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 표충비(密陽 表忠碑)』는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1-3(동부동안길 4)에 위치하며, 1972년 02월 12일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록 유산이다.
표충비(表忠碑)는 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조사(南鵬祖師)가 이를 중수하면서 표충비를 세웠으며, 지금은 단층 팔작지붕의 보호각 내에 있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이고, 규모는 전체 높이 4m, 탑신 높이 270㎝, 비 폭 96㎝, 두께 54.5㎝이다. 비 전면에는 송운대사비명(松雲大師碑銘)으로 시작하는 사명대사의 행장이, 후면에는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으로 시작되는 서산대사의 행장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좌측면에는 밀양영취산표충사사적비(密陽靈鷲山表忠詞事蹟碑)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선현(李宣顯)이 지었고,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김진상(金鎭商)이 썼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유탁기(兪拓基)가 두전(頭篆)을 썼다.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도 이 비에 남아 있어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表忠碑
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弁序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李宜顯撰
嘉善大夫弘文館大提學知製敎金鎭商書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兪拓基篆
粤我昭敬大王在宥之二十五年日本賊大舉兵入寇主上鄙在西陲凶鋒彌滿八路中外食焉者多雉兎逃賊遂肆意蹂躪維時松雲大師惟政佛者流也飛錫入高城諭賊勿嗜殺賊見儀容凜然卽起敬戒其徒由是嶺東九郡得免屠戮之慘旣而慷慨語諸僧曰吾等優游飮啄皆聖恩也今國危至此坐視不救可乎乃募衆至數百亟赴順安時師之師休靜方總諸道僧兵辭以老擧師自代遂從體察使柳成龍協同天將破平壤賊隨都元帥權慄下嶺南婁有斬獲上嘉歎進階堂上使隨劉總兵挺入倭營諭意淸正三往三返盡得要領正問朝鮮有寶乎曰無有寶在日本若頭是也正色阻及還上召至內闥歷聞事情仍敎曰昔劉乘忠姚廣孝俱以山人勳在國家爾若長髮百里之寄三軍之命無所不可師辭以不敢上亦不屈其志特給武庫鎧仗俾抄擊餘賊已又助築城埤飾儲胥完保障卽上印綬抗章乞休不許丁西倭再逞從麻劉二督府具有勞勣特陞嘉善拜同知中樞辛丑又築釜山城甲辰奉國書往日本諸倭相顧警憚受約束惟謹還被虜男婦三千餘口復命加階嘉義優錫賚以獎之是後年益老乞骸自雉嶽入伽倻山至庚戌秋示寂世壽六十七僧夏五十七茶毘之夕得舍利一具藏之石鍾建窣堵坡師豐川任氏父守成娶達城徐氏生師於嘉靖甲辰幼有異質稍長讀書忽有契悟投黃岳山薙髮宇曰離幼才思夙詣爲穌齋思菴高峰霽峰諸名公所賞識與詩人崔嘉運許美淑林子順李益之輩遊爲詩清遒可觀有四溟集行于世然斯皆師之士苴粃糠爾固不足道也唯是禀氣豪逸自有遠識明智從異教而不爲其教所囿出世而懷弭亂之志離倫而篤衛國之誠當賊勢潮驅零雺匝天忠義鬱律不能自禦片言折伏群醜尺劍建立殊績有不可以談空說幻之一枯禪比而倫之聖敎引古英傑策勉者盖亦深知其抱負之不常則豈不為一時之毅夫盖代之偉男也哉嶺南之密陽有表忠祠以享師而休師以有最初勘難之功靈圭以殲𣸵著烈終又殉節與師並腏肅宗朝命官供祭需當宁又命給復所以樹風聲勸來後也師嘗存髥不去其長至帶亦異矣今遺像留在祠中余雅不喜爲釋子作文字有來請輒麾之唯師事蹟絶奇義難一例斥却遂爲之銘其詞曰
