃들이 모두 그를 효자라 칭하였다.

두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연못 속의 한 마리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비늘 두 조각을 남겼는데 색이 금모래와 같았다. 선생은 이를 얻어 보물로 간직하였고, 경사(經史)를 공부하는 틈틈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을 익혀 무과에 급제하여 삼괴(三魁)의 영예를 얻었다. 때마침 여진(女眞)이 변경을 침입하였기에 명을 받아 토벌하게 되었다.

선생은 용신에게 제사하고 붉은 비늘을 말의 장니(障泥, 흙받이)에 달아 말을 몰아 곧장 달려갔는데, 말 달리기가 새처럼 빨랐고 적의 탄환도 장니를 뚫지 못하였다. 적이 놀라 달아났고, 그의 전공으로 인해 삼수부사(三水府使)에 임명되었다.

정사를 맡을 때에는 청렴하고 바르게 다스렸으며, 학교를 세워 향리의 백성을 가르쳤다. 그 풍속이 크게 변화하였고, 성과 진()을 세워 국경을 튼튼히 하여 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조정에서 조천사(朝天使)를 보낼 때 무신 관원으로 따라가게 되었고, 명 황제가 선생의 무예를 듣고 궁궐 뜰에 사정을 설치하여 활쏘기를 시험하였는데, 잇달아 쏘는 화살이 모두 적중하였다.

황제가 작위를 주려 하자 선생은 굳이 사양하며 아뢰었다.

신은 번국(藩國)의 미천한 신하입니다. 이미 은혜를 입어 작위를 올려 주셨으니 지극한 광영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북쪽 오랑캐와 남쪽 오랑캐가 자주 침입하여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그때 대마도 왜구가 국경을 침범하고 약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승상에게 상소하여 돌아가게 해 달라 청하였다. 허락을 얻어 귀국하여 적을 평정하였고, 참판으로 승진한 뒤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적이 항복하였을 때, 그 사는 집에 걸린 현판에 어변당(魚變堂)’이라 쓰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당시에 사관이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지방의 입전(口傳)은 사라지지 않고 전해져, 오백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때에 이르러 향중(土林)의 청원으로 비로소 기념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임신년(壬申)에 나라의 비용으로 어변재(魚變齋) 경내에 사당을 세우고, 덕연서원(德淵書院)에서 편액을 내걸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사당 이름을 충효(忠孝)라 하고, 당 이름을 쌍전(雙全, 두 가지 덕을 모두 갖춤)이라고 하였다.

향중의 공의에 따라 손() 원장 관식(觀植) 씨가 나에게 와서 기문을 지어 달라고 하므로, 오근(五根)이 기록하는 것이다.

천성에 바른 품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감히 글을 갖추지 못하였다 하나마, 위와 같이 적어 둔다.

계유년(1993) 초여름 상순(初夏上澣)

안동(安東) 권오근(權五根) 삼가 씀

 

2009.4.10.어변당과 적룡지
2025.11.28.어변당 편액
2025.11.29.밀양 무안 어변당기

 

