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책과 기록

괴헌문집 전(槐軒文集 全)

천부인권 2026. 6. 13. 22:11

 

괴헌문집 전(槐軒文集 全)은 류연덕(柳淵悳,1895~1923)의 문집으로 책은 양장본으로 세로글씨에 순 한문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권두에 진성(眞城) 이수락(李壽洛)의 서문을 붙이고, 괴헌(槐軒)의 영정(影幀)과 아버지 서정(曙汀)의 영정(影幀)을 붙인 후, 괴헌공(槐軒公)의 묘소와 옛집 사진을 넣고 목차를 실었다. 권 말에는 책의 저자인 손자 류필휴(柳必烋) ()을 붙였다.

이 책은 출판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1985년 가을에 발간했음은 알 수 있으나 일자를 알기 어렵다.

책의 크기는 가로 23.1cm, 세로 30.5cm이며 목차와 사진은 56, 권지1186, 권지2154, 권지380쪽으로 총 476쪽이다. 이 책은 2026522일에 헌책방 가자북(북코아)에서 1만원에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류연덕(柳淵悳,1895~1923)의 자()는 류경직(柳敬直)이고 관향은 전주(全州)이며, 안동 무실(수곡동)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호는 괴헌(槐軒)이다. 192310월 중국 병사의 공격을 받아 피살 순국했고, 이러한 공훈을 인정받아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아버지는 졸수재(拙修齋) 류정호(柳貞鎬,1837~1907)로 출신지는 경상북도 안동(安東)이다. 졸수재집(拙修齋集)168책이 전한다.

 

槐軒記

花府之東距五十里有午嶺洞, 洞之東有一小區倉村, 後背月峴, 前對岐山, 右拱渭水, 左帶經流, 其地萃淑氣其景可題詠中有槐軒者, 是誰之作而何取之謂也主翁曰, 無所取而爲也昔粤升載庭, 有一青莖微軟, 若諸草生, 而其根則非草也旋念周濂溪庭草不除之意非敢取古賢而自比也遂愛而欲知其何物春而雨則土而培之, 夏而旱則水而灌之, 秋而風則繩以維之, 冬而寒則藁以擁之始則昻掌不自盛, 如爲人所棄, 稍稍茁長, 多見人之賀, 乃槐樹也尤愛而護之, 鷄犬之踏襲, 柴而防之, 兒僮之侵害, 警而責之經幾春秋, 遂成童童一靑盖想杜陵之楠木, 江州之碧梧, 是果何物, 而遺千古之名及令傳誦其美乎, 物之美而傳之久乎, 人之德而傳之久乎人與物之相遇而然歟今物非其物, 人非其人, 而安可望傳之久乎彼巖坮山水有是槐則其勝可賞軒窓風月有是槐則其景色尤美既而取諸用則其景物圓矣 然物之美則可比其物, 人之德則莫可比於前人, 而獨愛其景物, 不亦愚哉大抵此槐之生, 非人之種, 而乃自生也嘗聞槐自生庭, 必生貴人, 故尤亦愛之不已也及其長, 可十尋圍, 可一抱春而芽則妍柔而香, 聞豈特諸花之燦爛夏之葉則陰厚而庇之, 不待殿閣之生微凉秋之實則離離而滿枝, 可見烏鵲之來啄冬之枝則霜雪交結, 可愛白花之奇異其景物之美, 則不可廢, 而棄之故遂築而軒之, 敢忘其僭越, 而謂之槐軒, 亦不欲自居而獨愛其樂也以備他日登斯而與人同樂也甭余曰, 子之志美矣, 子之言善矣然槐軒之槐, 字元不異於三槐之槐軒之義, 亦不乎, 人與物之相遇, 而欲其美之傳之久如杜陵之楠

, 江州之碧梧也否翁而不答翁是誰也倉村逸民柳敬直也以是記焉

歲靑龍之上巳 八嚴 鄭輝一題

 

괴헌기 (槐軒記)

화부(花府, 화산/안동)의 동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오령동(午嶺洞)이 있고, 그 동쪽에 '창촌(倉村)'이라는 작은 동네가 있다. 뒤로는 월현(月峴)을 등지고 앞으로는 기산(岐山)을 마주하며, 오른쪽으로는 위수(渭水)가 끼고 돌고 왼쪽으로는 시냇물이 띠처럼 흐르니, 그 땅은 맑고 아름다운 기운이 모여 있고 그 풍경은 시를 읊을 만하다.