人有五倫一則君臣臨難奮義有國無身斯爲正理名教攸遵呪梵持鉢佛也匪人獨守空門自甘夷淪視世危難寧胸嚬伸偉哉松雲跡幼心眞存髥至膝有燁精神想厥雅意不屑緇巾蠻警卒起誓清氛塵裒兵選徒師律一新楡岾救衆化被兇器九郡安岾全活惟均西山讓先用徹重宸歷載從戎箕疊鼎津齒獲侯多特侈緋銀釜營三返尤竭忱恂說寶語壯氣薄秋旻以舌代鋒遠攝强隣七年兵戈功在南民聖情眷倚諭教淳淳曰昔劉姚勳比麒麟爾能屈志佑我昌辰百里三軍嘉命可申師拜稽首其敢逡巡巨老無能顧垂慈仁衹林道場猿鳥相親是臣本懷悃款畢陳翩然歸臥雉嶽嶙岣恩獎稠疊表節之純豪光遽閟法運終湮塔廟湧空玄珠示珍凝川報祀永綏千春遺像在堂爽氣氳氤給需腸復龍章式頻惟此一着盖飾戎袀非如前代渠敎是因三師齋享共作主賓酬功彰烈施及無垠我述其事刻之貞珉爰俾鶖子師義寔循母泥虛寂追師濟屯
崇頌後再 壬戌十月 日立

표충비(表忠碑)
밀양 표충사의 송운대사(松雲大師) 영당비명(影堂碑銘) 변서(弁序)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의현(李宜顯)이 글을 짓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지제교(知製敎) 김진상(金鎭商)이 글씨를 쓰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전액(篆額)을 쓰다.
아, 昭敬大王(소경대왕, 선조) 재위(在宥) 이십오 년(二十五年, 1592년)에 일본(日本) 적(賊)이 대거(大舉) 병(兵)을 이끌고 침입(入寇)하였다. 주상(主上)께서 서쪽 변방(西陲)에 피난(避在) 계시니 흉한 적의 기세(凶鋒)가 온 나라(八路)에 가득 차서, 중외(中外)에서 곡식을 먹는 자들(食焉者) 중에 토끼와 꿩처럼 적을 피해 달아난 자가 많았다. 적은 마침내 제멋대로 유린(蹂躪)하였다.
이때 松雲大師(송운대사) 惟政(유정)은 불자(佛者)의 무리(流)였다. 석장(飛錫)을 짚고 고성(高城)으로 들어가 적(賊)을 달래어 살생(嗜殺)을 하지 말도록 일렀다. 적은 그의 의젓하고 엄숙한 용모(儀容凜然)를 보고 즉시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 무리(徒)를 경계(警戒)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영동(嶺東)의 아홉 고을(九郡)은 도륙(屠戮)의 참화(慘)를 면하게 되었다.
얼마 후(旣而), 그는 분연(慷慨)히 여러 승려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한가로이 지내며 먹고 마시는 것(優游飮啄)은 모두 성은(聖恩)이다. 이제 나라의 위태로움이 지경(至此)에 이르렀는데도 앉아서 구원하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
이에 무리 수백 명을 모집하여 급히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이때 사(師)의 스승(師)인 休靜(휴정, 서산대사)이 마침 모든 도(道)의 승병(僧兵)을 총괄(總)하고 있었는데, 늙음을 이유로 사양하고 사(師)를 들어 대신(自代)하게 하였다. 마침내 체찰사(體察使) 柳成龍(유성룡)을 따라 천장(天將, 명나라 장수)과 협력하여 평양(平壤)의 적(賊)을 격파(破)하였다. 도원수(都元帥) 權慄(권율)을 따라 영남(嶺南)으로 내려가 누차(婁) 전공(斬獲)이 있었다.