魚變堂記

堂以魚變名 爲著其忠孝感也 在華山之南 終南之西數里地 噫 古今稱名園勝墻 莫如花石之平泉 園林之綠野 然不一再傳 已屬於頹垣廢址 荒烟野草中 是皆外物也 以其富貴去則繁華散 氣數衰而風流銷也. 曷若此堂之得名於忠孝所感 而遠經倭寇之變者乎. 堂之主人翁三水公 生而至孝 狀而奮忠 供旨中廚 父母不戚 專封上國 皇帝曰咨 則忠孝所至 豈無異類感應之理乎. 王祥之永魚躍出 羲經之豚無信及 槪可見之也. 公會築堂於居室之畔 爲是省後秉拂之所 而又築池於堂下隙地 養得多小魚兒 非直長夫子靜觀之樂 爲是吾曾子膾炙之美也. 源頭活水 便作孝水而止滀 則雖贊伏矣 亦孔之昭也. 每飯撤之非一朝一夕之故 而其中赤甲一魚 莫之致而至者 乃三百鱗之長也. 呴沫遂隊 繁其族類 換則得子路之米 漁則供蕫生之旨矣. 及其風樹不停 雲雨忽作 終非池中物也 則雷𩃀所擊 堂固自如 塘亦無恙焉. 神異哉 此龍也. 龍之變化 非深山大澤之中 必於江淮河海之大 而乃以一小堂一小池一養魚 油然變化 乘六氣而下上于天 向所謂忠孝所感者 非耶. 虛塘兩鱗 亦甚異事也. 當時我國每多不虞之變 公不勝忠憤 幷用文武爲業 歲癸丑 野人征討 不特忠義爲甲冑 乃以祥鱗二片捍禦勇鬪 則深淵巨壑 涉如平地 勁弩長戟 纔來旋退 虜輒號之以飛龍 則草堂之生顔 尤如何哉 眞勝國大將軍之遺風也. 古所謂求忠臣於孝子之門者是也. 其誠也甚篤 故仁人君子之登此堂 而名之曰魚變堂 其事也似野 故牧兒樵叟之聞其事 而爭謂曰魚變堂. 邇來 傳守非徒幾百年於玆矣 則其將千萬歲於來世也 審矣. 粤在壬癸之變 狼烟豺火 亦不得以燹焉 若非神物之所爲守 則無奈公精靈毅魄鬱而不散而冥佑也耶. 然則此非騷人墨客之風月江山 風流豪士之樓臺池塘也. 記者之筆 亦豈世之樓記如哉. 爲公後孫者 升此堂 人此室 不以外物之花石名園爲榮 以公忠孝之心爲心 則此堂之門戸 世世昌大 與華山終南 同爲終始焉. 記者非其人 敢此略之 以俟世之能記者.

通政大夫 都護府使 金應祖 記

 

어변당기(魚變堂記)

()을 어변(魚變)이라 이름 지은 것은 그 충효에 감응한 바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화산(華山)의 남쪽 종남(終南)의 서쪽으로 몇 리 되는 곳에 있다. 아아, 고금에 일컬어지는 이름난 정원 훌륭한 전장으로 화초와 괴석이 아름다웠던 평천장(平泉庄)과 원림(園林)이 아름다웠던 녹야당(綠野堂)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전하지도 않아서 이미 무너진 담 황폐한 터의 황량한 연기와 들풀 속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모두 외물()이다. 그 부귀가 떠나가면 변화함도 흩어지고, 운수가 쇠퇴하면 풍류도 사그러들기 때문이다. 어찌 이 당처럼 충효에 감응되어 이름을 얻고 멀리 왜구의 변을 겪은 것과 같겠는가?

어변당의 주인옹 삼수공(三水公)은 나면서 지극히 효도하였고 장성하여서는 충성을 떨쳤으니, 부엌에서 음식을 봉양함에 부모님께서 서운해 하지 않으셨고, 명나라에 사신 가자 황제가 감탄하였으니, 충성과 효도가 지극한 곳에 어찌 이류(異類)가 감응하는 이치가 없겠는가? 왕상(王祥)이 얼음을 두드려 물고기가 뛰어나온 것이나, 주역(周易)새끼돼지와 물고기에게 믿음이 미친다.’고 한 것으로 대략 알 수 있다.