그 가운데 '괴헌(槐軒)'이라는 곳이 있으니, 이는 누구의 작품이며 무엇을 취하여 이름을 붙인 것인가?

주인 옹()이 말하였다.

"특별히 취한 바가 있어서 한 것은 아니오. 옛날 지난날에 뜰을 거닐다 보니, 푸른 줄기 하나가 가냘프게 돋아나 마치 여러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는데, 그 뿌리를 보니 풀이 아니었소. 문득 주렴계(周濂溪)'뜰의 풀을 베지 않은 뜻'을 생각했으나, 감히 옛 현인을 본받아 스스로를 비기려 한 것은 아니었소. 마침내 그것을 아껴서 어떤 물건인지 알고자 하였소. 봄에 비가 내리면 흙을 북돋워 주었고, 여름에 가뭄이 들면 물을 대어 주었으며, 가을에 바람이 불면 새끼줄로 매어 지탱해 주었고, 겨울에 추위가 닥치면 짚으로 감싸 주었소. 처음에는 손바닥을 치켜든 듯 보잘것없어 남에게 버려진 듯하더니, 조금씩 자라나자 많은 사람이 축하해 주었으니, 바로 괴목(槐樹, 회나무)이었소.

더욱 아끼고 보호하여, 닭이나 개가 짓밟으면 섶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방어했고, 아이들이 해치려 하면 경계하고 꾸짖었소. 몇 번의 봄과 가을을 지나자 마침내 더부룩하게 큰 그늘을 이루었소. 한 자락 푸른 덮개(나뭇가지 그늘)를 보니 두릉(杜陵, 두보)의 남목(楠木)과 강주(江州, 백거이)의 벽오(碧梧)가 생각나니, 이것들은 과연 어떤 물건이기에 천고에 이름을 남겨 오늘날까지 그 아름다움이 전송(傳誦)되게 하는 것인가? 물건이 아름다워서 오래 전해지는 것인가, 사람의 덕이 있어서 오래 전해지는 것인가? 사람과 물건이 서로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인가? 지금 물건도 그 물건이 아니고 사람도 그 사람이 아니니, 어찌 오래 전해지기를 바라겠소. 저 바위와 대(), 산수(山水)에 이 괴목이 있으면 그 빼어난 경치를 감상할 만하고, 집의 창문과 바람과 달에 이 괴목이 있으면 그 경치가 더욱 아름다울 것이오. 이윽고 그것을 쓰임새에 따라 취하니 경물이 온전해졌소. 그러나 물건이 아름다우면 그 물건에 비길 수 있지만, 사람의 덕은 앞선 현인들에게 비길 수 없는데, 홀로 그 경물만을 사랑하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

대체로 이 괴목이 자란 것은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난 것이오. 일찍이 듣기를 '괴목이 정원에 스스로 자라면 반드시 귀한 사람이 태어난다'고 하였기에 더욱 아끼기를 마지않았던 것이오. 그것이 자라남에 이르러서는 높이가 십(수십 미터)에 이르고 굵기는 한 아름이나 되었소. 봄에 싹이 트면 고우면서도 부드럽고 향기가 풍기니, 어찌 문득 여러 꽃들의 찬란함에만 비하겠소. 여름의 잎은 그늘이 두꺼워 가려주니, 굳이 대궐 전각에 미풍이 불어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소. 가을의 열매는 주렁주렁 가지에 가득하니 까마귀와 까치가 와서 쪼아 먹는 것을 볼 수 있소. 겨울의 가지에는 서리와 눈이 엉겨 붙으니, 하얀 눈꽃의 기이함을 사랑할 만하오. 그 경물의 아름다움을 폐하거나 버릴 수 없었기에, 마침내 집을 짓고 '()'이라 하였소. 감히 분수에 넘치는 참람함을 잊고 이를 '괴헌'이라 일컬은 것은, 또한 스스로만 차지하여 홀로 그 즐거움을 아끼려는 것이 아니오. 훗날 다른 날에 이곳에 올라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함께하기(與人同樂) 위함이오."

내가 말하였다.

"그대의 뜻이 아름답고 그대의 말이 좋구려. 그러나 괴헌의 '()' 자는 본래 삼괴(三槐, 조정의 삼공을 뜻함)의 괴 자와 다르지 않고, '()'의 뜻 또한 다르지 않으니, 사람과 물건이 서로 만나 그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두릉의 남목이나 강주의 벽오와 같소."

옹은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옹은 누구인가? 창촌의 은거하는 선비(逸民) 유경직(柳敬直)이다. 이에 기문()을 쓴다.