임금(上)께서 크게 가상(嘉歎)히 여기시고 당상(堂上)의 품계(階)를 올리고, 劉總兵(유총병, 명나라 유정)을 따라 왜적의 진영(倭營)으로 깊이 들어가 사정(諭意)을 달래도록(挺入) 하였다. 세 번 가고 세 번 돌아오면서(三往三返) 왜적의 요긴한 사정(要領)을 모두 파악(盡得)하였다.
(유정이)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에게 “조선에 보배(寶)가 있는가?”라고 물으니, 사(師)가 말하기를 “보배는 없고 일본(日本)에 있는데, 만약 머리(頭)가 있다면 그것(是也)이다.”라고 하였다. 청정(正)은 얼굴빛을 바꾸며 저지하였다(色阻).
돌아오자(及還) 임금께서 내전(內闥)으로 불러들여 지난 일(事情)을 자세히 들으시고, 이어서 가르쳐 말씀하셨다. “옛날 유승충(劉乘忠)과 요광효(姚廣孝)가 모두 산인(山人, 승려)으로 국가에 공훈(勳)이 있었으니, 너 또한 만약 머리를 기른다면(長髮) 백 리(百里)의 맡음(寄)과 삼군(三軍)의 명령(命)을 맡기지 못할 것이 없다.” 사(師)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다(不敢)고 사양하였으나, 임금(上)께서도 그 뜻(志)을 꺾지 않으셨다. 특별히 무기고(武庫)의 갑옷(鎧)과 병장기(仗)를 지급하여 남은 적(餘賊)을 소탕하고 공격(抄擊)하게 하였다.
이미 또 성벽(城埤)을 쌓고 병영(儲胥)을 꾸미어 보장(保障)을 완성(完)하는 것을 도왔다. 곧 인장(印綬)을 바치고 상소(抗章)하여 휴가(乞休)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不許).
정유년(丁西, 1597년)에 왜적(倭)이 다시 기승을 부리자(再逞), 마(麻)·유(劉) 두 독부(督府, 명나라 마귀와 유정)를 따라 지극히 많은 공로(勞勣)가 있었다. 특별히 가선대부(嘉善)로 승진시키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에 제수(拜)되었다.
신축년(辛丑, 1601년)에 또 부산성(釜山城)을 축조(築)하였다.
갑진년(甲辰, 1604년)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일본(日本)으로 건너갔다. 여러 왜적(諸倭)들이 서로 돌아보며 경계하고 두려워하여(警憚), 약속(約束)을 받들기를 오직 조심스럽게(惟謹) 하였다. 돌아올 때 포로(被虜)된 남녀(男婦) 삼천여 명(三千餘口)을 데리고 왔다. 복명(復命)하자 가의대부(嘉義)로 품계(階)를 더하고 넉넉하게 재물(錫賚)을 내려(優) 그 공로를 포상(獎)하였다.
이후(是後) 해가 더욱 늙어가자(年益老), 병듦을 핑계로(乞骸) 치악산(雉嶽)으로 들어가 가야산(伽倻山)에 이르렀다. 경술년(庚戌, 1610년) 가을에 입적(示寂)하니, 세상 나이(世壽) 육십칠 세(六十七)요, 승려로 지낸 나이(僧夏) 오십칠 세(五十七)였다. 다비(茶毘)하는 저녁에 사리(舍利) 한 구(一具)를 얻어 석종(石鍾)에 봉안(藏)하고 부도탑(窣堵坡)을 세웠다.