공은 일찍이 거실 곁에 당을 지어 아침저녁 문안드린 뒤에 수양하는 장소로 삼고, 또 당 아래 틈이 있는 곳에다 못을 파서 얼마간의 물고기를 길렀는데, 정자(程子)처럼 조용히 관조하는 낙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증자(曾子)처럼 회와 구이의 좋은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으니, 원두(源頭)의 활수(活水)는 곧장 효도의 물이 되어 고여, 비록 잠복해 있었지만 너무도 뚜렷하였다. 매양 밥을 흩어준 것이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의 일이 아니었는데, 그 가운데 붉은 비늘의 물고기 한 마리는 부른다고 오는 것이 아닌 영물로 곧 300가지 물고기 중의 가장 어른이었다. 거품을 뿜으며 떼를 쫓아다니면서 그 무리를 번식하니, 바꾸면 자로(子路)처럼 쌀을 얻을 수 있었고, 잡으면 동생(董生)처럼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올릴 수 있었다. 나무에 바람이 멈추지 않듯이 시간이 흘러서 홀연 구름과 비가 일어나니 마침내 못 속에 남을 물건이 아닌지라, 번개와 우레가 치면서 당은 굳이 그대로였고 연못 또한 탈이 없었다. 신이한 일이로다. 이는 용이었다. 용의 변화는 깊은 산 큰 못 가운데가 아니면, 반드시 장강(長江)과 회수(淮水)나 황하(黃河)나 바다처럼 큰 물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제 작은 당 작은 연못에 키우던 일개 물고기가 뭉게뭉게 변화하여 육기(六氣)를 타고 하늘에 오르내리니, 앞서 이른바 충효에 감응된 것이 아닐까? 빈 연못에 남은 두 개의 비늘 또한 매우 기이한 일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매양 예기치 못한 변고가 많았다. 공은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고 문무(文武)를 아울러 공부하였는데, 계축년에 야인(野人)을 정벌할 때 충의로만 갑옷을 삼었던 것이 아니라, 이에 상서로운 비늘 두 조각으로 몸을 막고 용맹하게 싸웠는데, 깊은 못 큰 골짝을 마치 평지처럼 건너며 센 쇠뇌와 긴 창이 다가와도 곧장 물리치니, 오랑캐들이 문득 비룡(飛龍)이라 불렀다. 초당(草堂)의 생색이 또한 어떠했겠는가? 참으로 고려조 대장군의 유풍(遺風)이었다. 옛날 말에 이른바 충신을 효자의 가문에서 찾는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그 정성이 매우 독실하였으므로 인자한 사람과 군자가 이 당에 올라서는 이름을 어변당(魚變堂)이라 하였고, 그 일이 야사(野史)인듯하였으므로 목동과 나무하는 노인들이 그 일을 듣고는 다투어 어변당(魚變堂)이라 일렀다.

이래로 전하여 지켜온 것이 지금까지 한갓 몇백 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장차 천년만년 후세에까지 전해질 것이 분명하다. 지난 임진 계사의 왜란에 전쟁의 불길도 불태우지 못하여 마치 신물(神物)이 수호해 주는 듯하였으니, 공의 정령과 굳센 기백이 서려 흩어지지 아니하고 몰래 도와주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런즉 문사(文士) 묵객(墨客)들이 풍월을 읊조리는 강산이나 호걸 인사들의 누대(樓臺)나 지당(池塘)이 아니다. 기록하는 자의 붓이 또한 어찌 세상의 누정(樓亭) 기문과 같어서야 되겠는가? 공의 후손된 자는 이 당에 오르고 이 방에 들어와서 외물(外物)인 꽃과 괴석으로 이름난 정원을 영예로 여기지 말고, 공의 충효(忠孝)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는다면, 이 당의 문호는 대대로 창성하여 화악산이나 종남산과 함꼐 시종을 함께 할 것이다. 기록하는 자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닌지라, 감히 이렇게 간략하게 적어 세상에 잘 기록하는 자를 기다린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도호부사(都護府使) 김응조(金應祖) 기록하다.