청룡의 해, 상사일(上巳, 삼월 삼짇날) 팔엄(八嚴) 정휘일(鄭輝一) 쓰다.

 

[주석]

주렴계 정초부제(周濂溪庭草不除): 송나라 성리학자 주돈이(렴계)가 창전의 풀을 베지 않으며 "내 뜻과 같다"고 한 고사로, 만물과 일체감을 느끼는 어진 마음()을 뜻합니다.

두릉의 남목, 강주의 벽오: 각각 시인 두보와 백거이가 시를 통해 예찬하여 천고에 이름을 남긴 나무들입니다.

삼괴(三槐): 중국 송나라 왕우칭이 마당에 세 그루의 회나무를 심고 자손 중 정승(삼공)이 나오기를 바랐던 고사로, 가문의 번창과 귀한 인재를 상징합니다.

 

槐軒柳公墓碣銘

公諱淵悳字敬直 姓柳氏貫全州 高麗掌令諱濕爲受封之祖 中世有諱義孫 世宗朝集賢殿學士 端廟遜位 隱居自靖 號檜軒 有諱潤善自 京師始遷居安東至 孫諱復起官禮賓正 號岐峰 鶴峰金先生之甥侄也 生六子第六諱希潛 贈參判 生諱椲隱德不仕 生諱斗輝遊葛庵先生門 生諱以載 有文行 於公世祖也 曾祖諱浩文 祖諱致暹 考諱貞鎬 妣義城金氏士人鳳鎭女 雲川金先生諱涌后 高宗乙未七月十八日生公公生 有異質幼 而受讀於王府不煩敎督 十二就族父酉山公門親執灑掃 無異子侄 切問近思常志 於古人爲己之學 在家政裁割明斷人無間言至 於門外之事 雖有不合底意未嘗與人爭辨 皆隨衆俯仰鄕黨無不心悅許之 丙寅十一月十日遭先公喪越三年戊辰遭內艱喪奠祭儀一依家禮稱情素廉潔能克 於貧寒自奉儉約 而優於衛先 有山水遊觀之樂 遠近明山麗水無不探勝門前有槐樹一株自然 而生公以爲呈祥之兆 甚奇愛之自號曰 槐軒有窓槐無語 我無語默默槐 前默默默翁多事塵寰 如許日渾然同入太和中之句 公之所守可知也 以己未三月二十八日考終于 寢享年八十五葬于 家後山坐 配漢陽趙氏士人始基女 生癸巳卒癸 亥墓考位同原 育一男二女 男馨集 女眞城李胤永 固城李承贊 繼配眞城李氏士人會璧女 生癸卯卒戊寅墓前山坐 育一男一女男星集 女上洛金沙秀 馨集生六男二女 男必㤗必求必夏必度必啓必康 女豐山李銖稙 英陽南浩均 星集生二男一女 男必浩必圭女幼 李胤永嗣男時顯 李承贊男東郁 女權奇源 金沙秀男泰瑛次泓 餘不盡 錄銘曰 猗公之門蔚 然南鄕有燦 其文有潔其行 是繼是承養眞守正守庫之原 衣舄之藏片石可言幽德攸章 蔭及後昆可期熾昌

眞城 李壽洛 謹撰

 

괴헌 유공 묘갈명 (槐軒柳公墓碣銘)

()의 휘(이름)는 연덕(淵悳)이고 자()는 경직(敬直)이며, 성은 유씨(柳氏)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고려 시대 장령(掌令)을 지낸 휘(이름) ()이 봉작을 받아 시조가 되셨다. 중간 대에 휘(이름) 의손(義孫)이 계셨는데 세종조에 집현전 학사를 지내셨으나 단종께서 왕위를 물러나시자 은거하며 스스로 지조를 지키셨으니 호는 회헌(檜軒)이다.

또한 휘(이름) 윤선(潤善)이 계시니 서울(한양)로부터 비로소 안동(安東)으로 가솔을 이끌고 이주하셨다. 그 손자 부기(復起)는 관직이 예빈시정(禮賓寺正)이고 호는 기봉(岐峰)이신데,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외조카이시다.

기봉 공이 여섯 아들을 낳으셨는데 여섯째가 이름 희잠(希潛)으로 참판에 증직되셨고, 그가 이름 위()를 낳으니 덕을 감추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셨다. 위 공이 아름 두휘(斗輝)를 낳으니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셨고, 그가 이름 이재(以載)를 낳으니 문장과 행실이 뛰어 나셨으니, 이분이 공에게는 5대조(世祖)가 되신다.