사(師)는 풍천 임씨(豊川任氏)로, 아버지 수성(守成)이 달성 서씨(達城徐氏)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갑진년(甲辰, 1544년)에 사(師)를 낳았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품(異質)이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독서(讀書)를 하다가 문득 깨달음(契悟)이 있어 황악산(黃岳山)으로 가서 머리를 깎았다(薙髮). 법명(宇)은 離幼(이유)라 하였다. 재주(才思)가 숙성(夙詣)하여 소재(穌齋)·사암(思菴)·고봉(高峰)·제봉(霽峰) 등 여러 명사(名公)들이 상찬(賞識)하였고, 시인(詩人) 최가운(崔嘉運)·허미수(許美淑)·임자순(林子順)·이익지(李益之) 등 무리(輩)와 더불어 교유(遊)하였으며, 그가 지은 시(詩)는 맑고 굳세어(清遒) 볼 만하였다. 『四溟集』(사명집)이 세상에 전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斯皆)은 사(師)가 선비로서 닦은(士苴) 지엽적인 것(粃糠)일 뿐이요, 진실로 족히 말할 것(不足道)이 아니다. 오직 기개(氣)를 호방(豪逸)하게 타고나 스스로 원대한 식견(遠識)과 밝은 지혜(明智)가 있었으니, 다른 가르침(異教, 불교)을 따르면서도 그 가르침(其教)에 얽매이지 않았고(不為其教所囿), 세속을 벗어났으면서도(出世) 난리(亂)를 평정(弭)할 뜻(志)을 품었으며, 윤리(倫)를 떠났으면서도(離) 나라를 지키는(衛國) 정성(誠)이 두터웠다(篤).
적의 세력(賊勢)이 물결처럼 밀려오고(潮驅) 안개(零雺)가 하늘을 덮어(匝天), 충의(忠義)가 울울하여(鬱律) 스스로 막아낼 수 없을 때, 한마디 말(片言)로 뭇 오랑캐(群醜)를 굴복시키고, 한 자 칼(尺劍)로 특별한 공훈(殊績)을 세웠다. 이는 공(空)을 이야기하고 허깨비(幻)를 설하는(談空說幻) 한갓 마른 선(一枯禪)으로 견주어(比而倫之) 비교할 수 없는 바이다.
성상(聖敎)께서 옛 영웅호걸(英傑)을 인용하여 채찍질(策勉)하신 것은, 대개 그가 지닌 바(抱負)가 비범(不常)함을 깊이 아신 때문이니, 어찌 한 시대의 굳센 사내(毅夫)요, 시대를 덮을 만한(盖代) 위대한 남자(偉男)가 아니겠는가!
영남(嶺南)의 밀양(密陽)에 表忠祠(표충사)가 있어 사(師)를 제사 지내고(享師), 휴정(休師)은 처음으로 난리(難)를 살폈던(勘) 공(功)이 있다 하여, 영규(靈圭)는 적을 섬멸(殲飵)한 뛰어난 공로(著烈)와 마침내 순절(殉節)한 공로로 사(師)와 함께 제사(並腏) 지냈다.
숙종조(肅宗朝)에 관원(官)을 명하여 제수(供祭需)를 올리게 하였다. 현 조정(當宁)에서도 또 복호(給復)를 명하여(命給復), 그 풍모(風聲)를 세워 후대(來後)를 권장(勸)하게 하였다.
사(師)가 일찍이 수염(髥)을 길러 허리(帶)에까지 이르렀으니, 또한 남다른 모습(異矣)이었다. 지금 영정(遺像)이 사당(祠中)에 남아 있다.
내(余)는 본래 승려를 위해 글을 짓는 것(爲釋子作文字)을 좋아하지 않아, 청하는 이가 있으면 문득 물리쳤으나(輒麾之), 오직 사(師)의 사적(事蹟)이 워낙 뛰어나고 기이하여(絶奇), 의리상(義) 한가지 예(一例)로 물리칠(斥却) 수 없어, 마침내 그를 위해 명(銘)을 짓는다. 그 명(銘)의 글은 다음과 같다.
銘曰(명왈)
사람에게 오륜(五倫)이 있으니, 그 첫째는 군신(君臣)이라.
어려움에 임하여 의(義)를 떨치고, 몸보다 나라가 있음(有國無身)이 곧 바른 이치(正理)이다.
명분(名教)이 마땅히 따를(攸遵) 바이거늘, 주술(呪梵)을 외우고 발우(持鉢)를 지니는 이는(佛也匪人) 홀로 빈 문(空門)을 지키며 스스로 세상에서 잊히기를(夷淪) 달가워한다.