 

 

魚變堂記

天地間光岳氣分 磊落盤礡 萬物之所不能得者 必鍾之於人 而乃爲忠孝之大人君子 雖其身歿之後 英氣靈魄 不隨萬物𣏓散 愈乆而彌存 其所以爲大人君子者 修於身用於心 施於事 此三者 能不𣏓而存也 余嘗閱古籍 嘐嘐然憬前脩而恨不得 朝暮遇矣 今按魚變堂遺事 不覺蹶然歛袵而起敬 乃盥微擊節曰 噫此三者不朽之說 所由尙也 縱固世代遼夐 有難詳悉偉蹟 而第其窮格涵養之工 忠臣孝弟之行 文武經濟之才 卽身修心用事施之所不朽者也 聞之而無緒不淑 睹之而有蹟可欽 長世今聞 闇然日章 又況生於徧邦 羽儀皇廷 荷天之寵 曠絶焜赩 聲振寰宇 摠由純誠篤忠之特著耶 蓋嘗論之 自古孝子得永魚之躍 此固感通神明 而至若祥鱗雲雷之異兆 乃大賢虎變之象則 魚堂之號 良有以也 雖在千載之後 其倣風霆洞窮宙之氣 猶足以想見其人 源始溯本而言之則 而忠孝爲根基 發源弘長 英靈氣魂 彌亘霄壤 閱千㤼而靡泐 此卽不朽之本也 不其韙歟 孝爲百行之源 而忠孝 本無二致 故曰 求忠臣 必於孝子之門

正憲大夫 原任吏曹判書兼 知經筵事 弘文館提學 同知成均館事

鍾山 李源命 記

 

어변당기(魚變堂記)

하늘과 땅 사이에 산악의 정기가 우쭐우쭐하고 서리서리하게 나누어서 물건이 얻지 못한바를 반드시 사람이 타고 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충의와 효성을 할 수 있는 대인 군자가 되어서 비록 그 몸이 죽은 뒤에라도 영특한 기운과 신령스러운 넋은 보통 물건과 같이 썩어 없어지지 않고 그 이름은 오래 될수록 그대로 남아있다. 이러한 대인군자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을 수양하며 마음씨를 올바르게 쓰며 옳은 일을 하게됨으로 이러한 세가지 일은 능히 썩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옛 서적을 읽다가 마음 기쁘게 옛날의 대인군자들을 동경(憧憬)하였으되 오늘날에 와서 만나지 못함을 한탄 하였다. 이번에 어변당 유사(遺事)를 읽어보고 저절로 옷자락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남을 깨닫지 못하고 곧 손을 닦고 무릎을 탁 치고 말하기를 앞에 말한 수신, 용심, 사업이 세가지가 있기 때문에 썩어지지 않고 있구나.하였다. 비록 세대가 벌써 오래 되어서 거룩한 행적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다만 그 지극한 마음에 밴 공부와 충실하고 미덥고 효도하고 공경하는 행동이며 문무와 경제에 대한 재주가 곧 몸을 수양하고 마음씨를 잘쓰고 올바른 일을 해서 썩어지지 않는 것이다. 듣는바가 착하고 않음이 없고 보아서 업적이 있어서 숭배하게 됨으로 오랜 세월에 착한 소문이 모르는 사이에 날로 빛난다. 또 더군다나 한쪽 조그마한 나라에 생장하여서 황제의 조정에까지 은총을 받았다는 소문이 온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이 모두가 순수한 성실과 두터운 충의가 별다르게 저명했으므로 연유한 것일 것이다. 대개 말하자면 옛날부터 효성이 지극해서 얼음속에서 잉어가 뛰어 나왔다는 것도 신명이 감동된 것이며 상서로운 물고기가 구름과 비를 일으킨 신기한 조짐은 곧 큰 어진 이는 범으로 변화한다는 상징이었으니 어변당이라는 이름이 참으로 소유연이 이쓴 것이다. 비록 천년을 지낸 뒤이라 하더라도 그 바람과 우레를 대수롭게 알지 않고 온 우주를 통찰할 만한 기상은 오히려 그 사람을 보는 듯 하다. 그 모든 일이 크게 되었으며 영특한 신령과 기운찬 넋이 하늘과 땅에 뻗치어 천겁(千㤼)을 지내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곧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원인이다. 그것이 위대하지 않겠는가. 효도란 백가지 행실 가운데 제일가는 근본이 되어 충의와 효도가 원래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충신을 구하려면 꼭 효자의 가문에 가서 구하라.하였다.