공의 증조할아버지 휘는 호문(浩文)이고, 할아버지 이름은 치섬(致暹)이며, 아버지는 정호(貞鎬)이시다.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선비 봉진(鳳鎭)의 딸이자 운천(雲川) 김용(金涌) 선생의 후손이시다.

고종 을미년(1895) 718일에 공이 태어났다. 공은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서 어릴 적에 아버지(王府)에게 글을 배울 때 가르치고 독촉하는 번거로움이 없었다. 12세에 일가 어른인 유산공(酉山公)의 문하에 나아가 친히 물뿌리고 마당을 쓰니 친자식이나 조카와 다름이 없었다. 의문을 간절히 묻고 가까운 것부터 생각하는 切問近思(절문근사)’의 태도로 항상 옛사람들이 말한 '자신을 닦는 학문(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집안 살림과 정사를 재단함에는 명확하고 결단력 있게 처리하여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이 없었고, 집안 안팎의 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일찍이 남과 더불어 다투거나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무리를 따르니 고을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병인년(1926) 1110일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고, 3년 상을 마친 무진년(1928)에 어머니의 상을 연이어 당하였다. 이때 상례와 제사 의식을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행하였는데, 슬퍼하는 정은 정성스레 다하면서도 의식은 평소처럼 청렴하고 소박하게 치렀다. 가난한 살림살이를 능히 극복해 가며 스스로를 봉양함에는 매우 검약하였으나, 조상을 받들고 선조를 위하는 일에는 아낌없이 넉넉하게 도리를 다하였다.

또한 평소 산수를 유람하는 낙이 있어, 원근의 이름난 산과 아름다운 물줄기 중 경치 좋은 곳(勝景)치고 찾아가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침 문앞에 괴나무(회나무) 한 그루가 자연스레 돋아나 자랐는데, 공은 이를 상서로운 징조라 여겨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아꼈다. 그리하여 스스로 호를 '괴헌(槐軒)'이라 짓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창가의 괴나무도 말이 없고 나 또한 말이 없으니, / 묵묵히 괴나무 앞에서 말없이 서 있네. / 말없이 지내나 이 인간 세상에는 자질구레한 일들이 어찌 이리 많은가, / 그저 날마다 온화하고 고요한 대자연의 기운(太和) 속으로 혼연히 함께 들어가네."

이 시구를 통해 공이 평소 마음속으로 굳게 지켰던 지조와 경지를 가히 알 수 있다.

기미년(1979) 328일에 침소에서 편안히 수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85세였다. 집 뒤편 산의 자좌(子坐, 정북향을 등진 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첫째 부인은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선비 시기(始基)의 딸이다. 계사년에 태어나 계해년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공의 자리와 같은 언덕(同原)에 합장하였다. 이 부인과의 사이에 1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형집(馨集)이고, 딸들은 각각 진성 이씨 이윤영(李胤永), 고성 이씨 이승찬(李承贊)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은 진성 이씨(眞城李氏)로 선비 회벽(會璧)의 딸이다. 계묘년에 태어나 무인년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앞산 자좌(子坐)에 안장하였다. 이 부인과의 사이에 1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집(星集)이고, 딸은 상락 김씨 김사수(金沙秀)에게 시집갔다.

첫째 아들 형집(馨集)6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필태(必泰필구(必求필여(必夏필도(必度필계(必啓필강(必康)이고, 딸들은 풍산 이씨 이수직(李銖稙), 영양 남씨 남호균(南浩均)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 성집(星集)2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필호(必浩필규(必圭)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사위 이윤영의 대는 아들 시현(時顯)이 이었고, 사위 이승찬의 아들은 동욱(東郁)이며 딸은 권기원(權奇源)에게 시집갔다. 사위 김사수의 아들은 태영(泰瑛)이고 그다음은 홍()인데, 자손이 번창하여 그 나머지는 지면 관계상 다 기록하지 못한다.

()하기를,

훌륭하도다, 공의 가문이여! 영남 땅에서 울창하게 일어났네.

그 문장은 찬란하게 빛났고, 그 행실은 결백하였도다.

조상의 덕을 잇고 또 계승하여, 참된 본성을 기르고 바른 도리를 지켰네.

묘소를 수호하는 이 언덕, 옷과 신발을 묻어둔 이 무덤에,

한 조각 돌을 세워 공의 그윽한 덕을 명백히 드러내노라.

조상의 음덕이 후손에게 길이 미치리니, 집안이 크게 번창할 것을 기약하겠도다.

진성(眞城) 이수락(李壽洛)이 삼가 짓다.