세상의 위태로움(世危難)을 보고, 어찌 마음속으로 얼굴을 찌푸리고(寧胸嚬伸)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
위대하신 송운(松雲)의 자취여! 어려서부터 참된 마음(眞存)을 간직하였도다.
수염(髥)을 길러 무릎에 이르니(至膝) 그 정신(精神)이 빛나도다(有燁).
그 우아한 뜻(雅意)을 생각건대, 승려 옷(緇巾)을 깔보지 않았겠는가.
오랑캐의 경보(蠻警)가 갑자기 일어나자(卒起), 티끌을 쓸어내듯이(清氛塵) 맹세하셨네.
병사(兵)를 모으고(裒) 무리(徒)를 뽑으니, 군율(律)이 일신(一新)되었네.
유점(楡岾)에서 백성(衆)을 구하고(救), 흉기(兇器)를 감화(化被)시키니, 아홉 고을(九郡)의 편안함(安岾)이 온전히 소생(全活)함이 균일하였네(惟均).
서산대사(西山)가 먼저(先) 양보(讓)하시니, 그 도(道)가 중신(重宸, 임금)께 통하였네(用徹).
해를 거듭하며(歷載) 군대(戎)를 따르니, 그 공훈(功)이 솥을 쌓고(疊鼎) 기(箕)를 포개듯(箕) 많았네.
전공(斬獲)이 많아(多) 후(侯)에 봉해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붉은(緋) 계급(銀)을 특별히 크게 여겼네(特侈).
부산성(釜營)을 세 번(三反) 쌓는 데 더욱 정성(忱恂)을 다하였네(竭).
보배(寶)에 대해 말한 말씀(語)은, 그 장한 기개(壯氣)가 가을 하늘(秋旻)을 찌를 듯하였네(薄).
혀(舌)로써 칼(鋒)을 대신하여, 멀리 강한 이웃(强隣)을 굴복(遠攝)시켰네.
칠 년(七年) 동안의 전쟁(兵戈)의 공(功)이 남민(南民)에게 있었네.
임금의 마음(聖情)이 아끼고 의지하여(眷倚) 깨우치시는 가르침(諭敎)이 순하고 간곡하셨네(淳淳).
“옛날 유승충(劉)과 요광효(姚)의 공훈(勳)은 기린(麒麟)에 비견된다.”
“너는 뜻(志)을 굽혀(屈) 우리 번성하는 조정(昌辰)을 돕는다면, 백 리(百里)와 삼군(三軍)의 아름다운 명(命)을 펼칠 수 있다.”
사(師)가 머리를 조아려(拜稽首) 사양하였네. 어찌 감히 머뭇거릴(逡巡) 수 있었으랴. 이미 늙어(巨老) 무능(無能)하니, 다만 자애로운 마음(慈仁)만 돌아보실(顧垂) 뿐이옵니다. 다만 숲 속의 도량(衹林道場)에서 원숭이와 새(猿鳥)와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相親)이, 신(臣)의 본래 품었던 마음(本懷)이니, 진실된 뜻(悃款)을 모두 아뢰었네(畢陳).
훨훨(翩然) 날아서 치악산(雉嶽)의 높고 험한 곳(嶙岣)에 누우니(歸臥), 은혜로운 포상(恩獎)이 겹겹이 쌓여(稠疊) 그 절개(節)의 순수함(純)을 표창하였네. 호방한 광채(豪光)가 갑자기 가리워지고(遽閟), 법의 운(法運)이 마침내 사라지니(終湮), 탑묘(塔廟)가 솟아오르고(湧空) 신비로운 사리(玄珠)가 보배로이 나타났네(示珍). 응천(凝川)의 제사(報祀)가 영원히 천년(千春)을 편안하게 이어지리라(永綏). 영정(遺像)이 사당(堂)에 있으니, 맑은 기운(爽氣)이 서려 있네(氳氤). 복호(給需腸復)의 용장(龍章, 임금의 교서)이 자주(式頻) 내려지는구나. 오직 이 한 가지(惟此一着)는 대개 군복(戎袀)을 꾸미신 것(飾)이니, 이전 시대(前代)의 그 가르침(渠敎, 불교)을 인함(是因)과는 같지 않다.