정헌대부 전날 이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 제학 동지 성균관사

용인(龍仁) 이원명(李源命)이 기문을 씀.

 

 

魚變堂重修記

此魚變堂也 堂之慈孫泰郁甫 博謀於衆 仍舊貫而如之堂之顏 於是復生於世 池亦從此而修焉 循牆登除 升堂入室 漢城公供旨之風絲月竿 如可復見矣 賦歸之角巾烏几 亦可依然而睹之則 公必曰余有後也 審矣 余嘗聞唐李渤 營此白鹿洞 子孫不能保守 劉西澗立此是是堂 子孫亦不能守焉 待吾朱夫子表章之然後 人與地復著於世 至於此堂則 不徒後夫子五百年之久 備經吾東先生晦退寒旅諸君子之信筆 而不遑一言之表章 然堂之人與地之名 尚今四百年之後 而示之於地之輿圖 誦之於人之口碑 愈久而愈新 有若誦湯之銘 湯之盤在茲矣 謂周之文 周之量 在茲矣 漢城公忠孝所至而然歟 一神鱗變化所佑而然歟 諸子孫追慕攸篤而然歟 胡爲乎不得嶠左江西 磊磊相望之巨筆 而乃如是也 信知忠孝之爲吾道上地田也 公之忠孝 公之詩文 可見也 不有忠孝之根本於腔子裏 則焉有英粹發越於外者 如是其自露耶 所以一小魚之養 而繁其族 遺其鱗 終始效靈於止忠止孝之日也 世之聽者 豈可諺之而不留神於至誠之所感者乎 前人之述備矣 第觀堂制則 凉者廳 煥者室 而纔三間而已 止者水 築者土 而纔半畝之大而已也 其材之或可改而不改 池之有可深而不深築者 貴其舊材之猶存 而亦不敢舊池之淺深也 百年前堂榭池塘 今日更薪則 左右前後山川風物之精彩 亦豈無今日之幾箇層格耶 震佳暮霞 浩然晴嵐 終南秀色 德大歸雲 以至於土洞流水 鳳臺芳草 安水古鍾 皆山新月 一寓目而盡得 則堂亦不可謂無景 而知之者盖寡矣 堂固如是則 令公之實蹟 吾友之追慕駕出乎古所謂劉李家 得朱子而後 名益彰也 余亦莅茲一年 竊尙論此鄉忠孝 第恨李持平魚孝子盧承旨孫判書所居之里 無一間遺屋矣 今登此堂 不勝感寓之極 敢此記之 君之後孫 復嗣而葺之 此堂之常新於千百歲云

通訓大夫 行都護府使 眞城 李彙寧 記

 

어변당중수기(魚變堂重修記)

이것이 바로 어변당이다. 그 후손인 태욱(泰郁)씨가 널리 자손 된 이들과 의논해서 옛 규모와 꼭 같게 중수하였다. 그래서 어변당의 면목이 다시 세상에 알리게 되었으며 연못도 여기에 따라서 수축하였다. 담을 따라서 뜰에 들어서고 마루에 올라 방에 들어가니 한성공께서 반찬 장만하기 위한 낚시 끈과 달밤의 낚싯대가 다시 보이는 것 같으며 벼슬을 버리고 돌아올 때의 사모와 검은빛 궤안(几案)이 뻔히 보이는 듯하다. 공께서 그 당시에 필시 말하기를 내 자손이 이것을 보수하리라 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내 일찍이 듣건대 당나라 이발(李渤)은 백록동 서당을 경영하였으되 그 자손이 지키지 못하였으며 유서간(劉西澗)도 시시당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되 역시 그 자손이 보수하지 못하였다가 뒤에 송나라 주자(朱子)가 그 사실을 기록한 뒤에야 그분들의 이름과 그곳의 이름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 어변당으로 말하면 주자의 세대를 오백년이란 오랜 세월을 뒤질 뿐만이 아니라 우리 조선으로 본다 하더라도 이회재(李晦齋) 이퇴계(李退溪)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 같은 여러 선현들이 있었건만 한 말씀 표현한 바가 없었다가 어변당의 주인공과 그 지명이 사백년이나 지낸 오늘에 와서야 처음으로 여지도에 보여주고 여러 사람들의 입에 칭송하게 되어 오래될수록 새로워져 마치 옛날 은나라 탕왕(湯王)의 세수 그릇에 새긴 명()을 외우듯 하여 탕왕의 반명이 여기에 있는 듯하며 주나라의 글을 외워서 주나라 시대의 저울대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한성공의 충의와 효도가 지극한 바로 그런 것일까? 또는 여러 자손들이 그러한 조선을 독실히 추모한 바로 그런 것일까? 어찌해서 영남 좌도와 낙동강 서쪽에 큼직 큼직한 큰 선비들이 즐비한데 그분들의 믿을 만한 문자를 얻지 못함이 이러 하였던가? 참으로 충의와 효도는 우리들의 도리에 있어서 최고의 근본이 됨을 알 수 있다. 공의 충성과 효도는 공의 시와 글에도 엿볼 수 있다. 그 충의와 효도가 뱃속에 뿌리 박혀 있지 않다면 어찌 그 꽃답고 순수한 마음이 외면에 이같이 드러 나겠으랴. 그런 까닭에 조그마한 물고기 하나를 길러도 그 종류들이 번성하여지고 그 비늘을 남겨 두어서 끝끝내 충의에 그치고 효도에 그친 날까지 영험을 보여주었겠는가? 세상의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의 전설이라고만 해서 지성에 감동된 것을 그대로 넘겨 버리겠는가? 지나간 분들의 기록에 모두 자세히 말하였다. 단지 어변당 제도를 보면 여름에 거처할 것은 청이며 겨울에 거처할 것은 방인데 세 칸에 그치었고 담긴 것은 물이며 쌓은 것은 흙으로 겨우 열대 평밖에 되지 않는다. 그 재목은 혹 고쳐야 할 것도 고치지 않고 그 연못을 더 깊게 할 수도 있으되 깊게 하지 않은 것은 옛 재목 그대로 두는 것과 옛 깊이 그대로 하는 것은 옛 모습 그대로를 소중하게 여긴 까닭이다. 몇 백년 전에 이룩된 서당과 연못이 오늘날 다시 새롭게되니 좌우 전후에 있는 산천 경치의 정기가 역시 더한층 아름다워지지 않겠으랴? 진가산 저문 노을과 호연봉 맑은 햇빛 아지랑이며 종남산 수려한 산색과 덕대산으로 돌아가는 구름이며 고사동으로 흘러가는 맑은 물 봉황대의 꽃다운 풀, 안수사의 옛 종소리 지산에 올라오는 새 달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이 어변당에도 경치가 없다 할 수 없으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적다. 이 어변당이 진실로 이러하다면 한성공의 실적과 그 자손인 나의 친구 조선을 추모함이 앞에 말한 이발과 유서간 두 사람이 주자를 얻은 뒤에 이름이 떨친 것보다 한층 더할 것이다. 내가 이 고을 부사로 온지가 년이 되었으며 이 고을의 충의와 효자를 알아 보았는데 이지평, 어효자, 노승지, 손판서가 살던 동리에는 한 곳도 남긴 유적이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이번에 이 청에 올라 와서는 감개하고 존중하는 심정이 지극한 것을 견딜 수 없어서 감히 이렇게 기록한다. 그대 후손들이 다시 이어서 중수한다면 이 서당은 천백년 내려 가더라도 항상 새로울 것이리라.

통훈대부 행 도호부사 진성 이휘영(李彙寧)은 기문 함.

 

[주석]

부귀(賦歸) :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옴.

정통(正統) : ()나라 영종(英宗) 때의 년호(年號)이니, 원년(元年)이 우리나라 세종(世宗) 十八(1436).