세 분의 대사(三師)를 함께 제사(齋享) 지내어(共), 주빈(主賓)으로 삼으니, 공로를 갚고(酬功) 빛나는 절개(烈)를 드러냄(彰烈)이 끝이 없는 데(無垠)까지 미치네(施及). 내(我)가 그 일(其事)을 서술(述)하여 단단한 비석(貞珉)에 새기니, 이에 그 후학(鶖子)들로 하여금 사(師)의 의리(義)를 진실로 따르게(寔循) 하고, 헛된 고요함(虛寂)에 빠지지 말고(母泥), 스승(師)의 나라를 구한 뜻(濟屯)을 좇게 하라.
숭송(崇頌) 후 다시 임술년(壬戌, 1742년) 시월(十月) 일(日)에 세우다.

표충비(表忠碑)
밀양 표충사의 송운대사(松雲大師) 영당비명(影堂碑銘) 변서(弁序)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의현(李宜顯)이 글을 짓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지제교(知製敎) 김진상(金鎭商)이 글씨를 쓰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전액(篆額)을 쓰다.
아, 선조대왕(昭敬大王) 재위 25년(1592년)에 일본 도적떼가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침입했습니다. 임금께서 서쪽 변경으로 피난하시자 흉악한 적의 기세가 온 나라를 가득 채워, 나라 안팎에서 생업을 하는 사람들 중에 꿩과 토끼처럼 적을 피해 달아난 이가 많았습니다. 적은 마침내 제멋대로 나라를 짓밟고 유린했습니다.
이때 송운대사 유정은 불자였습니다. 석장을 짚고 고성으로 날아가 적들을 설득하여 살육을 자제하도록 했습니다. 적들은 대사의 위엄 있고 엄숙한 모습을 보고 즉시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 무리를 경계했습니다. 이 덕분에 영동(嶺東)의 아홉 고을은 도살당하는 참사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대사는 분연히 여러 승려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편안히 지내며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이다. 이제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앉아서 구하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
이에 수백 명의 승병을 모아 급히 순안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때 대사의 스승인 휴정(서산대사)이 마침 전국의 승병을 총지휘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늙었음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사를 대신하여 지휘하게 했습니다. 마침내 체찰사 유성룡과 명나라 장수와 협력하여 평양의 적을 격파했습니다. 또한 도원수 권율을 따라 영남으로 내려가 여러 번 전공을 세웠습니다.
임금께서 크게 감탄하시고 당상관 품계를 올리셨으며, 유 총병(명나라 유정)을 따라 왜적의 진영 깊숙이 들어가 적을 설득하도록 했습니다. 세 번 가고 세 번 돌아오면서 왜적의 중요한 사정을 모두 파악했습니다.
(이때 대사는) 가토 기요마사(淸正)에게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라고 물으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보배는 없고, 일본에 있는데, 만약 당신의 머리가 있다면 그것이 보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기요마사는 얼굴빛을 바꾸며 저지했습니다.
돌아오자 임금께서 내전으로 불러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들으시고, 이어서 교시하셨습니다. "옛날 유승충과 요광효가 모두 승려로서 국가에 공훈이 있었으니, 너 또한 만약 머리를 기른다면 (평안도) 백 리의 책임과 삼군의 지휘를 맡기지 못할 것이 없다." 대사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다며 사양했지만, 임금께서도 그의 뜻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무기고의 갑옷과 병장기를 지급하여 남은 적을 소탕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성벽을 쌓고 병영을 꾸며 방어 시설을 완성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곧바로 인장(관직의 상징)을 반납하고 상소하여 휴가를 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정유년(1597년)에 왜적이 다시 기승을 부리자, 마(麻)·유(劉) 두 명나라 독부(마귀, 유정)를 따라 지극히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특별히 가선대부로 승진시키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신축년(1601년)에는 또 부산성을 쌓았습니다.