태욱(泰郁) : 어변당(魚變堂)공의 십삼대손으로 자()는 문중(文中), ()는 덕엄(德广).

백록동(白鹿洞) :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의 오노봉(五老峯) 아래에 있는 정사(精舍)인데, 처음 당()나라 이발(李渤)이 지은 집이다. 중간에 여러번 흥폐(興廢)을 겪다가 남송(南宋)의 주자(朱子)가 중수(重修)하고 국립서원(國立書院)이 되었음.

회재(晦齋) : 이언적(李彦迪)의 호(). ()은 여강(驪江), ()는 복고(復古), 성종(成宗) 二十二(1491)에 생하여 1553년 졸함, 중종(中宗) (1513) 문과에 급제(及第)하여 원상(院相)이 되었으나 윤원형(尹元衡) 등 소인(小人)의 모함(謀陷)으로 강계(江界)에 유배(流配) 되었다가 배소(配所)에서 졸함. 시호(諡號)는 문원(文元), 안강(安康)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제향(祭享).

퇴계(退溪) : 이황(李滉)의 호(). ()은 진보(眞寶), ()는 경호(景浩), 동방오현(東方五賢), 시호(諡號)는 문순(文純), 연산(燕山) (1501)에 생하여 一五七O년에 졸함. 중종(中宗) 二十九(1534) 문과에 급제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제향(祭享).

한강(寒岡) : 정구(鄭逑)의 호(). ()은 청주(淸州), ()는 도가(道可), 一五四三년에 생하여 一六二O년 졸함. 퇴계(退溪)와 남명(南溟) 양선생(兩先生)의 문인(門人)이며, ()되어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문목(文穆)이며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祭享).

여헌(旅軒) : 장현광(張顯光)의 호(). ()은 인동(仁同), ()는 덕회(德晦), 정한강(鄭寒岡)의 문인(門人), 一五五四년에 생하여 一六三七년에 졸함.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며 동락서원(東洛書院)에 제향(祭享).

이휘영(李彙寧) : 一七八八~一八六一, ()은 진성(晉城), ()는 군목(君睦). ()는 고계(古溪) 순조 16(1816) 진사. 퇴계선생(退溪先生)대손으로 천()되어 출사(出仕)하여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내고 부총제(副摠制)가 되었음.

탕명(湯銘) : ()나라 탕왕(湯王)이 지은 명()이니, 반명(盤銘)이 후세에서 널리 애송(愛誦).

유우(攸芋) : 거처(居處)한다는 것.

여도(輿圖) : 전국의 읍지(邑誌)를 종합한 책이름이니, 여지도(輿地圖).

 

 

魚變堂記 小序

孝者 天道之常 而人理當然之事也 人之有是行者 固不乏爲多 然往往有致感於物 而靈應昭著者 如孟宗之雪筍 王祥之氷魚 古今所傳 信不可誣者 抑何理也 盖其行也 誠與不誠故也 誠也者 粹然不雜 出於天性者也 華山之陽 有魚變堂 堂之主人 謂之朴孝子也 堂之名 表其至行之感於物也 問其村人則 其言曰 朴孝子名坤 自幼時 有至性事親 誠敬備至 然家貧 無以爲資 乃作一方池於堂之北 養魚而供之 每飯先分其半 投之於水 如是積年 魚大盛 一日 雲霧繞池前後 雷雨大作 忽有一物 自池中出 鬐髥晃晃 滿天蜿蜿 然騰空而去 須臾雲散雨收 天日晴明 池中之魚 尚洋洋潑潑 魚之升天 固無上願也 在魚可謂壯矣 在主人 若無所監 誠異矣 然蹟公之平日則 魚變之所以得成者多矣 公早事鞱靲 馬島倭寇之役 力戰得捷 至蒙爵賞 此魚之或躍在淵之時也 其後入中華 天子聞其忠勇 縻以爵品 欲留之 至出美女而賜之 連生三子 以後懇乞歸國 而播植將種於中國 如此奇異偉壯之事 曠古所無 由是言之 此是魚之升天之時也 普洽下土 使其氏族 繁於上國 是魚之 興雲吐霧 沛然作雨 普洽下土之兆也 天之曲成 何其至此也 此莫非至行無間 孚及異物之致也 誠亦神矣 不侫 宗人也 後於四百餘年 而始得聞之 景仰之心 有倍於人 不揆拙陋 謹叙二言於堂記之末 使遠近諸宗 傳說後人云爾

資憲大夫 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朴孝正 序.