갑진년(1604년)에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여러 왜적들은 서로 돌아보며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약속을 받들기를 오직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돌아올 때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삼천여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복명하자 가의대부로 품계를 더하고 넉넉하게 재물을 내려 공로를 포상했습니다.
이후 해가 더욱 늙어가자 병듦을 핑계로 치악산을 거쳐 가야산에 이르렀습니다. 경술년(1610년) 가을에 입적하니, 세상 나이 67세, 승려 나이 57세였습니다. 다비하는 저녁에 사리 한 구를 얻어 석종에 모시고 부도탑을 세웠습니다.
대사는 풍천 임씨로, 아버지 임수성이 달성 서씨에게 장가들어 가정 갑진년(1544년)에 대사를 낳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자질이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독서를 하다가 문득 깨달음이 있어 황악산으로 가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법명은 이유(離幼)였습니다. 재능과 사상이 숙성하여 소재·사암·고봉·제봉 등 여러 명사들이 그를 아껴주었고, 시인 최가운·허미수·임자순·이익지 등과 교유했으며, 그의 시는 맑고 굳세어 볼 만했습니다. 『사명집(四溟集)』이 세상에 전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대사가 학자로서 닦은 지엽적인 것일 뿐이요, 진실로 족히 말할 것이 못 됩니다. 오직 기개를 호방하게 타고나 스스로 원대한 식견과 밝은 지혜가 있었으니, 불교를 따르면서도 그 가르침에 얽매이지 않았고, 세속을 벗어났으면서도 난리를 평정할 뜻을 품었으며, 윤리를 떠났으면서도 나라를 지키는 정성이 두터웠습니다.
적의 세력이 물결처럼 밀려오고 안개가 하늘을 덮어, 충의가 끓어올라도 스스로 막아낼 수 없을 때, 한마디 말로 오랑캐 무리를 굴복시키고, 한 자 칼로 특별한 공훈을 세웠습니다. 이는 공허함을 이야기하고 환상을 설하는 한갓 마른 선(禪)으로 견주어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상(임금)께서 옛 영웅호걸을 인용하여 채찍질하신 것은, 대개 그가 지닌 바가 비범함을 깊이 아신 때문이니, 어찌 한 시대의 굳센 사내요, 시대를 덮을 만한 위대한 남자가 아니겠습니까!
영남의 밀양에 표충사가 있어 대사를 제사 지내고 있으며, 휴정 대사는 처음으로 난리를 살핀 공로로, 영규 대사는 적을 섬멸한 공로와 순절한 공로로 대사와 함께 제사 지내고 있습니다.
숙종 때 관원을 명하여 제수(제사 음식)를 올리게 했습니다. 현 조정에서도 또 군역을 면제하는 복호(給復)를 명하여, 그 풍모를 세워 후손들을 권장하게 했습니다.
대사가 일찍이 수염을 길러 허리에까지 이르렀으니, 또한 남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영정이 사당에 남아 있습니다.
나(글쓴이)는 본래 승려를 위해 글을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청하는 이가 있으면 문득 물리쳤으나, 오직 대사의 사적이 워낙 뛰어나고 기이하여, 의리상 한가지 예로 물리칠 수 없어, 마침내 그를 위해 명(銘)을 짓습니다. 그 명의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긴 글
사람에게 오륜이 있으니, 그 첫째는 군신이라.
어려움에 임하여 의를 떨치고, 몸보다 나라가 있음이 곧 바른 이치이다.
명분이 마땅히 따를 바이거늘, 주술을 외우고 발우를 지니는 이는 홀로 빈 문을 지키며 스스로 세상에서 잊히기를 달가워한다.