 

뒤에 부치는 서문

효도란 것은 천도(天道)의 떳떳함이요 인리(人理)에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이렇게 실행한 자는 그리 많지는 못하다. 그러나 왕왕이 물건을 감동시켜서 영험이 밝게 나타난 일은 옛날 맹종(孟宗)의 효성에 감동되어 눈속에서 죽순이 돋아났으며, 왕상(王祥)에게는 얼음이 깨어지며 잉어가 뛰어나온 일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전하는 말이 참으로 속일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 대개 그러한 행동이 진실이냐 진실이 아니냐 하는데 있다. 진실이란 것은 성실하고 꾸밈이 없는 것이 타고날 때의 본성 그대로인 것이다. 그리고 고기가 변하였다는 어변당이란 것도 그 지극한 효행이 사물을 감동시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마을 사람에게 그 유래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박효자의 이름은 곤()이며 어릴 때부터 지극한 천성이 있어서 부모를 섬기는 정성과 공경하기가 함께 지극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뜻대로 봉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네모난 연못을 청 북쪽에 파고 물고기를 길러서 반찬으로 공양하였다. 밥을 대할 때마다 한 반분은 먼저 물에 던져 주었다. 이러하기를 여러해 해서 물고기가 크게 번성하여졌다. 하루는 구름과 안개가 연못을 둘러싸고 천둥과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떤 물체가 비늘이 번쩍번쩍 빛을 내면서 꿈틀거리며 공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곧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멈추며 해가 청명하였고 못 가운데 고기떼들은 펄펄 뛰면서 좋아하는 시늉을 하였다. 고기로서는 장한 일이며 주인에게 있어서도 비할데 없는 신기한 일이다. 그러니 공의 평생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면 물고기가 용으로 변화하듯이 성공한 일이 많았다. 공이 일찍부터 병서를 공부하여 대마도 왜구를 토벌할 때에 승리를 얻어서 벼슬과 상까지 받게 되었음은 이 고기가 못에서 뛰놀던 때이었고 그 뒤에 중국에 들어가니 황제가 그의 충성하고 용맹함을 듣고 벼슬을 주어 못 떠나게 하고자 아름다운 여색까지 주어서 아들 형제를 낳게까지 하였으며 또 그 뒤에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청하여 장군의 종자를 중국에도 없던 일이다. 이로 보아서 비해 보면 이것이 물고기가 하늘에 올라가던 때와 비슷하다. 그리고 자손을 중국에 남겨두고 그 후손을 번성하게 한 것은 이것이 물고기가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뿜어서 갑자기 소낙비를 쏟아서 이 천지를 흡족하게 할 조짐이다. 하늘이 곡진하게도 공에게 성공하게 하는 것이 어찌 이와같이 지극하겠는가? 이것이 모두 공의 지극한 행동이 거짓이 없어서 그 정성이 미물에게까지 미치게 함이 아닌 것이 없다. 참으로 신기할 일이로다. 하찮은 나는 종씨간이라 공보다 백여년 뒤에 났으며 이 말을 처음 듣게 되니 숭배하는 마음이 남보다 갑절이나 되어서 옹졸하고 비루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삼가 한 말씀을 어변당 기문 끝에 기록해서 멀거나 가까운 족친으로 하여금 뒷 사람에게 전해 주려 한 것이다.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박효정(朴孝正)은 서문을 씀.

 

출처와 참조

국역 어변당선생실기 전-덕연서원-박병륜-대보사(1998.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