세상의 위태로움을 보고, 어찌 마음속으로 근심만 하며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
위대하신 송운의 발자취여! 어려서부터 참된 마음을 간직하셨도다.
수염을 길러 무릎에 이르니 그 정신이 빛나도다.
그 고아한 뜻을 생각하건대, 승려 옷을 깔보지 않았겠는가.
오랑캐의 경보가 갑자기 일어나자, 티끌을 쓸어내듯이 맹세하셨네.
병사를 모으고 무리를 뽑으니, 군율이 새로워졌네.
유점에서 백성을 구하고, 흉기를 감화시키니, 아홉 고을의 안녕과 소생이 고루 이루어졌네.
서산대사가 먼저 양보하시니, 그 도가 임금께 통하였네.
해를 거듭하며 군대에 따르니, 그 공훈이 매우 많았네.
전공이 많아도 벼슬에 오르기를 바라지 않았고, 붉은 계급을 특별히 크게 여겼네.
부산성을 세 번 쌓는 데 더욱 정성을 다하였네.
보배에 대해 말한 말씀은, 그 장한 기개가 가을 하늘을 찌를 듯하였네.
혀로써 칼을 대신하여, 멀리 강한 이웃을 굴복시켰네.
칠 년 동안 전쟁의 공로가 남녘 백성에게 있었네.
임금의 마음이 아끼고 의지하여 깨우치시는 가르침이 순하고 간곡하셨네.
“옛날 유승충과 요광효의 공훈은 기린에 비견된다.”
“너는 뜻을 굽혀 우리 번성하는 조정을 돕는다면, 백 리와 삼군의 아름다운 명을 펼칠 수 있다.”
대사가 머리를 조아려 사양하였네. 어찌 감히 머뭇거릴 수 있었으랴.
이미 늙어 무능하니, 다만 자애로운 마음만 돌보실 뿐이옵니다.
다만 숲 속의 도량에서 원숭이와 새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신의 본래 품었던 마음이니, 진실된 뜻을 모두 아뢰었습니다.
훨훨 날아서 치악산의 높고 험한 곳에 누우시니, 은혜로운 포상이 겹겹이 쌓여 그 절개의 순수함을 표창하였네.
호방한 광채가 갑자기 가려지고, 법의 운명이 마침내 사라지니,
탑묘가 솟아오르고 신비로운 사리가 보배로이 나타났네.
응천의 제사가 영원히 천년을 편안하게 이어지리라.
영정이 사당에 있으니, 맑은 기운이 서려 있네.
복호의 임금 교서가 자주 내려지는구나.
오직 이 한 가지는 대개 군복을 꾸미신 것이니, 이전 시대의 그 가르침(불교)을 인함과는 같지 않다.
세 분의 대사를 함께 제사 지내어, 주빈으로 삼으니,
공로를 갚고 빛나는 절개를 드러냄이 끝이 없는 데까지 미치네.
내가 그 일을 서술하여 단단한 비석에 새기니,
이에 그 후학들로 하여금 대사의 의리를 진실로 따르게 하고,
헛된 고요함에 빠지지 말고, 스승의 나라를 구한 뜻을 좇게 하라.
숭송(崇頌) 후 다시 임술년(1742년) 시월 일에 세우다.

출처와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표충비(表忠碑)
밀양금석원-한국문화원연합회_밀양문화원(1997)




'역사의 기록 > 비판.정려각.마애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전 면장 이종근 선생 송덕비 (0) | 2026.01.12 |
|---|---|
| 웅천향교 하마비(熊川鄕校 下馬碑) (1) | 2025.12.19 |
| 무신생갑계기념비(戊申生甲契紀念碑)-칠원읍 운곡리 운동 (0) | 2025.11.03 |
| 백운대(白雲臺)와 雲林臺(운림대)-칠원읍 운곡리 운동 (1) | 2025.11.02 |
| 김해김씨부자포효비(金海金氏父子褒孝碑) (0) | 2025.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